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킷 구조 자체에 열악함은 전장식 구조와 강선 없는 총열 뿐이다. 머스킷이 너무 안 맞아서 엄폐가 필요없다거나 목표물에 대고 쏴야 맞는다는 말은 과장된 말이다. 명나라에서는 화승총의 명중률에 감탄해서 나는 새도 쏘아 맞춘다는 의미로 조총이라 불렀다. 머스킷은 숙련된 사수의 손에 들어가면 일반적인 명중거리는 70~80미터 정도였고 엽병의 경우 150m에서 최대 200m까지의 명중률을 보여줬다. 선조실록에도 사수와 포수를 짝지어 100보 밖에 있는 과녁을 맞추게 해 실력을 겨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8] 조선시대 1보는 일반적으로 1.2m로 환산되니 적어도 120m 정도의 거리에선 조총과 활의 명중률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머스킷이 그 정도로 명중률이 나쁜 무기였다면 애당초 대량으로 보급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민간 사냥도구였던 활을 밀어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일반적인 조건은 아니었지만, 엽병이 아닌 일반적인 영국군 전열보병이 좋은 조건에서 175야드(160미터)에서 명중률 75퍼센트를 기록했다는 기록도 있고, 고지에서 사격할 것을 전제로 하는 요새는 전열보병의 유효 사거리를 200미터 이상으로 잡고 설계를 했다.

 

결론: 머스킷 명중률은 은근히 괜찮다, 근데 장전시간이 너무...

 

여기서 질문! 굳이 전열보병 전술을 써야하는가!

 

이에대한 답변은 이렇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흩어져서 엎드려 쏘면 간단히 이길 수 있을 것을 굳이 열 맞춰서 마주 서서 쏘려고 하는 것이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전투 형식이 정말로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었다면 진작에 전열보명은 사장되고 다른 패러다임이 등장했을 것이다. 전열보병이 주력으로 고집되었던 것은 엄연히 이유가 있었으며, 같은 생각을 그 때에도 했기에 사격전은 전열보병들이 버티고 서있는 앞에서 산병(skirmisher)들이 담당했다.

멀리 갈 것 없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도 하단에 서술하였듯 전열보병 전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아편전쟁때 청군은 비오는 날 뇌홍도 없는 세포이 전열보병들에게 궤멸당했으며 육전에서 지리멸렬했다. 이후 청군은 군제 개혁을 통해 그들의 군제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청불전쟁에선 되려 성과를 냈고, 일본 또한 1834년 사가번에서 네덜란드 군제를 연구하다 최초로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17] 개항 이후 신식 막부 육군을 포함해 1870년대까지 전열보병 전술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막부의 전열보병은 이미 전열보병 전술은 쇠퇴하던 시절이었으며 병력의 질도 한계가 있었기에 큰 효과는 보지 못했지만, 어찌되었건 무진전쟁까지 전열전술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그 밖에도 자코바이트 난 때의 컬로든 전투나,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벌을 보면 전열보병에게 섣불리 덤빈 냉병기 중심의 구식 군대가 어떠한 피해를 입는지 잘 볼 수 있는데, 러시아의 원정만 봐도 쥘베른이 쓴 저서에서 방진을 짠 러시아군 10여명에게 수백명의 유목민 기병대가 격파당하는 것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에 대한 결론은:

 

이렇게 단점이 많고 느린 보병을 피해를 줄이려고 산개해서 배치했을 때 적의 기병이나 보병대가 수백명씩 떼지어 착검돌격이라도 하게 되면 저지력을 갖추지 못해 각개격파되어 전멸당하게 된다. 즉 전열을 갖추는 것은 단순한 화망 구축뿐이 아니라 중세시대의 파이크방진과 같은 역할도 겸하고 있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는 촘촘한 진형의 유지가 부대의 생사를 가르므로 나폴레옹의 말처럼 제식이 곧 전투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머스킷에 관해 더욱 좋은점!

 

"게다가 위력 면에서도 당대의 머스킷을 능가하는 무기는 대포밖에 없었다. 150파운드 장궁을 쏘면 운동에너지가 200J을 넘길까 말까 한 정도이고 아무리 강력한 석궁도 1000J을 잘 넘지 못한다. 그러나 머스킷은 동네 대장간에서 뚝딱 만들어도 사격만 잘 이루어진다면 기본 1000J을 넘어버리니 상대의 무장 상태가 어떠하든 중상 혹은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기 쉬운 물건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