원주민 회관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략과 만행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왜구나 임진전쟁을 자주 거론하는 한국인도 자기들이 벌인 침략과 만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여몽연합군의 침략 행위는 다음과 같다.   

 

    

 원나라 세조의 어명으로 1267년 1월, 고려의 사신 반부(潘阜)들 일행은 대마도 수호대 소수케쿠니(宗助國)의 안내로 다자이후(太宰府)에 들어가 진서봉행(鎭西奉行) 태재소이(太宰少貳) 무토 스케요시(武藤資能)에게 원나라의 국서와 고려의 서신을 전달했다. 국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대몽고국 황제가 일본 국왕에 국서를 보낸다. 근린 제국에 대해 천하를 평정한 몽고의 국위는 상승하며 짐(朕)이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고려와의 싸움도 끝나고 군신 관계를 맺었다. 일본은 아직 사신을 보내오지 않아서 침이 먼저 사신을 보낸다. 성인(聖人)은 천하를 일가로 생각한다. 통교하지 않으면 일가라고 할 수 없다. 양국 사이에 통교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일본 국왕은 어느쪽을 택해야 할지 숙려해야 한다”   

 

 

 일반적인 외교문서의 형식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평화적인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고려의 사례를 들어 몽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당시 일본은 조정(朝廷)과 막부(幕府)의 이중 권력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막부는 몽고가 보내온 국서를 조정에 보냈으나 국가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조정은 답첩(答牒)을 보내오지 않았다. 반부들은 약 5개월 후 국서에 대한 답신을 얻지 못하고 고려에 귀국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밤마다 정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팔번우동훈(八幡愚童訓)]이라는 사료에는 “(고려의 사신들은) 밤나다 돌아다니며 대재부의 지리, 항구, 군정(軍庭), 아시카케(足懸), 미로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중략) 만사를 계책(計策)하고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원나라의 조양필(趙良弼)은 1273년 3월 다시 태재부(太宰府)에 건너왔다. 이 때 지구시(築紫) 지방의 지리나 군사적으로 필요한 정찰 활동을 모두 마쳤다. 그 활동 상황은 모두 원나라의 세조에 보고 되었다. 조양필이 귀국한 후에 원의 사신 파견은 중단되었으며 외교적인 교섭은 중단되었다. 8년간에 모두 6번에 걸친 원나라 사신 파견으로는 일본을 극복시킬 수 없었고 반대로 방위 태세를 강화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한편 원나라는 이 파견을 통해 일본의 정세를 수시로 정찰했고 각종 정보를 입수하여 무력 침략의 준비를 추진하고 있었다.     

 

 1270년 말, 세조는 고려에 병력을 보내 개경 등 10군데에 둔전(屯田)을 개간했으며 총 6천 명의 둔전병(屯田兵, 주둔지에 주둔하면서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는 병사)을 주둔시켰다. 1273년 4월에는 고려의 반란군인 삼별초를 진압했다. 삼별초 진압이 끝나자 원 세조는 일본 침략을 결단했다. 1274년 1월 원나라에서 함선의 건조를 명령 받은 고려는 목재가 풍부한 해변에 조선소를 짓고 5월 말에는 대소 900여 척의 함선을 완성시켰다. 고려의 일본 침략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략에 관한 사료로 [일련상인주화찬(日蓮聖人註畵讚)], [발번우동훈(八幡愚童訓)]이나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의 [몽고래습화사(蒙古來襲繪詞)], 국외 자료로는 [원사], [고려사], 대마도의 자료로는 [제등가문서(齊藤家文書)], [종가가부(宗家家譜)] 등이 있다.   

 

    

 

 1274년 10월 5일, 몽고인, 한인 2만 명과 김경방이 이끄는 고려인 800명을 태운 9백 척의 함선이 대마도를 침략했다.    

 

 1274년의 제1차 여몽 연합군의 침략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1274년 10월 5일 오전 4시 경 대마도 사스우라(佐須浦)에 여몽연합군의 함선이 나타났다. 오후 6시 적군 습격의 보고를 받은 대마도 수호대(守護代) 소 스케쿠니(宗助國)는 대재부 진서봉행(鎭西奉行)의 “대마도를 사수해라”라는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소 스케쿠니는 대마도 사스우라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을 격퇴하기 위해 80기(騎)의 기마 무사들이 산을 넘어 사스우라에 향했다. 10월 6일 오전 2시 경, 사스우라에 도착한 무사들은 정세를 정찰했다. 오전 4시 경부터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대마도 무사들은 전멸했다. 다만 간신히 대재부에 적군의 동정을 연락할 수는 있었다. 대마도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은 주민들을 상대로 노인이나 어린애까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련성인주화찬]에는 “대마도, 이키(壹岐) 섬의 백성들, 남자는 죽음을 당하거나 잡히고, 여자는 한 군데에 모아서 손을 묶거나 손바닥에 구멍을 내서 뱃전에 매달았다. 잡힌 자 가운데 죽음을 면한 자가 없었다”고 여몽연합군의 만행을 기록되고 있다.    

 

 [고조유문록]이라는 자료에도 “몽고국에서 군사들이 지쿠시(築紫)에 몰려와 대마도의 백성들은 방호 태세를 갖춘 소마조(相馬城) 등지에 도망쳤는데 (여몽연합군은) 남자를 죽이거나 생포하며 여자들은 모아서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배에 묶어 놓았거나 생포했다. 목숨을 건진 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종시가보]에는 대마도 및 이키 섬의 희생자는 1만 3천 5백 여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소 스케쿠니의 형인 사스 군사(佐須郡司=군수)나 미네 군사(三根郡司) 및 사고 군사(佐護郡司)가 전사했다(대마도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요라 군사[與良郡司]도 전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군사들이 대마도 각지의 부임지에서 전사한 것은 여몽연합군의 9백 척의 함선에 의해 사스우라뿐만 아니라 대마도의 전역이 침략당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대마도 각지에는 여몽연합군의 만행을 후세에 전하는 ‘몽고총’이라는 석총이 남아 있다. 10월 14일 오후 4시 경, 여몽연합군이 대마도 남동쪽에 있는 이키 섬에 나타났다. 여몽연합군은 이키 섬에 북서부에 해역에 나타났는데 이키 섬은 수호대 다이라노 가게타카(平景隆)가 지키고 있었다. 여몽연합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가게타카는 신조(新城) 마을의 히노쓰메 성(城)에서 100여 기(騎)의 기병을 이끌고 쇼노사부로(庄の三郞) 성 앞에서 적군가 전투를 벌였다. 여몽연합군은 두 척에 함선에서 상륙한 400명 정도의 군사가 징이나 북을 치며 이키 섬 기병들을 포위하며 독을 바른 화살을 쏘아댔다. 치열한 전투 끝에 밤이 되자 여몽연합군은 일단 함선에 철수했다. 가게타카도 대부분의 군사들을 잃고 히노쓰메 성에 철수했다. 남은 군사들은 2, 30기에 불과했다. 가게타카는 방어전을 벌이기로 하며 히노쓰메 성에서 농성했다. 다음날, 여몽연합군은 새로운 군사들을 투입하며 성곽을 포위했다. 붉은 깃발을 나부낀 여몽연합군은 성곽을 포위하며 집단 전술로 공격을 반복했다. 가게타카는 적들의 공격을 막고 잘 싸웠으나 병력으로 밀려 가신의 소 사부로(宗三郞)를 대재부에 보내 전황을 보고 하게 한 뒤 자해했다. 가게타카의 아내도 아들을 죽이고 노모와 함께 자살했다. 남은 무사들도 서로 칼로 찌르거나 스스로 목을 베는 등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후 하카타 만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은 일본측 군사들의 저항에 밀려 불과 하루만에 함선에 철수했다. 이 때 고려의 장군인 김방경(金方慶)은 강경하게 끝까지 싸울 것을 요구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면서 더 열심히 싸우려고 하는 자세는 월남 전쟁의 한국군과 흡사하다. 그날 밤 여몽연합군은 폭풍을 만나 전멸했다. 패퇴한 여몽연합군은 퇴각하면서 다시 이키 섬과 대마도에 상륙하며 동남동녀 200명을 잡아서 원나라 세조에 공물로 바치고 있다. 살아서 들어온 자는 13,500 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