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살림집에서 짐을 수레에다 실은 뒤에 그것을 끌고 지정된 임시살림집으로 어마이와 함께 이동중이었습네다. 가는 길에 농장원 3명이 보였는데, 저와 어마이를 보고서는 급히 달려왔습네다. 그사람들은 이리 말했디요.

"거 동무가 리광득 동지의 아들 맞네?"

저는 당연히 아바이 이름을 듣고는 아바이가 맞으니 고개는 끄덕였는데, 그러던 순간 그사람들의 표정이 싹- 하고 바뀌더니만 주먹을 저와 제 어마이에게 휘둘렀디요. 중요한 짐들은 수레에서 빼내어 챙길수 있었습네다만, 그사이에 얻어 맞는건 피할수 없었습네다. 거기에 다른 잡다한 물품들은 싹다 도적맞고, 그 농장원들은 산적도적들처럼 수레를 끌고 급히... 그나저나 너무 아픕네다. 혹시 치료할거 있으십네ㄲ-"

"잠깐! 그거, 그거 챙겼네?"

리광득은 아들에게 급히 물어보았다. 없어서는 안되는 '그것'을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사진, 그리고 사진 담긴 액자는 챙겼나우?"

"그기야 당연하디요. 임시 살림집 천정에 걸어두었습네다. 근데 아바이!"

리광득은 상처를 어루만져달라는 아들의 간곡한 요구도 무시하고, 헐레벌떡 천막 안으로 들어가 액자와 그 안의 내용을 어루만졌다. 물론 그가 어루만진것은 큰 사진이 아니었다. 큰 사진 뒤에 들어있는 작은 사진들이었다. 

리조의 세종, 일제의 덴노, 미제의 와싱톤. 이 세명이 그려져 있는 형형색색의 사진들이었다. 어린시절, 돈이라고는 표면이 거친 휴지밖에 보지 못한 그에게 진정한 '화폐'로써의 돈이 무엇인지 알려준 사진들이었다.

살림살이가 다 털린 상황이었지만, 리광득은 이 종이를 보며,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그랬듯 안심했다. 이것과 현재의 직분만 유지한다면 그래도 예전의 생활로 충분히 복귀할수 있으리라, 리광득은 생각했다.

사진들과의 잠깐의 상봉을 한 뒤에 리광득은 다시 밖으로 나와 임시 천막 천장에 사진들을 액자에 담아 다시 넣고, 자고있는 리수정을 놔둔채 천막 밖 임시주방으로 다시 나와, 잔뜩 토라진 아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낯선 식탁-아니, 제대로된 식탁이라 부를것도 없었다-이었다. 농장원들이 수레에 담긴 것들을 싹다 털어가버리는 바람에, 거의 리광복의 인생에서 거의 최초로, 배급으로 내려온 것으로만 밥을 먹는 날이었으니 말이다. 무짠지와 잡곡:쌀:이물질이 1:1:1인 밥, 이게 다였다. 입이 대발 나온 리광복에게, 리광득은 이것도 못먹는 사람들이 이나라에 수두룩 하다며, 당장 근처 10킬로메다 밖에만 가도 드물긴 하지만 아사자가 보인다고 훈계조로 이야기 했다. 그 광경을 집에만 있느라 거의 보지 못한 리광복에게는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아무튼 알아들은 척 하며 침묵속에서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침묵은 밥을 다 먹은 뒤에도 계속되어서 올빼미가 울고, 이불들을 펴고, 모두잠을 잘때까지 계속되었다. 모두들 너무나도 지쳐있었기에 잠은 금방 찾아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리광복은 중간에 깨고 말았다.

야심한 새볔에, 리광복은 얻어맞은 부위의 얼얼한 통증 때문에 깨고 말았다. 다시 잠을 청하려 해보았지만 얼얼함이 사라지지 않아, 이것을 씻어내기 위해 근처의 냇물가로 걸어갔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얼얼함을 달래주진 않았다. 

냇물가에 도착한 광복은 차가운 냇물을 얻어맞은 부위인 팔 부위에 발랐다. 냇물을 피부에 묻어나서 열을 흡수하여, 얼얼함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광복이 임시살림집으로 돌아가 잠을 다시 청하려던 찰나, 광복의 패인 눈에 달빛을 받아 투명색과 은색 사이의 색을 띄는 빛이 반사되어 들어왔다. 그것을 다시 자세히 보니 은색의 봉지? 보따리? 였다. 그 보따리가 그에게는 정말 은으로 보였는지, 아니면 그의 뱃속에 전부터 먹었던 싱싱한 나물과 흰쌀밥을 밀어내고 새로 입주한 무짠지와 1:1:1 밥이 뇌를 자극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그 은덩어리를 향해 몸을 던져 그것을 집어올렸다. 은색 껍질을 벗겨내니 여러 맛의 내용물들이 흘러나왔다. 달콤쌉쌀하며 짭짜롬하고, 또 담백하면서 화려한 맛, 자연이 아닌 현대 화학의 새로운 맛, 그리고 제일 맛있었던 사진의 맛.

사진, 그래, 아까 그의 아버지가 리광복 자신 대신에 쓰다듬은 사진들이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것은 초록색 사진에서 보이는 리조의 한 왕의 인자한 미소. 광복은 이런 미소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잠깐 멍을 때리다 정신을 차린 광복은, 마저 다른것들을 먹어치우고 사진들을 챙기다가 마지막으로 쓸모없어 보이는 편지 하나, 담백한 맛의 편지 하나를 발견해 읽어보았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들어있는 식품은 먹어도 안전하니 드셔도 좋습니다. 의심스러우면 가축에게 먼저 주고 드십시오. 유효기간이 지난것은 먹지 마십시오.'

그다지 길지도 않고 담백하기만한 이 편지를 다 읽은 순간, 그는 무언가에 부딫혔다. 아니,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