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나고 우리를 반겨주는 건 개선의 노래도, 사람들의 환송도 아니었다. 방사능에 덮인 대지, 붕괴된 사회. 대도시에 몰린 사람들은 생존에만 몰두했고 그 결과 이전 세계의 관념은 말끔히 사라졌다. 전선에서 방아쇠를 당긴 우리는 순식간에 구 시대의 유물이자 세상을 망쳐버린 파괴자로 몰려, 군복을 벗어야 했다. 영광도 명예도 찾을 수 없는 아스팔트의 숲에서 우리는 과거를 잃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지키려던 자들에게 버림받은 우리의 처지를 다른 누가 누가 공감해줄 수 있을까? 어깨를 맞댄 전우만이 서로를 지탱하며.


“그래도 살아야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구 시대의 병사로는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일지라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물론 모두가 생을 이어나가거나 하지는 못했다. 추악한 새 시대와 무의미해진 시간이 안겨준 박탈감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어, 단신으로 적지에 잠입한 병사는 대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압박붕대를 감던 의무관은 약에 취해 수면 아래의 달로 향했다. 


 자신이 스스로의 목숨을 거두어갔는가? 그것도 아니다. 원한을 가진 이들에게 린치를 당해 쓰러진 동지가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한 도박 속에서 그 목숨을 대가로 치른 이도 있었다. 몇몇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몇몇은 내가 보는 눈 앞에서. 그렇게 교외의 흙 속에 파묻히는 이들이 늘어나고, 그에 겹쳐 내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줄어만 갔다.


“썰렁하네.”


 폐수가 흐르는 하수도. 달이 가장 크게 들어찼을 때 모이자고 약속했던 장소에는 단지 둘만이 남아있었다. 나와 하갈, 근근이 먹고 살아가는 비루한 퇴역병. 하갈은 힙 플라스크를 연신 들이킨다.


“...몸 상해.”


“마시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고.”


 그런 대꾸에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즐거운 이야기가 있을 리 없다. 하다못해 서로를 위로해줄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위로의 말도 뱉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암담하다. 친구도 없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비전도 없다. 비쩍마른 쥐새끼들의 울음만이 빈 공간을 채우는 때. 

“너는 뭘 하고 싶었어.”


 문득 하갈이 입을 열었다.


“...그냥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어. 언니네 집에 얹혀 살면서 뭐, 그렇게.”


“나는 모은 돈으로 가게를 열고 싶었어. 사라 기억해? 걔랑 같이 빵집이나 열어서 갓 구워낸 파이나 먹을 생각이었는데… 군장을 챙겨 전선에서 발을 돌릴 때만 해도 이런 시궁창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지, 응.”


“다들 몰랐겠지. 세상이 이렇게 쉽게 망가지고, 또 아무런 대접도 못 받을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그래서 죽은 거라고, 난 그렇게 생각해. 질리니까, 못 버티니까.”


 슬슬 이야기가 나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하갈의 표현은 퍽 직설적이었다. 단지 표현만이 아니라 힙 플라스크를 두 손으로 으스러트릴 정도로 꽉 쥐며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작도, 기멜도, 베스도. ...개새끼들, 성공할 거라고 개지랄은 다 했으면서.”


 동료를 향해 쏟아내는 원망. 하지만 그런 욕지거리를 내뱉는 하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 마셔.”

“말했잖아, 마시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고.”


“그래도, 그래도말야…”


 그렇게 하갈을 말리는 나도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북받쳐오르는 감정이 목을 틀어 막아, 나는 단지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얼마간 마음을 다잡건 진정시키지 못한 채로. 그래도 끝끝내 말을 내뱉지 못한 채로 있을 수는 없어, 겨우 입을 연다. 문장을 만들어 전한다. 


“...술이나 한 잔 줘.”


 나 또한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지랄맞네, 우리 둘 다.”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하갈은 순순히 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씩 가까워질 때마다 기척은 선명해져, 어느새 하갈은 내 앞에 서서 자신의 힙 플라스크를 건네주었다. 나는 하갈이 건넨 술을 비웠다. 오랫만에 느끼는 알코올의 흥취, 그와 함께 격해져 진정되지 않는 마음. 


 서로의 과거를 긍정해주는 이는 없다. 우리 둘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 상대를 갈망하는 마음은 순식간에 애착으로 변하여.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일선을 넘는다.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어.”


“알아, 알고 있어.”


 깨질듯한 두통과 함께 나를 반기는 것은 익숙한 내 방의 천장이었다. 달아오른 몸에는 어젯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하갈은 곁에서 옅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잘 있어, 다음에 봐.”


 대충 아침을 해치우고,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작별 인사를 건넨다. 하갈은 외로이 자신의 쉼터로 향해, 나도 이곳에서 홀로 남겠지. 그 날이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만나는 날이 오지 않는 이상. 


 문득 달려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루만의 기우가 아닌 확실한 감정으로 삼아 하갈을 품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기에. 하지만 피어오르는 자그마한 불안이 내 발목을 붙잡고, 귀에 속삭였다. 다음을 기약하자고, 그 순간에야 모든 걸 토해내자고.


 그렇게 나는 하갈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용기가 없음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며,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 

 

 이후로 내가 하갈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보름달이 별을 가리는 날, 큰 맘을 먹고 챙겨 온 위스키로 목을 축였지만 동이 틀 때까지 하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달이 떠올랐을 때도, 그 다음으로 달이 떠올랐을 때도.


 어째서 하갈은 내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혹시 다른 전우들처럼 숨이 끊어진 것일까. 불안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나는 애써 그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으려했다. 내 과거를 긍정해주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내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올라, 다시 또 하수도로 발걸음을 옮기게했다. 오늘도 텅 비어 빈 공간이지만 나는 힙 플라스크를 비우며 하갈을 기다렸다.


 다시 만난다면 꼭 안아주자고, 끝없이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