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언니는 곧잘 내 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나는 이 작은 여왕님께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군것질거리를 파는 분식점부터 해서 집 사이의 틈새, 그리고 매캐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골목길까지.

 당연한 말이겠지만, 부모님은 어린 딸이 그런 길로 나다니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되도록이면 큰 길로, 되도록이면 밝은 곳으로, 해가 저문 밤이라면 얌전히 집으로.

“엄마나 아빠한테는 말하면 안 돼…?”

 그래서일까, 해가 저물 무렵이면 언니는 자연스럽게 비밀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나는 언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남아…

 지금에 이른다. 언니와 두 손을 맞잡고 골목을 누비던 날은 두 손으로 셀 수 없는 머나먼 나날. 언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나는 부모님의 말은 이따금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건방진 학생이 되었고, 내 손을 잡아끌던 언니는 이젠 나만 보면 미간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나를 이끌어주던 작은 손같은 건 이제 바랄 수도 없었다.

 변치 않고 남는 건 언니가 내게 건네는 말, 그리고 두 사람만의 비밀.

 부모님 두 분이 기념일을 맞아 집을 비운 드문 날, 대문을 연 내게 도무지 두 눈으로 보기 낯뜨거운 애정행각이 들이밀어졌다. 나도 얼굴을 몇 번 보았던 선배, 그녀를 상대로 열렬히 키스를 나누는 언니와 눈이 마주치고… 나는 황급히 문을 닫고 바깥으로 향했다. 담벼락에 몸을 기대, 겨우 숨을 뱉어내지만 순간적으로 새겨진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 눈,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두 사람. 벅차오르는 가슴을 종잡을 수 없어 몸은 떨기만 한다. 손을 겨우 움직여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한참 뒤의 일.

 그리고 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돌아온 아침. 대문을 열고 걸어 들어간 거실에 언니가 혼자 있었다.

“미안해, 괜한 고생을 시켜서.”

 쉬이 흘러나오는 사과의 말.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어.”

 나는 거기에 대해 태연하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집에 들어오고서부터 어젯밤의 잔재를 강하게 느낀다. 뇌리에 강하게 박힌 기억은 고작 하루만에 사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 기억을 어떻게든 지우려 할수록 쉽게 믿을 수 없는, 하지만 이제와 무를 수도 없는 그런 현실을 상상해버린다.

 두 사람이 단순히 키스로만 끝냈을 리는, 없다고.

“것보다 말야… 그나마 나였어서 다행이지, 부모님이었으면 말 안 해도 알잖아.”

 갈 곳을 잃은 두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언젠가 이야기를 꺼내야한다고 생각은 했어.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켜버리니까… 어떻게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네.”

 그리고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그 끝에서 언니는 도망쳤다.

“...부모님에게는 되도록 말하지 말아줘.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알아서 해볼테니까.”

 어릴 때와 같이 나 혼자서 입을 닫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숨긴다 하더라도, 이미 채워진 뇌관은 터지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고마워.”

 고작 이 한 마디를 위해서 였을까. 결론내지 못하는 사이로 수많은 생각과 밤이 깊어간다. 그 날,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어린 날의 꿈. 꿈 속의 언니는 지금과 달리 자그마한 채로 내게 손을 뻗었다. 나를 데리고 이곳 저곳을 향하던 추억과 변치 않는 모습으로, 둘만의 비밀을 쌓아나갔다.

“좋은 아침.”

 눈을 떠 바라본 지금도… 지난 시간과 같을까. 나는 다시 꿈을 꾸어도 괜찮은걸까.

“...좋은 아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색한 하루가 지나간다. 이틀로 쌓인다. 그리고 시침과 분침이 겹치기를 여러번,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넷이 테이블에 모여 밤을 먹는 때, 나는 이따금 언니를 훔쳐보았다. 음식을 옮겨담는 저 입은 언제쯤에야 비밀을 까발릴까. 조용히 있는 부모님은 과연 역정을 내실까. 적어도 오늘의 식사는 아무런 일도 없이 끝났다. …호스를 타고 물이 흘러, 잔반이 씻겨내려갈 뿐. 자매의 비밀은 여전히 가슴 속에 엉겨붙은 채로 있었다.

 어느 날의 점심. 태양이 구름에 가려 흐린 날. 흘깃 바라본 창문 너머에서 언니와 선배, 두 사람이 웃고 있었다. 우정이라는 가면 아래에 숨겨진 둘의 관계. 이 교정에서 그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일까.

“사이 좋아 보였어.”

 언니의 방에서, 이렇게 대꾸하는 가슴은 내심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내가 얘기할 만한 사람은 정해져있잖아.”

“음… 아, 걔 얘기구나. 좋아보일 수 밖에 없지.”

 나는 이토록 쉽게 말하는 사람이 싫었다.

“너무 붙어있으면 오해를 살지도 몰라.”

“오히려 갑자기 떨어져서 지내는 게 어색하게 보일 걸? 평소처럼 있는 편이 낫지.”

“그러면 내가 굳이 입을 닫을 필요도 없겠네.”

“농담도.”

 언니는 엷게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나는 실없는 소리를 한 게 아니다. 언니처럼 쉽게 넘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당장이라도 모든 걸 까발려버릴 충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게 무거운 짐을 넘겨버린 주제에 홀로 편하게 있는 사람은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머리는 내 입으로 모든 걸 밝히기를 요구한다.

“넌 약속 지켜줄 거잖아. 안 그래?”


 저 가증스러운 사람에게 파멸을 안겨주리라.

“노력할게.”


 하지만 나는 끝내 저 사람을, 언니를 미워할 수 없었다. 방을 나와 향한 거실. 부모님이 나를 맞이해주었지만, 나는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칠 뿐이다. 언니와의 비밀은 여전히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채로. 토해내지 못한 감정에 떨리는 가슴을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 하는 채로.

 그 날 이후로 언니를 마주보기 거북해서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두 눈은 사람을 쫓지 않는다. 두 다리는 발을 맞추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마주치더라도 별일 아닌 것처럼 스쳐지나가기를 여러번.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감정이 서서히 깎여나간다. 괴로웠던 가슴은 평온을 되찾는다. 지켜야하는 약속이나 비밀은 어릴 적 추억과 겹쳐 희미해져 갔으니.

“...선배, 그건 괜한 걱정이에요.”

 그런 나날 사이에서 바라보는 건 석양이 붉게 무르익은 하굣길, 인적이 드문 골목. 집으로 향하는 날 불러세운 선배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배어있었다.

“네 말대로 헛수고에 지난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미안해.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아.”

“제가 그걸로 꼬투리를 잡을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진작부터 선배한테 다가갔을 거에요. 그 꼴을 보고도 몇 주동안 조용히 있던 저한테 갑자기 그러시면 아무래도 좀… 게다가 제겐 가족이 걸린 일인데 그걸로 협박할 리가 없잖아요.”

“네가 그 아이의 가족일지 몰라도 내게는 그저 외부인이야.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어.”

 이 사람의 말이 맞다. 당사자의 입장은 분명 다르겠지. 하지만 나는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약속했어요, 언니랑. 언니가 직접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저도 입 닫고 있겠다고. 그런 약속을 안 했더라도 제가 스스로 입 밖에 꺼낼 일은 없겠지만서도…”

“...그 약속을 믿을게. 고마워, 그렇게라도 말해줘서.”


 조금 펴진 인상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이런 대화는 상대가 납득하지 않고서는 챗바퀴 돌듯 같은 말을 반복하기 마련이니까.

“그럼… 이만 가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

 이로써 논쟁은 끝이다.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하기만을 기다리는 때.

“약속 지켜줘. 우리 셋의 비밀이야.”


 해맑게 비밀을 입에 담는 사람을 보며, 어떻게든 따지려는 내가 있었다. 당신이, 당신이 나와 언니의 사이에 끼어들 자격이 있냐고.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부터 나와 언니, 두 사람만의 비밀이 아니었을뿐더러 당사자들에게 나는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을테니까. 오히려 외부인인 나를 포함시켜준 그 넓은 아량에 고맙다고 해야할까? 나아갈 곳을 알지 못하는 말들은 입 밖을 벗어날 수 없어서, 나는 그들을 씹어 삼켰다.

 그 비밀스러운 현장을 목격한 이후로 우리 자매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하기라도 했었나? 끊임없이 되짚는 추억처럼, 언니가 내 손을 잡고 이끌어주기라도 했는가. 그럼에도 나는 약속을 둘만의 것으로 여기며 소중히 했다. 나는 처음부터… 무엇을 착각한걸까.

 아니,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괴로워하는 나를 두고 행복해보이는 언니가, 두 사람이 싫었다. 그 한편으로 오직 나만이 언니의 또다른 모습을 알기를 바랬다.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도와주고, 밤이 찾아오면 꿈을 꾸는 그 마음은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나는 언니를 사랑한다.

“걔가 뭐 다른 말은 안 했지?”

“별 거 아니었어. 그냥… 그냥 비밀로 해달라고.”

“흠, 그래.”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만… 언니한테 대놓고 물어보면 대답해줘. 나는 비밀 지킬 거라고.”


 다른 누구보다도, 이미 사랑을 나누고 있는 선배라는 여자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알고 있어. 넌 전부터 그랬으니까.”


 차라리 깨닫지 못하는 편이 나았을텐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연심을 자각한 지금은 언니의 믿음이 얄궂게만 느껴진다.

“그렇게까지 말할 것도 없는데 말야.”

 정말로. 이 빌어먹을 여동생은 신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강렬한 감정을 원한다. 바짝 마르는 입술, 타오르는 목, 그리고 그렇게 메마를 수록 기억이 또렷해진다. 지금과는 다른 언니의 모습, 지난 날부터 변하지 못하는 나.

“집에 가자.”

 추하고 역겨워서 도무지 견딜 수 없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저 멀리 행복한 사람들의 곁에 있는 나는 항상 그대로였기에. 그릇된 마음을 품은 채, 과거를 꿈꾸며, 추억을 노리개거리로 삼아 자위하는… 그대로.


 그 사이에서 올려다 본 하늘에는 어두운 밤에 유일하게 빛을 내는 달이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내 떠오르는 동에 제 얼굴을 감춘다.

“해봐야 저는 선배한테 방해밖에 안 될 거 같은데요.”

“말고는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거 알잖아. 우리는… 뭐 그러니까.”

 몇 번이고.

“걔가 먼저 네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 얘기를 꺼내면 싫은 티를 냈는데.”

“싫어할 만한 상황이었잖아. 이제는 날 꺼림칙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몇 번이고.

“좋은 일이지. 사랑하는 가족이 괜히 욕먹는 건… 싫잖아.”

 몇 번 씩이고.

“무슨 생각해?”

“...네? 아, 언니는 언제쯤 오나 싶어서요.”

 그렇게 찾아온 오늘도 그와 같은 하루였다.

“방금 전에 환승했다고 했으니까… 금방 올 거 같은데? 한 10분쯤 걸릴려나.”

 연인의 데이트, 그 사이에 낀 나. 비단 오늘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치는 않다. 쉬이 적응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편 아닐까.

“왜, 언니가 보고싶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좀. 선배도 저보다는 언니랑, 여친이랑 있는 편이 좋잖아요.”

“그거야 뭐… 그렇지.”

 내 앞의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언니는.”

“응?”

 왜 당신을 사랑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언니는 그렇게 좋은 여친은 아닌가 보네요. 하필 데이트날 다른 약속을 잡아놔서, 중간에 상대를 바람맞히고 그러는 거 보면.”

“언니한테 그렇게 말해도 되겠어?”

“자매니까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자매이기에 할 수 없는 말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렇게 편하게 얘기하는 것만큼은 부럽네.”

“선배야 아무래도… 저처럼 말하기는 힘드시겠죠.

“그래서 아쉽지. 아쉽지만… 뭐, 사람마다 주어진 역할이라는 게 있잖아. 그에 맞춰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거라 생각해.”

그는, 그는 정말로 듣기 거북한 소리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오후. 언니는 결국 30분 후에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데이트가 끝나 집에 돌아온 부모님의 퇴근이 늦을 것 같은 저녁. 아니, 어쩌면 내일 아침에 돌아오실지도 모르는 밤.

“뭐 보고 있어, 언니?”

“응? 아… 전에 엄마가 재밌다고 했던 드라마있잖아. 지금 TV에서 하는 거 같아서.”

 어느 쪽이건 해가 뜨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시간.

“재밌어?”

“아니, 내용을 모르니까. 이해를 할래야 할 수가 없지.”

 거기에 언니는 연속극이 다 그렇다는 말을 덧붙이고,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옆에 앉았다.

“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언니는 어쩌고?”

“그냥 호기심에 보던 거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럼… 전에 넷플릭스에서 보다 말은 영화있는데, 그거라도 괜찮으면.”

 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에 맞춰 리모컨을 눌렀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은 느와르,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거친 사회의 이야기. 자신의 야망을 위해 조직을 배신한 주인공은 결국 정점에 오르지만 업보를 이기지 못한 채, 자신도 쓰러졌다.

“배신감이라… 하기사 가까운 사람이 다른 속내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오싹하네.”

연신 몸을 떨던 언니는 그런 감상을 내뱉었다.

“부모님한테 아직도 숨겨두고 있는 언니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럴 때 자기는 쏙 빼놓고 말하잖아, 다들.”

 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 헛웃음을 쳤다.

“그래도 나는 너한테만큼은 숨기지 않아. 아니, 오히려 네가 내 비밀을 지켜주잖아.”

“어렸을 때부터 그랬으니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새삼스럽게 말하지만 고마워."

“어울리지도 않게.”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말해보겠어, 안 그래?”

 그리고 둘은 한바탕 웃는다. 시간은 어느새 늦은 밤. 서로의 방으로 돌아가 잠에 들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나리라.

“이런 때 아니면 못 할 말… 그렇네. 평소에는 그런 이야기하기 힘들지.”

 분명 그럴테지만.

“있잖아, 언니.”

“말해 봐.”

“나한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면… 언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편히 잠들지 못한다.

“글쎄… 네가 나보다 더한 잘못을 할 거 같지는 않은데.”


“만약의 이야기니까. 거기에 비밀이라는 게 꼭 나쁜 짓을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좋은 일이건 뭐가 어떻게 되었건 사정이 있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이 생겼어. 하지만 그걸 언니한테만 이야기해주는 거야.”

 이 말에 깔린 의도를 눈치챈걸까. 아니면… 단순히 동생을 걱정해서일까. 언니는 내 말을 생각보다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시간은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흐른다. 두 사람의 옅은 호흡 소리만이 들리는, 달빛이 세상을 비추는 동이 트지 않은 밤.

“나는 네 하나뿐인 언니니까… 거기에 네가 나한테만 알려준다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 네가 나한테 해준 것처럼, 나도 똑같이 비밀을 지켜줄거야.”

“그렇게 생각해주는 구나. 고마워.”

 이토록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다. 그 따스한 긍정에 가슴은 한없이 들뜬다. …선배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고… 방금 그렇게 말했었지. 그 약속, 지켜줄 수 있어?”

 상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언니. 하지만 다음에 내가 뱉어낼 말이란…이토록 나를 아껴주는 사람을 배신하는 짐승같은 욕망의 구체화. 하지만 이건… 이 고백만큼은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은 유일한 것이었다. 내게 남은 최초이자 유일한 기회. 나는 나아가고 싶다. 벼랑의 끝자락에서 한 발자국을 내밀고 싶다. 비록 그 배신에 따른 업보를 짊어진다 하더라도.

“언니.”

 두 눈은 언니를 똑바로 응시한 채로.

“나는 언니를 사랑해.”

 그 가슴에 비밀을 새겨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