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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때로는 타오르는 불씨 하나가 수십 명의 죽은 목숨보다도, 생명보다도 선명할 수도 있는 거라고 여자는 세월이 지난 후에 자주 떠올리곤 했다.

 그날 밤이 그랬다. 대장장이를 실제로 처음으로 봤던 밤. 빨갛게 달아오른 쇠집게, 불과 쇠의 냄새. 어둑해진 해질녘에 산길을 도망쳐 숨어들어온 공방은 새빨간 열기로 가득한 불의 세계였다.


 문을 닫고 들어온 여자는 망치를 쥐고 서 있는 남자를 보고서 숨을 헐떡였다. 새까만 눈동자. 두려웠지만 그대로 작업대 뒤편으로 뛰어들어가 야윈 몸을 숨겼다. 아마포가 바닥에 색색이 늘어졌다. 여러곳이 헤졌어도 화려한 드레스는 장인의 공방엔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르기 전에 벌컥 문이 열리자 여자는 몸을 웅크린 채 치맛단을 들고 숨을 헐떡였다. 뒤쫓아 온 채무자들, 밤의 기억들. 여자는 더듬어 물건을 손에 쥔 후에 두 눈을 감았다.


 잠시 후에 바깥에서 문이 닫히고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가 들려왔다. 남자 목소리의 낮은 울림. 여자는 몸을 떨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자신의 생명 때문이었다. 아직도 무섭다니,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침내 발소리가 들려오자 여자는 양손을 치켜들었다. 고통스러운 열기. 그러나 들려온 건 대장장이 남자의 목소리뿐이었다.


 모두 떠났소. 남자가 말했다.


 ……그럴리가.


 침입자는 없다고 말하니 돌아가더군. 못 믿겠다면 마음대로 생각해, 위협은 없소.

 남자는 그대로 돌아서려다 말했다. 그건 내려놓으시오. 사람을 죽이기 위한 물건이 아니니.


 여자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들고 있던 쇠집게를 내려놓았다. 새빨간 부분을 자신의 목에 가까이 대고 있었던 것이다.


 …날 어쩔 셈이지?


 남자는 여자의 질문을 듣고서도 몇 차례 망치를 더 휘두른 후에야 말했다.

 몸을 숨기려면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는게 좋을거요. 당신을 쫓아온 남자들은 실제론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니까, 마을 쪽에 내려가는 건 위험해.


 마구잡이로 끊어지는 말투였다. 여자는 마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눠보지 않은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말을 끝낸 남자는 제멋대로 작업을 계속했다. 여자에게 무방비하게 등까지 돌린 채로 달군 쇠를 물 속에 집어넣자 안개가 피어올랐다. 여자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혼자 쇳덩이라도 짊어지고 있는 등이었다. 그러나 신뢰하기 힘든, 남자의 등이었다.


 ㅡ그렇지만 추적자는 돌아갔다. 여자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한 번 더 몸을 웅크렸다.

 하나도 말이 안된다고,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날 밤 죽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그 후로 아흐레를 공방 구석에서 지냈다. 구석에 짚과 노끈으로 만들어진 간이 잠자리가 있었다. 창관에서처럼 햇볕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자리였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밤중에도 자주 어둠 속에서 빛과 열기가 튀어올랐다. 남자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여자가 누워있는 장소까지 크게 울려댔지만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여자는 큰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데에는 질릴 정도로 익숙했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자신이 범해지지 않는 것이 의문이었다. 그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방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범해지지 않을 거란 기대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는 남자에게 직접 물어봤다. 궁금증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 성불구자구나.

 …….


 들어올렸던 망치가 잠시 멈췄다가 떨어졌다. 우직하게도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는 갈색의 눈동자로 그런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남자의 체구는 크고 건장했고 나이는, 아마 자신보다도 어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행색이 더럽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가려움을 참지 못해 땀과 재를 씻어낸 후에도, 심지어 어젯밤은 실수로 벌거벗은 몸을 보였는데도 남자는 잠자리로 기어들어오지 않았다. 스스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말이 되지 않았다.


 다시금 몇 차례 망치가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 여자가 물었다.


 내 몸을 요구하진 않는 거야?

 …그런 게 싫어서 도망쳤을텐데.


 그래. 그렇지만……. 그건 공평하지 않잖아.

 공방에 들어올 때부터 몸 정도는 내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숨을 삼키면서 낡아빠진 드레스를 감싸쥐었다.

 대가라면 지불하겠어.


 남자는 손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지켜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숨겨줄만 했으니 숨겨줬을 뿐이다. 더군다나ㅡ

ㅡ공평한 건 좋아하지 않으니까. 남자가 말했다. 다시 망치가 떨어졌다. 



  처음 여자가 공방으로 들어온 밤은 늦은봄이었다. 그 후로 몇 주가 더 지나고 여름에 접어들자 여자는 조금씩 공방 밖으로 나가보기 시작했다.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몇 년 만에 자유가 눈 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방 뒤편에는 산쪽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여자는 몰래 앉아 나무 사이에 남자의 작업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걸 좋아했다.

 공방은 마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내객이 많았다. 찾는 것들은 주로 장신구나 주방에서 쓰는 부엌칼 같은 것들. 그래서 귀족가의 시녀들이 많았다. 여자는 웃어대는 시녀들 속에서 멀대 같이 서있는 남자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곤 했다.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만든다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금속을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장인은 어디에서나 귀한 존재였다. 젊으면서 숙련된 대장장이인 남자는, 실제론 모두에게 준귀족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여자도 천천히 알게 되었다. 남자가 과거 전쟁에 끌려가지 않은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남자가 가장 많이 만드는 건 농기구들이었다. 떨어지는 망치와 불, 억센 줄기를 쉽게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철을 재련해냈을 때 남자의 표정은 아주 조금 만족스럽게 변했다. ㅡ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철기구들을 주민들이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사가는 걸 보면 모두 헐값에 파는 모양이었다.


 남자의 작업은 마치 장신구를 판돈으로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는 거야?

 어느 날 여자가 물었다. 손에는 남자가 준 치즈를 겹친 빵을 들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 앉아 끼니를 때우던 남자도 무슨 질문인지는 쉽게 알아차렸다. 그녀가 숲 속에서 내내 관찰하고 있는 걸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딱히. 이유는 없어.


 천국이라도 믿는 거야? 그렇게 묻는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은 날카로웠다.


 그래.


 여자는 밥맛이 떨어진다는 듯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지켜보던 남자가 잠시 후에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갈 수 없다는 것도 믿고 있지.


 어째서?


 남자는 신음처럼 소리를 흘리고서 말했다.

 ……누구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나. 자기가 천국에 갈 순 없을 거라고, 다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을텐데.


 그 말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았지만, 여자는 그 이유에 대해 캐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남자가 창녀로 살았던 그녀와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번도 창녀를 안아본 적 없기 때문일까. 몸을 파는 창부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건 실은 누구도 안아본 적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그렇게 짐작했다.


한동안 들고 있던 빵조각을 곰곰히 바라보던 여자가 말했다.


 …내일부터 나를 당신 집에 들여보내 줘.


 뭐?


 일을 하겠어. 여자도 할 수 있는 거. 집 안 청소든 집안일이든 뭐든.


 …괜찮다고 말했을 텐데.


 내가 필요해서 그래.


 여자는 치맛단 아래 다리를 편하게 내밀고서 살짝 놀리듯이 덧붙여 말했다.


 당신이 만드는 이거, 맛대가리 없거든.


 …….


 진심이야.



 그날부터 여자는 남자의 집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남자는 하루 대부분을 공방에 머물렀고, 집에는 다른 고용인도 없었기 때문에 집에선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여자는 쉬지않고 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집은 넉넉하기는 해도 그의 공방 만큼 단순해서 할 일이 없었다. 생활에 필수적인 가구들만 순서대로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군데군데 남자 스스로가 만들어낸 작업물들이 모노크롬 사이 번진 것처럼 색색으로 숨어있었다.


 여자는 먼지를 떨어내다 한 번씩 그것들을 손으로 만져보곤 했다.

 제대로 가져본 적 없는 여성스런 물품들. 가벼운 노리개들. 창관에서 살았던 기간에도 그런 장식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자의 일과는 식사를 만들고 공방으로 가져가 남자와 함께 끼니를 떼우고, 돌아와 조금 더 청소를 하고. 다시 도시락을 만들어 공방으로 가져가는 식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이내 자신이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밤은 길고 때때로 악몽이 찾아왔지만 밤중에 눈을 떴을 때 두드리는 망치소리를 들으면 다시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