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한창 나무라이브를 즐겨 하던 시절, 나는 창작소설 채널이 생겼다는 것을 보았다. 그 채널을 보고 나는 그 전까지 그려왔던 상상을 소설로 쓰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바로 내 첫 작품인 '전갈이 왔다는 전갈'이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올린 그 작품은, 다행히 사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개념글로 선정되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닭다리와 돌다리', '인테리어 가게' 등 아재개그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을 연달아 투고했다. 나중에 알게 된 말이지만, 채널 초기에 제대로 된 작품을 올려 창작소설 채널을 소설 창작 전문 채널로서의 위치를 만들어 준 사람이 나였다고 한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부국장을 모집할 때 자원했다. 국장은 나를 부국장으로 뽑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주딱에게 백일장을 제안했다. 그리고 개최했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창작소설 채널은 어느새 많은 사람들의 창작의 장이 되고 있었다. 릴레이 소설인 플라즈마 소드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새 소설 창작은 내 삶이 되어있었다. 나는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기쁨만으로, 다른 사람과 상상을 공유한다는 기쁨만으로 소설을 써내려갔다. 채널에 정이 들었고, 어느새 내 삶의 낙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 쯤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창작문학 채널의 국장이 되어 있었다. 책임감이 들었다. 의무감이 들었다. 다행히 일은 어찌저찌 성공했다. 나는 유저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었고, 나중에 어떤 유저가 카리스마 있는 아저씨인 줄 알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다.


나는 채널의 세대교체를 희망했다. 그래서 취임 당시의 약속대로 임기가 끝나자마자 다른 부국장에게 국장 직위를 양도했다. 그는 러시아의 유학생이었는데, 처음에는 잘 하나 싶었더니 나중에 잠수를 타서 사라졌다. 그래서 결국에 내가 다시 국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사이트 운영자를 모욕했다가 사이트 차단을 당했다. 이때 국장 직이 다른 부국장에게로 넘어갔다.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였다. 디시인사이드의 유입으로 나무라이브가 아카라이브로 개혁되는 과정에서 기존 주요 채널들의 국장들이 단체로 차단당했다. 이 숙청에서 나는 운 좋게도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어쩌다보니 국장 직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시류에 맞게 창작소설 채널을 창작문학 채널로 개편했다. 탭 기능이 없어 잡담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었던 창소챈러스 채널을 폐지하고 창작문학 채널로 합쳤다. 기존 유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문학을 허용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시와 수필 등 다른 장르들도 대거 수용했다.


결과는 무난하게 성공적이었다. 현재 구독자 수는 3194명이고, 시 장르가 채널의 주류가 되었다. 유저들의 유입도 어느 정도 들여왔다. 이분기의 문학과 올해의 문학도 잘 굴러갔다.



그러나 어딘가 공허했다. 어느새 나에게 채널에 대한 애정이 점점 사라지고, 속이 빈 의무감만이 남아있었다. 머릿속에 소설의 시놉시스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글을 아무리 고쳐써도 어딘가 딱딱함이 배어나왔다.


돌이켜보니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소설은 힘든 일에 대한 고통의 피난처이자 도피처였다. 공상은 나에게 현실의 폭력으로부터의 피난처였다. 그러나 폭력은 너무 길게 이어졌고, 한 톨의 감성마저 매말라버렸다. 그것이 원인이었다.


소설을 쓸 정도의 감성은 매말랐고, 나는 창작문학 채널을 나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했다. 채널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PTSD가 절정에 달해 어딘가로 트라우마를 배출해야겠다 싶을 때 그 감정을 담아 시를 써서 업로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랐고, 댓글이 많이 달리길 바라는 나를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그 영향은 국장으로서의 업무에서도 나타났다  매주 일요일에 wbn(이주의 문학)을 선정하면서 귀찮다고 생각했다. wbn이 싫었다. 미루고 미루는 나태의 끝을 보이다가, 결국 wbn 선정일을 아예 월요일로 변경시켰다. 그마저도 요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툭하면 화요일이나 수요일에 선정하기 일쑤였다. 매주 wbn을 선정하면서 회의감이 들고 자괴감에 휩싸였다.


이분기의 문학? 올해의 문학? 매 분기가 끝나는 것이 싫었다. 투표 결과를 산정하기 싫었다. 처음에는 플랜더스의 개로 광기 넘치는 광고도 만들고 채널을 살리려는 열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사라졌다.



대학교에 진학하며 정신과를 다녔다. 그 결과 나를 6년간 붙잡았던 불안장애가 완치되었고, 우울증은 내달이면 완치될 예정이다. 이제 사람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놀러다니는 친구도 여럿 생겼다.


그러나 채널에 대한 열정은 되살아나지 못했다. 나는 어느새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인간이 되어있었고, MBTI도 F에서 T로 바뀌어 있었다. 소설을 다시 시작하려 할 때도 소설을 어떻게 쓸 지에 대한 감도 잡히지 않았고, 차라리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예전에 썼던 플라즈마 소드를 볼 때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당시 내가 떠올렸던 상상의 나래가 집약되어 지금 봐도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었다. 전투씬은 다채로웠고, 반전도 신선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글을 쓸 때면, 사고가 경직되고 스토리가 삐걱이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국장직을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이 오묘한 애정과 의무감이 그 결심을 미루게 했다.


결심을 고심하고 또 고심해왔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서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다.


2023년 4분기 이분기의 문학 선정이 끝났다. 2023년 올해의 문학 선정이 끝났다.


이제 채널위키에 정리만 하면 된다.


그리고 광고만 달면 된다.


그러면, 나의 미련은 사라진다.


그런 생각과 함께 나의 계정에 남은 42만 포인트를 바라본다.



이제 나도 이 채널을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 나도 이제 나의 도피처이자 피난처였던, 그리고 나의 과거의 한 축인 창작문학 채널의 품에서 벗어나 성장할 때가 된 것 같다.


잘가라, 창작문학 채널. 잘가라, 나의 학창시절의 한 축이여. 잘가라, 나의 몇없던 버팀목이여.


잘가라, 나를 속박하는 나의 구원줄이여.


잘가라, 이제 퇴고도 하지 않고 이런 글을 그냥 올려버리는 나의 위선적인 애정과 의무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