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기껏해야 대영제국에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가 만들어진 날, 혹은 성 비토나 크레센시아의 축일 정도로 여겨지는 날.

이미 신교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심지어 조선산 마법학의 여파로 유교까지 물든 독일 땅에서는 그다지 별일이랄 것이 없는 날이었다.
오늘, 그러니까 1888년의 6월 15일까지는 말이다.
그야 이 날은 제국 수립 이후로는 최초의 대관식이 있는 날이었으니까.
오늘은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가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이 즉위한 지 십 년 만에 독일 제국의 카이저 자리를 황태녀에게 양위하는 자리였다.
...그랬기에 본인은 치르지도 않았던 대관식을 베를린에서 치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빌헬미나 황태녀가 어떤 존재인가.
이제 떠오르기 시작하는 극동의 강국에게 라이히가 제일 먼저 수교를 할 수 있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며.
동방 마법학을 들여오고 해석기관과 같은 각종 기물들의 연구를 지시하여 라이히의 부흥을 이끈 천재 소녀이자 훌륭한 대마녀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황태녀라는 자리임에도 여색에 환장하고, 마법에 환장하며, 기이한 발명품들에 끊임없이 광적인 호기심을 내비치는, 이 낭만의 시대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한 괴짜라 평해지는 존재 역시 황태녀였다.

"...빌헬미나."
물론, 누구보다 가장 황태녀를 걱정하는 것은 카이저의 자리를 양위하는 프리드리히 3세였지만 말이다.
황태녀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역사의 흐름과는 달리, 덕이지 태조 빌헬름 1세께서 10년이나 이른 1878년에 붕어하시는 바람에 제대로 카이저 노릇을 하게 된 프리드리히 3세.
당장 겉으로 보기야 이 시대 명예욕이 몸을 지배해 버린 상류층이 그랬듯이 언제나 정정했고, 본인도 앞으로 5년은 지나야 슬슬 양위 생각을 할 계획이었다.
당장 본인이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지만 않았어도 그리하려 했건만.


...물론 황태녀 빌헬미나가 이미 대단한 위업들을 달성한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황태녀로써 벌인 일.
프리드리히 3세의 눈에 빌헬미나는 아직 어린 딸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빌헬미나가, 과연 카이제린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지존으로써의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 논란의 주인공이신 차기 카이제린, 빌헬미나 황태녀께서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하면.
"거기, 왼쪽 날개의 마법회로가 엉켰느니라."
베를린 외곽에서, 비행기 손보는 것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것도 대관식에 참석할 예복 차림 그대로.
"...헌데 진짜로 이 기물을 가지고 대관식에 참석하시려는 겁니까, 황녀님?"
"괜찮아. 아바마마께는 말씀드렸어. 아바마마께는!"
들뜬 황태녀의 입에서 나온, 무책임하고 격식 따윈 내던져버린 한 마디에 모두가 이미 해탈한 자의 너털웃음을 흘리는 비스마르크와 이마를 감싸쥐는 차기 재상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러낸 것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이쯤 되면 소문처럼 극동의 카이제린을 만나고 그 또라이 기질이 각성한 게 아니라, 되려 극동의 카이제린이 꼬마시절 황태녀 전하의 순수한 똘끼에 물들어버린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단순히 마법 문명이 발달했다는 것 말고는 고요하기 그지없던 극동의 잘 알려지지조차 않은 국가의 여군주가, 형님 국가라던 키타이의 외교적 결례를 빌미로 선제 타격을 가해 만주의 주권을 따낸다는 발상을 해내고선 그걸 저질러서 성공까지 해냈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기 힘들었다.

"...와..."
"허허, 정녕 이것이 우리 손을 거친 게 맞단 말입니까?"
...물론 이러한 감상은, 그 문제의 극동국가에서 온 유생들이라고 해서 다르지도 않았지만.
하기야 이 황태녀가 제국의 황태녀가 아닌 보로서 왕녀일 적에 대륙 반대편으로 왔을 때에도 상당한 기행을 선보이기는 했다.


제아무리 작금의 황상께서 이 황태녀와 나이, 인종, 심지어 공간까지 초월한 친우지간이셔도 그렇지.
그 어린 나이에 황상께 쫄래쫄래 가서는 '소녀와 협업하여 비거를 만들어보시지 않겠나이까?' 하고 말하는 건 대체 어느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란 말인가.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 말도 안되는 기물의 제작이 실제로 성공해서 눈 앞에서 하늘로 박차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 과정에 본인들이 절대 무시 못할 도움을 주었다는 것 때문에 이를 눈 앞에 두고 부정조차 할 수 없었다는 거지만.

아무튼 그런 기행을 해 온 황태녀이니, 그 하늘을 나는 기물에서 제 손으로 만든 낙하산만 가지고 뛰어내려보겠다는 발상을 하는 건 그다지 이상하지도 않은 것 아닐까?
그들이 그리 착란에 가까운 의식의 흐름을 거치며 정비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우리의 황태녀께서는 일의 처리과정이 만족스러우셨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셨다.
"흐음, 예상보다 정교하게 새겨졌네. 좋아. 이제 준비는 다 된 것 같군."
이내 배낭과 고글을 챙기고서는 뒷좌석에 앉은 빌헬미나의 시선이 자연스레 죽을 상을 하고 있는 조종석의 파일럿에게 향했다.


오토 릴리엔탈.
황태녀가 고향의 역사에서 기억하기를, 글라이더 실험 비행을 하다 추락사고로 인한 경추 골절로 저 세상으로 떠난 비운의 남자.
여기서는 황태녀의 명을 받들어 동력 비행기의 초도 비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아직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세계 최초로 하늘을 날아보았던 이 사내는.
...그 두 번째 비행을 이제 카이제린이 될 예정인 황태녀와 함께하며 첫 번째 비행에 못지않은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방금 전까지 마력회로의 점검을 하던 유생들 중 한 명의 손에 의해 돌기 시작한 프로펠러가, 이내 축으로 연결된 내연기관에서 나오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내 계기판에 술식이 떠오르며 기관으로 마법의 빛무리가 몰리는 것과 동시에 프로펠러는 더더욱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고.
황태녀가 직접 고안해낸 낙하식 캐터펄트의 무게추가 중력에 의해 대지의 품에 안기며 그 반대편에 매달린 밧줄을 잡아당기자, 허공으로 내던져진 비행기가 푸른 창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29년 인생 처음으로 하늘로 날아오른 시점에서 황태녀의 감상은.
'좀 밋밋한데?'
...고작 이거였다.
다른 사람들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하늘을 나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감상은 내비칠 수 없었겠으나, 그녀에게는 기억이 있었다.
지금의 캔버스와 나무로 제작된 작디작은 물건과는 궤를 달리하는 창공의 거체에 몸을 맡긴 기억이.
분명 겁이 많았던 그 시절에는 이륙하는 그 순간에도 놀이기구라도 타는 것마냥 기겁을 해대고는 했지만.
그때에 비하면 간땡이가 땡땡하게 부어오르기라도 한 건지, 그 거체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연약한 비행기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어머니 대지를 벗어나는 느낌을 받았는데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예정된 대로 베를린 황제궁으로 향하겠습니다."
혹시나 조금이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라는, 어째서인지 간절함이 담겨 있는 오토의 말과 함께 비행기는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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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흐, 죽이네."
대관식이 치뤄지는 황제궁에서 어림잡아 백여 미터 위의 상공.
흑백적의 제국 국기가 맑은 하늘에 그려지는 것을 뒷좌석에서 턱을 괴고 바라보며 웃음을 흘리던 차기 카이제린은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준비는 되었네. 내가 내리면 이륙했던 곳으로 향하도록."
"...진짜로 뛰어내리실 생각이십니까. 황태녀 전하?"
이 막무가내 황태녀 전하의 행보가 꽤나 신경쓰었는지, 바람 소리와 엔진 소리에 반쯤 묻혔는데도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올 정도였다.
이미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오토는 지금이라도 황태녀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겁을 먹었기를, 어서 선황께서 미리 언질을 하시어 출입을 막아놓은 대로에 착륙해달라 명령하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어허, 괜찮다니까 자꾸 그러네! 그대마저 이 몸을 못 믿으면 어찌하는가?"
...이어지는 황태녀스러운 답변은 그 혹시나를 역시나로 일축해버렸다.
파일럿이 코앞까지 다가온 운명에 쳬념하거나 말거나 황태녀는 태연하게 자리를 벗어나 뛰어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흐흠."
보통사람은 기겁할 까마득한 아래를 웃음기 어린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태녀는, 이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내렸다.


바람이 살갖을 때린다.

중력의 주박에서 벗어난 몸뚱아리가 공중에 걸린 듯한 짜릿한 전율을 선사한다.
순식간에 본인을 향해 쑥쑥 다가오는 지면을 가만히 응시하던 황태녀는, 이내 메고 있던 배낭 한 켠으로 튀어나온 끈을 잡아당겼다.
-펄럭!
열린 배낭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낙하산.
나름 우아하게 창공을 가로지르며 하강한 황태녀는, 이내 인근의 들판으로 무사히 내려앉았다.
-쿵.
...소리부터가 사뿐히 내려앉았다고는 전혀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무사히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예상보다는 살짝 큰 충격이요, 일반인이면 발목이 삔 고통으로 바닥을 구르고도 남을 상당한 충격이었음에도 황태녀 본인 입장에서는 애당초 낙하산이 망가져 그대로 자유낙하했어도 죽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
이 정도 오차야 뭐.
실전에서 쓰기엔 아직 고칠 게 많구만.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빌헬미나는 그나마 유의미한 피해라 할 수 있는 먼지투성이 예복을 툭툭 털어냈다.


"그래서 제 연설 단상은 어디 있죠?"
생글생글 웃으며 등장한 황태녀의 모습에 모두가 얼이 빠져서 할 말을 잃었다.
뭐, 잊혀져가던 해석기관을 발굴해서는 계산혁명을 일으키셨고, 라이히 전역을 들쑤시며 어둠속을 지배하던 마녀 카르텔을 손수 조져버리신 황태녀께서 사고를 치겠다고 사전경고까지 하실 정도면 뭔가 큰 일을 저지를 거라 예상은 했지만.
하늘을 나는 기물로 대관식 자리에 도착해서 하늘에 흑적백 삼색기를 수놓을 것으로도 모자라, 천쪼가리에 매달려서 하늘에 맨몸을 내던진다니.

'이게 보통 사람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발상인가?'

비행기를 보고 사고가 정지되지 않은 이들 모두에게 하나같이 드는 생각이었다.


"...오, 오늘 일은 기억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황태녀 전하."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린 차기 재상이 떨굴 뻔한 모노클을 바로잡고, 애써 억지 웃음을 지으며 순화된 표현으로 항의를 표했다.
그 '순화된 표현'에 온갖 가지 잔소리며 걱정 섞인 조언들, 그리고 차마 이제 막 대관식을 통해 카이제린이 되려는 황태녀이자 둘도 없는 친우에게 내뱉을 수는 없을 다양한 종류의 육두문자들이 내재되어 있었음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으리라.
뭐 차기 재상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카이제린의 자리에 오를 황태녀 빌헬미나는 신난 발걸음으로 단상으로 향했지만.
-톡, 토독.
웅웅대는, 이번 생에는 난생 처음 들어봤지만 익숙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이제 막 마이크가 상용화된 시점에서 이 정도로 깔끔한 소리 증폭이라니.
역시 마법은 사기야. 라고 생각하며 황태녀는 목을 가다듬었다.


두 번째 라이히의 국민 여러분!
그대들은 10년도 더 전, 위대한 투쟁을 통해 라이히의 재통일에 성공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목표이자 이상이었던 독일 국민의 국가는 어려분의 위대한 헌신 끝에 반석에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우리의 목표인 라이히의 탄생을 완수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누군가는 머나먼 대지를 정복하여 그곳의 축복받은 자원을 누리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러시아를 비롯하여 수많은 식민 제국들이 해오던 것입니다.
이미 이웃들의 손이 닿아 있는 재보에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군가는 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우리 손에 넣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의 친우 브리튼을 비롯한 수많은 해상제국의 업적이자 재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늘. 하늘만큼은 아직 그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연과 풍선에 매달려 하늘을 정복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지요.
우리가 이웃들의 자랑거리들을 질투하지 않고, 우리들만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누구도 손에 넣지 못한 하늘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세계의 눈은 이제 거대한 대지와 광활한 바다를 넘어, 아직 사람의 손에 닿지 않은 푸른 창공으로 항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정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작금의 세계가 상상하지도 못한 여러가지 일을 해낼 것입니다.
제가 쉽게 해냈다고 하여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은 어려울 것입니다.

수많은 실패가 잇따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고되기에 그 길은 더더욱 가치있고 고귀합니다.

그리고 그 명예로운 길의 선두에는 항상 저의 라이히가, 여러분의 라이히가 있을 것입니다!

짧다면 짧은 연설이 끝나고, 잠시간의 정적이 흘렸지만.
이내 함성이 터져나왔다.
비록 통일되지도 않고 저마다 조금씩 다른 표정에,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열광에 휩쓸린 이들도 상당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광이었다.
단순히 황태녀의 독단으로 급조된 연설 현장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호응이었다.


물론 황태녀의 입장에서, 이는 단순한 연막에 불과했다.

한순간에 식민지 분쟁으로 외교를 파탄낼 수 있는 라이히라는 거인의 눈을 항공시대 개막이라는 황금 덧칠로 가린 것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라이히의 국민들이 식민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찌든 깡패들이 아니라 벨 에포크의 향취에 취한 낭만적인 도전자들로 남는다면. 

그것으로 이 평화를 조금이나마 이어나갈 수 있다면 잘 된 것이 아닐까?
그거면 되었다, 라는 표정으로 차기 카이제린은 밝게 웃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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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흘러,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관심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대관식조차 마무리된 후.
"그래서 아버지, 제 대관식 개막연설은 어땠나요?"
"마인 빌헬미나..."
대형사고를 치고선 또다시 그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함께 들어온 딸아이의 모습에 싱긋 웃어보이는 프리드리히였지만.
...어린 시절처럼 쓰다듬기 위해 내뻗은 손끝이 긴장으로 잘게 떨고 있는 것은 절대 숨길 수 없었다.
"아무래도 너는 너와 꼭 닮은 아이를 낳아봐야 내 마음을 이해하겠구나."
"으음..."
이 말에서만큼은 정곡을 찔렸는지, 이제는 카이제린의 자리에 오른 전 황태녀 빌헬미나는 난감한 표정과 함께 여러 의미가 담긴 웃음을 흘리는 부친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꼭 보여드리고 싶었는걸요."
...설마 그 카이제린이, 아무리 시한부라는 운명을 받온 선황 앞에서라고 해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선황을 포함하여 아무도 예상 못했지만.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잘 하는 것을...제가 자신있어 하는 것을."
성군이 될거라 하는 평을 받지만 그건 본인이 마법 천재, 대마녀이기에 그렇지.
스스로가 진실로 왕재인가 하면 사실상의 전제군주라는 입장에서는 절대 아니라는 게 빌헬미나 본인의 평이었다.
차라리 본인을 이 자리에 떨궈 놓은 노망난 빌리 유령이 그쪽으로는 더 잘났겠지.
무엇보다 하기 싫어하는 것을 넘어 관심조차 없던 일을, 어찌 잘해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자신있는 활동을 하는 것을 보여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철부지 같지만, 여전히 순수한 그 모습을.
이것이 아버지의 우려에 대해 카이제린이 생각해낸 최선의 답변이었다.
...그렇다고 대관식 날 세계 최초의 공수낙하를 시전하는 건 누가 봐도 뭐지 싶을 정도의 기행이기는 하지만.


"내가 괜한 오해를 한 것 같구나."
그리고 이 뜻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선황에게 전달되었다.
하여, 선황 프리드리히 3세는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한때 크릭스슈피르(워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장교들과 군사학에 대한 토론을 즐긴다는 사실을 듣고 아버지 빌헬름 1세의 군국주의적 색채에 물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내심 불안해했었다.
고집불통인 딸이 의회의 충심어린 충고마저 무시하는 전제군주가 되어, 자신이 구축해 놓은 의회 전통의 대를 끊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의 딸은, 이제 카이제린이 된 황태녀는.
책을 읽으며 새로운 사실에 눈을 반짝이던 그 어린 시절 그대로였다.
군사무기를 좋아하고 독선적이다?
알 게 뭔가.
지금 이 철부지 딸내미는 역대급의 철부지짓을 저질러주며 그간 선황께서 걱정해오신 모습들이 모두 본인 특유의 괴짜 취미의 시녀만도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무렴 잘 할 줄 모르고 하기도 싫어한다면 어릴 적의 본인이 그리 말했듯이, 어련히 입헌군주로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의미 아닌가?

"...하지만 내가 한 말은 엄연히 진심이란다."
"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카이제린의 얼굴.
딸아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한 줄기 걱정조차 날려 버린 선황의 미소에는 약간의 장난기까지 묻어나오고 있었다.
"네 그 성향이 어딜 가진 않을 텐데 말이지. 너도 언젠가...먼 언젠가에는 이 아비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다."
"???"
...여전히 선황의 조언에 갈피를 잡지 못한 카이제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네 아이의 어머니인 카이제린이었다만, 이 다 큰 철부지가 방금 전까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스물 아홈이라는 나이로도 이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느껴졌으리라.
카이제린은 그저 회광반조를 보여주시는 선황의 귀중한 충고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어머니, 저는 파일럿이 되어 라이히의 하늘을 지키고 싶어요!"
"......아하."
꽤나 시간이 흘러.
호엔촐레른 황가 6남매의 막냇둥이 꼬마 루이제가 수상하게 항공기를 밝히는 소녀로 자라나는 일이 있을 예정이었지만.
이는 앞서 선황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아직 한참 먼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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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머역대회라고! 그것도 판타지 머역이라고!!

라는 생각과 함께 용기포션의 기운으로 후다닥 질러버린 8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