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마지막 발키리

***




드넓은 황금의 밀밭 너머, 

벌꿀주가 강처럼 흐르는 계곡을 건너고,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영웅들의 전당을 지나면, 

그 모든 풍경을 굽어 살피 듯 우뚝 솟은 청회색의 나무 한 그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청회색의 나무 위로는 무지개 다리로 이어진 순은빛 궁전이 하나 있으니, 곧 아스가르드와 나머지 8세계를 조율하는 마법사의 왕 오딘이 기거하는 거처다.




세상 모든 것들과 마법, 광기와 전사들의 주인이자 동시에 예술과 접대를 관장하는 신 답게 오딘의 궁전은 언제나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기인이사들로 붐볐다. 



신들의 초청을 받아 연회에 참석한 전사들과, 

저들의 걸작품들을 홍보하러온 난쟁이들, 

마법 학회에 참석한 엘프와 바나헤임의 신들, 

그리고 일부 아스가르드에 우호적인 거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칸에 이르는 그의 궁전은 언제나 만실이었고, 그의 손님들은 가끔씩 터져나오는 오딘의 광기를 제외한다면 세상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원받을 수 있었고,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다.


오딘의 궁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의 방에 출입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까마귀와 늑대, 입을 벌린 거대한 거인의 머리가 조각된 한 쌍의 석문 너머에 있는 그 방은, 오직 한정된 이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오딘에게 전사들을 나누어 받은 프레이야도, 오딘의 아내인 프리그도, 심지어는 후계자인 발두르조차도 그 방에는 감히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특별한 밀실에서는 손님을 맞은 오딘의 접대가 한창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오, 편히 들게나, 나의 오랜 형제여. 내게 있어 그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울지니.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가져왔는가?”



늘 앉아 있던 높다란 황금 옥좌에서 내려와, 오딘은 손수 손님의 잔에 황금을 녹인 듯 찰랑이는 벌꿀주를 따라 주었다.

자식 친구 밥도 챙겨주지 않는 불민한 후손들과 달리, 모든 북구인들과 신들의 왕인 오딘은 그 이름에 걸맞은 품격있는 대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갓 잡은 자고새 고기가 특히 신선하다네. 아니면 포도주로 푹 죄인 사슴고기는 어떠한가? 그대가 단둘이 만나길 바라 악사와 미미르도 물려두었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불러주겠네.”



허나, 상대는 오딘의 그런 곰살맞은 대접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민 음식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손수 잔을 채워준 오딘에게 황송해하기는 커녕,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거칠게 잔을 비웠을 뿐이다.



오딘과 독대한 사내는,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오딘의 하나 뿐인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것이오?”



말은 공손하되 어조는 그렇지 못한 태도로 사내는 오딘을 쏘아붙였다.



허나, 오딘은 그런 사내의 무례를 나무라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조롱하지도, 말없이 축객령을 내리지도 않은 채, 오딘은 사내를 향해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로 능글맞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글쎄… 굳이 따지자면 노인네의 변덕, 그리고 소소한 취미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 왜, 자네도 자주하던 그런 장난 있지 않던가.


어째서 인간들이 나이를 먹으면 어린 아이처럼 변한다고 투덜거리는지 알 것도 같구만 그래.”



껄껄 웃는 오딘과는 대조적으로 마주한 사내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사내는 마치 전쟁을 경고하는 사자처럼, 오딘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건 조약 위반이오! 나야 늘 내 손으로 뒷감당을 했다만 그대는 언제나 나를 부릴 뿐이었지! 이번에도 내 도움으로 일을 무마할 생각이랑 하지들 마시오.”


“조약 위반이라… 그거 재미있는 소리군. 그래서 그 조약이란 무얼 가리키는 말인가? 동방국 염라와의 계약을 이르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자네와 한 계약을 이른 말인가?



대답해주게나, 내 오랜 형제 로키여.”



물론, 오딘 역시 로키의 경고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는 척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딘은 마치 여상히 흘리는 일상적인 언어처럼 나지막히 로키에게 경고를 남겼다.



“이보게, 나의 형제여. 애초에 그대와 나 사이의 소위 그 ‘계약'이라는 것부터 나의 변덕에서 말미암았음을 잊어버린 겐가? 광기란 마치 들불과도 같아서 어느 순간 맹렬히 타오르다가도 뚝 하고 사라져 버리는 법일세. 부디 이 내가 폭풍을 몰고와 그 불길을 꺼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


“흐, 겨우 그 따위 협박으로 내가 겁 먹으리라 믿었다면 차라리 그 쓸모없는 모자걸이는 미미르에게나 넘겨주시구려. 


나는 로키요. 세상 모든 불씨의 주인인 라우페이의 아들 로키. 세상을 멸망시킬 불씨도, 어둠을 몰아낼 불씨도, 심지어는 당신 가슴에 불을 지르는 광기의 불씨마저도 모두 내 소관이라는 것이지. 


그러니, 다같이 수르트의 불꽃에 타죽고 싶지 않거들랑 얌전히 헤임달을 시켜 그 빌어먹을 수작을 철회하시오. 

본래 불씨가 갓 피었을 때 필요한 것은 거친 불꽃이 아니라 몸집을 불릴 톱밥임을 그대로 잘 알지 않소?”


“그렇지. 하지만 그대도 알다시피 사람의 생각이란 빛보다도 빠른 법일세. 그리고 우리 신들은, 바로 그 변덕스럽고 재빠른 인간들의 생각이 만들어낸 운명에 지배당하는 존재고.  


그러니 자네의 그 잘난 계획대로 그 아이가 우리를 구원해줄 존재라면, 마찬가지로 우리 신들의 생각이 만들어낸 난관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감히 신들의 신앙을 받고자 한다면, 그 신들조차도 차마 끊기 두려워하는 인연과 운명을 넘어서는 기적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는 말일세.



자고로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자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 말이야.”



오딘 성질 고약한 노인네처럼 히죽 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거렸다.



“당신은, 정말로 성격 고약한 노인네요.”


“아무렴 순진한 아이를 꼬셔다 가시밭길로 내몬 자네만 할까?”



오딘의 시니컬한 대꾸에 로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한편, 비밀의 방에서 마주앉은 오딘과 로키가 늘 그래왔듯 서로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을 그 시간. 


이역만리 이상 떨어진 동방의 어느 허름한 여관 안에서도 비밀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만남에 참석한 이들 중에는 앞선 두 신과 관련 있는 이들이 모두 있었으니, 각각 전직 발키리인 시르와 시구르드였다.




전직이라고는 하나 축제의 건배사를 도맡는 신의 권속 답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직 저승사자인 시르였다.

그녀는 저의 주신이 로키에게 그러했듯, 제 앞에 마주앉은 두 사람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변변치 못하지만 마음껏 먹어. 본래라면 좀 더 제대로 된 것으로 가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말이야.


그렇다고 얻어 먹기에는 그쪽 아가씨도 알다시피 저승의 규칙이라는 게 좀 빡빡하잖아. 그러니 양해해 줬으면 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생결단을 내려 했던 상대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저승사자 시르는 호쾌하게 두 사람을 대접했다.

어찌 보면 속임수에 속아 신성한 결투를 모욕 당하고, 임무를 방해받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건만 시르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 전쟁이란 게 원래 다 이런 거잖아. 한데 뒤엉켜서 싸우다가 운명의 선택을 받은 놈이 살아남는 그런 부조리극.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패배한 나는 운명마저 설복시킨 후배님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보내야지, 비겁했다느니 뭐니 하며 군소리를 하는 건 옳지 않아. 안 그래, 시구르드?”


“그렇지. 전쟁에 있어 비겁하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거나 하는 건 전부 개소릴세. 괜히 혓바닥만 긴 나약한 놈들이 제 치부를 감추기 위해 늘어놓는 허튼 소리지.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시르 자네야 말로 진정 전사들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자일세.”


“과찬이야.”




의문에 대한 답도 듣고 콧대 높은 저승사자로부터 칭찬도 들었건만, 사희는 되려 기분이 찜찜해졌다.

만난지는 저랑 훨씬 오래되었건만 평소의 저는 툭하면 밀어내는 주제에 오늘 첫 만난, 심지어 쌈박질로 그 안면을 튼 상대에게는 이토록 다정하다니.


물론, 제3자가 보았다면 오히려 사희 그녀에게 좀 더 신경쓰는 면모가 많음을 알아볼 수 있었겠다만은 원래 사람의 눈은 한쪽에만 달려 있어 뒤는 돌아보지 못하는 법이다.



게다가, 유유상종이라. 성격 괴팍하기로는 둘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들이었던 만큼, 사희는 제 변태적인 행보들로 말미암아 시구르드의 은근한 경계를 사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사희는 자꾸 저만 소외되는 듯한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흠흠, 그보다 시르 님? 제가 알기로 시르 님께서는 염라대왕님의 명령으로 이승에 올라온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요. 공교롭게도 그 임무가 저희가 맡은 임무와 겹치는 듯 하니 잠시 정보 공유의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응? 아, 좋지.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잘 되었어. 그럼,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려나….”



순진한 시르는 그런 사희의 음습한 속내도 모른 채 순순히 화제를 바꾸는데 동의했다.

오직 시구르드만이 이번에는 또 무엇 때문에 사희가 심통을 부리는지 은근히 걱정했을 뿐이다.


그렇게 세 사람의 동상이몽 속에서 시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대충 일주일 전이었을 거야. 보름째 계속되는 철야에 맛이 가버린 강림 부장님이 또 일이 늘었다고 쌍욕을 내뱉던 게 그때였거든. 물론 우리 부장님이 지랄하는 게 하루이틀이 아니니 만큼 그때는 크게 문제를 못 느꼈어.


그런데 대략 이틀 전, 염라 사장님께서 갑자기 날 호출하면서 무언가 일이 제대로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지. 우리 사장님이 노처녀 히스테리가 있기는 한데 또 일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날 부른 사장님께서는 대뜸 아는 선배나 후배가 있냐고 그러시더라고. 아무리 봐도 기운이 영 이질적인 게 내가 있던 동네에서 온 놈이 사고를 치는 것 같다면서 말이야. 물론, 후배님이 있는 줄은 몰랐던 나는 한사코 모른다고 했고 우리 사장님은 그럼 알아 오라며 나를 여기까지 보냈던 거야.



그래서 툴툴 거리면서 지상에 올라와 헤매다가 후배님을 봤고, 그 다음은ㅡ 알지?”


“아, 네….”


결국 말만 장황했을 분, 영양가 있는 정보라고는 ‘그들 발키리처럼 북구에서 건너온 신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그마저도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대충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에 의존하는 것이고.


물론, 계와 저승의 율령이 공명한 점이나 그 추측을 내놓은 사람이 염라대왕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사실에 가까우리라는 점은 분명했지만 범인을 잡는 데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공산이 컸다.



실제로도 눈앞의 이 발키리 겸 저승사자는 장장 이틀 동안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건만 애먼 그들과 드잡이질을 한 것이 성과의 전부가 아니던가.



결국 세 사람 모두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회의는 시간과 함께 의미없이 흘러갔다.





***



그렇게 산 허리에 걸터앉아 있던 태양도 하산을 선택하며 집집마다 하나 둘 등불이 걸릴 만큼 시간이 지났을 무렵, 더 이상 식당에서 뭉그적대기 어려웠던 일행은 등불 하나에 의존하여 처음 그들이 마주했던 버려진 산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본래는 그집 여관 숙소에 머물 생각이었으나, 어차피 저승사자랑 함께 해야 하면 사람은 없는 편이 이롭다는 시르의 강력한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사희로서는 맨바닥에서 유숙하는 것보다야 낡았어도 제대로 된 침구와 천장이 있는 여관이 좋았으나 저승사자와 평범한 사람이 함께 있어봐야 좋을 일이 없음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시르가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까닭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서라기 보다는 다른 곳에 목적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예상대로네. 범인은 언제나 현장으로 돌아온다고 했다던가.”


짧게 휘파람을 부르며 시르는 허리춤에서 사인검을 뽑아 들었다.

시르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느낀 시구르드 역시 사희를 지켜서듯 도끼를 쥐고 앞으로 나섰다.



“이, 이게 무슨…..”


뒤늦게 앞선 둘이 본 것의 정체를 확인한 사희는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얕게 탄식했다.

살면서 별 해괴한 것을 잔뜩 본 그녀조차도 이토록 끔찍하게 생긴 것을 본 경험은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뭐긴 뭐야. 원혼을 400개나 쳐먹은 괴물 늑대지. 찾아다닐 필요는 없어서 참 잘됐지?”



사희는 역시 자신과 시르는 궁합이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