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떼라.」

 

  눈을 감고서 나지막이 말한 누나가 다시 입을 닫았다. 주름 하나 없는 그 미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번엔 또 뭔데?」

 

  누나는 대답도 없이 뒤쪽의 제단을 향해 돌아섰다. 초 두 자루와 시루떡 한 접시만 덩그러니 올려두면서, 무슨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한다는 건지.

 

  「손 떼라고 했다.」 

 

  쪼르르 흐르는 소리와 함께 청주 냄새가 물씬 풍겼다. 놋잔에 따른 술을 벌컥 마신 누나는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천주쟁이랑 엮여서 좋은 거 없다.」

 

  「동생 친구가 신부인데 하는 소리 하고는. 그리고 술 좀 작작 마셔.」

 

  나는 몸을 일으켜 문을 확 열고, 문지방 위에 발을 올렸다. 밀려드는 노을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더 늦게 내려가도 캄캄해지겠지.

 

  「한석이가 뭐가 어때서? 어릴 때 그렇게 잘 놀아놓고는.」

 

  눈을 다시 뜨고는 신발을 신고 마당을 가로지르자, 누나가 나를 다시 한번 불렀다.

 

  「대혁아…」

 

  「나 간다. 동네 어르신들께 안부 잘 전해드리고.」

 

  뒤따르는 말들을 듣지도 않고, 대문 밖을 나서 운전석에 올랐다. 나도 술주정으로 밥 벌어 먹고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마지막으로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누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대로 액셀을 밟았다. 이럴 시간에 알코올 중독 치료라도 알아보라지. 이윽고 노을에 물든 마을이 백미러에 비치자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누나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정확히 3일 뒤였다. 늦은 아침, 한 여대생이 서에 찾아와서는 한석이가 자신을 칼로 찌른 뒤 도망쳤다고 했기 때문이다.

 

* * *

 

  「선배님 친구분이라고 하셨죠?」

 

  성당 주위의 CCTV를 확인하던 후임, 박 경위가 운을 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영상만으로도 한석이가 유죄라고 하기에는 충분했다. 시간이랑 상황이 모두 여대생의 진술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영상 안의 한석이는 그 여대생과 같이 교육관 건물로 들어갔다가, 몇 분 후 뛰쳐나와 카메라가 없는 성당 뒤뜰로 향했다. 신부들 특유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까만 옷을 부여잡고 부리나케 달리는 친구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별거 없는 대화가 몇 번 오갔다. 흉기는? 용의자가 가져갔답니다. 왜 어제 일을 오늘 신고해? 너무 놀라서 그럴 겨를이 없었답니다. 그게 말이나 되냐는 말을 내뱉으려다 삼켰다. 그런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니까.

 

  「이야, 신부들 더럽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걸 실제로 보게 되네요.」

 

  박 경위가 덧붙인 말에 대꾸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한석이가 저럴 녀석이 아닌데. 진심 하나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대단한 녀석인데. 더욱이 나쁜 의도로 그럴 녀석이 아닌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정황상 한석이가 한 짓이었다. 냉철해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디로 도망쳤을까. 나는 가능성 있는 장소들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신부복 차림으로 갈 수 있는 곳― 한석이의 삼촌이 계신 수도원? 거기였다면, 게다가 한석이가 정말 그랬다면 연락이 왔을 것이다. 그분이 전직 경찰이시니까.

 

  신부복을 어디에 벗어두고 숨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여름에도 빳빳한 셔츠에 그 둥그런 목깃을 두르고 신부복을 입는 녀석이다. 특이한 옷차림이니 걸릴 수밖에 없다.

 

  이것 말고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손 떼라는 누나의 말― 혹여나 마을에 숨었다면? 한석이만큼 우리 마을에서 잘난 녀석이 없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충분히 숨겨주시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당장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석이 마을에 있어?」

 

  내 힘 빠진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나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말했지, 좋은 거 없다고. 그놈 속 시커먼 거, 고등학생 되고부터 나만 보면 샐샐 웃길래 알아봤지.」

 

  욱하는 것과 함께 내 언성이 높아졌다.

 

  「그건 모르겠고, 마을에 있냐고.」

 

  누나는 평소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모른다고 말했다. 누나의 말 중간중간 거친 숨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마을에 있었으면 내가 바로 알았겠지. 나 바쁘니까 끊는다.」

 

  「무당이 뭐가 바빠, 술만 퍼마시면서. 그리고 그 소리는 뭐야?」

 

  누나는 피식 웃고 허 씨 할아버지 댁 송아지라고 대답했다. 축사에서 도망쳤는데, 우리 집으로 와버려 놀아주고 있다나.

 

  김새는 대화를 뒤로하고 통화를 끊었다. 정말 내가 손을 떼야 하나. 이리 보면 누나의 말이 들어맞을 때도 꽤 됐던 것 같다. 술김에 벌이는 짓거리들 때문이 아니라, 누나의 상황을 보는 통찰력 때문이다. 내가 알던 한석이를 놓아줄 때가 왔을지도 모른다.

 

  그때 취조실에서 나온 동기가 내게 다가와서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야, 점심 먹고 오자. 힘 좀 내고. 살다 보면 별일 다 있는 거 아니겠냐.」

 

  동기와 같이 사무실을 나서기 직전, 2차 취조는 내가 진행하라는 반장님의 지시가 있었다. 일단 대답은 했지만, 내심 더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라니 하는 거지. 그리 생각하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바깥으로 옮겼다.

 

* * *

 

  「같은 이야기만 계속 반복하고 있는데, 끝내면 안 될까요?」

 

  다친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여대생은 얼굴을 찌푸린 채 반대쪽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절차상 어쩔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는 했지만, 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끝내도 될 것 같은데.

 

  취조실에서 의욕이 넘치는 건 갓 발령받은 후임, 서 경위뿐이었다. 나와 여대생이 앞서 했던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동안, 그녀는 진술서와 다른 서류들을 꼼꼼히 비교하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에 끼고 있는 묵주반지가 눈에 들어왔지만,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신자로서 신부가 그랬다는 걸 믿기 힘드니 이러는 걸까.

 

  몇 분 후, 후임의 시선이 아래로 떨궈졌다. 나도 미심쩍은 부분이야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황이나 영상 증거 등은 모든 게 진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모순이나 허점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 정도로 마쳐도 되겠지.

 

  「그럼, 여기까지―」

 

  별안간 여대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죄송해요, 라고 양해를 구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취조 때보다 높은 톤으로 예와 맞아요를 반복하고 있었다.

 

  「선배, 잠깐만요. 저 방금 뭔가 들은 것 같은데.」

 

  이윽고 후임은 여대생에게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무슨 미친 짓이냐고 제지할 틈도 없이, 후임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여대생을 바라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저희는 수사에 협조하시라고 여기에 모신 거지―」

 

  「야, 너 미쳤어? 그만해!」

 

  내가 여대생에게 사과하고, 다른 부서원 몇이 들어와 후임을 제지하려 할 때 그녀가 책상을 파일로 세게 내리쳤다.

 

  「제가 3천만 원이라는 말을 방금 들었어요, 정말요!」

 

  「서 경위, 자네 경찰대에서 그런 식으로 배웠어? 피해자 존중 몰라?」

 

  모두가 후임을 몰아세우는 아수라장 속에서, 여대생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양손을 떨고 있었다. 무언가 있다. 직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때마침 휴대전화의 자그마한 전화용 스피커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 괜찮으신가요?」

 

  모두가 그 목소리에 정신이 쏠렸다. 이 틈을 타, 후임은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상대방에게 말을 건넸다.

 

  「Y시 경찰서의 서하나 경위입니다. 현재 피해자 취조가 진행되는 중이었는데, 괜찮으시다면 통화 내용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증빙서류가 필요하시다면 차후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시선을 휴대전화 화면으로 돌렸다. J은행 상담센터였다. 상담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까 여대생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예, 방금 전상욱 고객님으로부터 안혜림 고객님께 3천만 원을 입금하셔서, 예정된 입금이 맞는지 확인하려 전화했습니다. 아파트관리비나 전세 등도 아니고, 같은 금액이 오간 적도 없는 단순 현금 입금이라서요.」

 

  통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후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계좌번호를 메모한 뒤, 파일 안쪽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다. 반면 여대생의 표정은 말 그대로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는 양손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거봐요, 제가 잘 들었다니까. 일단 대포인지 아닌지 보고 올게요!」

 

  총총걸음으로 나간 후임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강력반 조 반장님이 앉으셨다. 취조실의 하얀 전등 빛이 반장님의 넓은 이마를 비추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세요.」

 

  별안간 여대생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끅끅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제로, 그것도 취조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진짜 증언이 시작됐다.

 

  「아니, 내가 자해 좀 하고 윽박지른 뒤에 신고하면 3천만 원을 준다잖아요. 누가 거절할 수 있어요? 꼰대처럼 원리원칙밖에 모르는 신부 하나 보내버릴 수 있는데, 누가 안 하겠어요? 안 그래도 우리 청년회 분위기 싹 다 조져놨는데.」

 

  모두가 웃는 눈매 안의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 반장님께서는 고개를 몇 번 내저으시더니 여대생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셨다. 한석이가 무죄라는 기쁨도 잠시, 나는 이 사건의 깊은 내막을 알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석이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몰라요. 성당 뒤뜰은 카메라 없으니까 그냥 거기로 가라고 하래요. 누가 시켰는지도 몰라요, 익명 SNS로만 주고받아서…」

 

  여대생을 유치장에 넣은 이후, 우리는 모여서 사건 경과를 다시금 정리했다. 예상대로 통장은 대포통장이었다. 익명 SNS는 해외 직영이라 협조 절차가 매우 복잡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마우스를 딸깍거리던 박 경위가 입을 열었다.

 

  「다들 와서 이것 좀 보세요.」

 

* * *

 

  박 경위는 성당 뒤뜰 전후의 화면을 각각 띄워놓고, 한석이가 뛰어가기 전후의 시간대에 맞춘 뒤 하나씩 재생했다.

 

  「보세요, 이 봉고차. 신부가 뛰어가기 3분 전에 들어와서는 뛰어간 뒤 30초쯤 지나자 쓱 나가잖아요.」

 

  누가 계획했는지 알아낼 수는 없었어도, 한석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가까운 시간대의 같은 차종을 추려내고, 번호판이 잘 찍힌 지점과 대조한 뒤 차량을 특정해서 추적했다. 우리는 B광역시를 관통하는 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소에서 한석이가 다른 차량으로 갈아타는 것까지 알아냈다. 오직 한석이만 봉고차에서 내려, 파란 1톤 트럭에 탔다.

 

  「차량번호 조회했어요! K군 O면… 와, 완전 산골에 등록되어 있는데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서 경위는 흘긋 나를 보더니 다시 한번 자신이 알아낸 내용을 말했다.

 

  「W도 K군 O면이에요. 강 선배, 혹시 아세요?」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 고향, 며칠 전에 다녀온 그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알아. 차량 소유주는?」

 

  서 경위는 서류를 눈으로 훑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허성주 씨로 되어있어요― 선배, 강 선배!」

 

  허 씨 할아버지가 이랬을 리는 없으니, 범인은 단 한 사람이다. 나는 당장 내 차에 올라타서 액셀을 밟았다. 모든 증거가, 특히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내 기억이 확증하고 있었다. 지금 일가친척이라고는 수도원의 삼촌 하나뿐인 한석이를 매우 잘 아는 사람. 한석이의 대단함을 눈여겨보는 한편, 자신과는 영 딴판이라 껄끄러워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한석이가 마을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넌지시 말했던 사람. 언제까지고 제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울먹였던 사람. 차창 밖은 도시에서 논밭으로, 논밭에서 산등성이로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머릿속도 그만큼 빠르게 뒤섞여갔다. 왜? 나보고는 멀리하라면서 도대체 왜?

 

  「지가 뭐라고, 술주정뱅이 주제에 지가 뭐라고!」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오르막길에 들어서자, 악에 받쳐 소리 지르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싹싹 빈다 해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엄마 덕분에 무당짓 하면서 벌어먹는 주제에, 뭐 얼마나 잘났다고―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대문을 발로 차 열어 들어갔다.

 

  「야, 강대영! 나와! 한석이 어쨌어!」

 

  내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봤지만, 한석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

 

  크고 둔한 통증이 뒤통수를 울리자 앞으로 고꾸라졌다. 뜨뜻미지근해지는 뒤통수를 두 손으로 덮은 채, 몸을 겨우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팍 소리와 함께 누나의 손에 들려있던 큰 돌이 마당에 떨어졌다.

 

  「야… 너…」

 

  「한석이는 이 마을에서, 앞으로 행복하게 지낼 거야.」

 

  내가 누나의 발목을 겨우 움켜잡자, 누나는 다른 쪽 발로 내 팔을 걷어찼다. 나는 몇 번 굴러 담벼락에 등을 부딪쳤다.

 

  「내가 말했잖아. 손 떼라고. 너 조심하라고 한 말인 줄 알았니?」

 

  이윽고 누나의 오른발이 내 목 위에 얹혔다.

 

  「건들면 죽이겠다는 뜻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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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가를 피울 줄 모르던 시절에 얀챈에 올렸던 소설

신선하다는 평가만 들어서 시무룩했던 적이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