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


"검차진이 뚫렸다!"


"도망가라! 다 죽는다!"


고려군의 첫 번째 검차진이 뚫리고, 그 병사들이 도망쳐오자, 두 번째 검차진이 거란군의 통나무에 막히자, 고려군의 사기는 수직낙하했다.


병사들은 자신들도 첫 번째 검차진에 있던 이들처럼 거란군의 손아귀에 죽음을 맞이할까 봐 두려워하며, 방패를 내팽개치고 칼과 창을 내던지며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 분위기는 고려군 진영 전체로 퍼져가고 있었고, 곧 상원수 강감찬과 부원수 강민첨도 주변의 병사들이 동요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원수! 속히 도망치는 군사들의 목을 베어 본보기를 보이소서!"


부원수 강민첨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앞의 검차진을 바라보는 상원수 강감찬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한 명의 군사라도 사기를 잃고 도망치면, 기세가 등등했던 정예한 군사들이라도 한순간에 무너져내리고도 남는 법.


"지금 도망치는 군사들의 목을 베어 억지로라도 저들을 싸우게 하지 않는다면, 아군의 진영이 완전히 붕괴할 것입니다, 청컨대 명을 내려주소서!" 


물론 그런다 한들 다른 병사들의 사기가 갑자기 오르진 않겠지만, 적어도 배수진의 효과만큼은 기대해 볼 만 했다.


앞에는 적이 있고, 뒤로는 도망치면 목을 베겠다 하는 아군이 있으니, 차라리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적에게 달려들지도 몰랐다.


앞장서 싸워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살아날 가망이라도 있겠지만, 도망치다 아군에게 걸린다면 그 즉시 본보기로 목이 잘릴 테니까.


강민첨은, 그리 생각하며 상원수 강감찬을 재촉했다. 허나 강감찬은 그저 무표정한 표정을 지으며 한껏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검차진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상원수!!"


답답한 나머지, 강민첨은 강감찬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듣고 있네."


옆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강민첨 쪽으로 시선을 돌린 강감찬은, 마침내 굳게 닫은 입을 열며 말했다.


"상원수, 소인이 한 말을 들으셨나이까? 정녕 그러하시다면, 어서 도망가는 군사들의 목을 베라 명해 주소서! 동요하는  군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원수 강민첨은 강감찬을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 그러나, 강감찬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죽여 억지로 싸우게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만 나올 것이네, 무작정 윽박지르며 강요한다고, 병사들은 싸움에 나서지 아니할 걸세."


말을 들은 강민첨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탕 탕 치며 외쳤다.


"그럼 원수께선 대관절 어떠한 방책으로 군사들을 수습하고자 하십니까? 소인이 원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도망치고자 하는 우리 군사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차라리 처음 소인의 말대로 하셨다면 이리 되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이런 무례한 말을 하지도 않을 강민첨이었으나, 하도 답답하다 보니 무심코 실언이 나오고 말았다. 강민첨은 강감찬을 쳐다보며, 그럼 대관절 무슨 방도로 막을 것이냐며 눈으로 한껏 묻는 듯 했다.


-털썩


그때, 강감찬이 갑자기 말에서 내리며, 소란스러운 검차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워낙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던 터라, 방금 전까지 강감찬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던 강민첨은 미처 말리지도 못 한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멀어져가는 강감찬을 멍하니 보기만 했고, 다른 군사들도 강감찬을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니 않으며, 그저 태연하게 검차진 쪽으로 향할 뿐이었다.


"이 새끼들아 비키라고! 누구 뒈지는 꼴 보고 싶-"


"어, 어? 사, 상원수 대감!"


어느새 강감찬이 검차진에 도달하자, 서로 뒤엉켜 싸우며 제가 먼저 검차진에서 도망치려 했던 병사들은 싸우건 것도 잊고서 강감찬을 쳐다보았다.


계속 걸어가던 강감찬은 한 검차 앞에 멈춰섰고, 그와 동시에 고려군들의 시선도 강감찬에게 고정되었다.


강감찬은 장수가 쓰는 망토를 벗더니, 이내 검차의 한 손잡이에 그것을 묶어 매듭을 짓고, 남은 망토를 다른 검차의 손잡이에 묶어 두 검차를 단단히 매듭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털고, 자신을 쳐다보는 군사들을 향해 뒤돌아서 외쳤다.


"병사들아, 듣거라!"


저 멀리서 강감찬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민첨에게까지, 그 소리는 매우 크게 울려퍼졌다. 그 큰 외침 한 마디에, 도망치려던 병사들도 잠시 행동을 멈추고 강감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병사들을 둘러보던 강감찬은, 검차 너머를 가리키며 다시 병사들에게 외쳤다.


"저기, 검차 너머를 보아라, 너희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아라!


너희의 앞에는 거란 오랑캐들이 있다.


10년 전(2차 여요전쟁) 너희의 어미와 아내를 욕보이고, 너희의 아들과 딸을 잡아가고, 너희의 아비를 목 베어 죽인 원수들이 바로 저 앞에 있단 말이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 원수들의 앞에서 이리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느냐? 저 원수들이, 너희를 제 가족의 원수조차 갚지 못하는 버러지라고 실컷 비웃게 하려 드느냐?!"


강감찬이 한껏 흥분한 채로 병사들에게 외치자, 도망치려 했던 병사들은 수치스러운 마음에 그만 고개를 떨구었고, 다른 병사들은 오랑캐에 대한 분노를 얼굴 가득히 드러내며 잠자코 강감찬의 말을 경청하였다.


"너희는, 사후에 너희의 가족들을 어찌 보려 이러느냐?


가족을 능욕한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도리어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그 모습을 보며 너희의 가족들이 저승에서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죽어서, 저승에서 가족들을 어찌 보고자 원수를 앞에 두고서 이렇게 싸움을 두려워하느냐?"


강감찬의 힐난은 더더욱 거세졌고, 병사들은 더더욱 도망치고자 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더더욱 고개를 깊게 숙이며 강감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강감찬은, 검차의 손잡이를 꽉 붙들며, 병사들에게 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70이 넘은 노장의 장엄하고 당당한 외침은, 군사들의 마음속에 가득히 불을 질러 타오르게 하였다.


"오자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으려 하는 자는 살고(必死則生, 필사즉생), 요행히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幸生則死, 행생즉사)' 라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껏 원수들을 쳐부순다면, 너희 모두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요, 죽어서는 가족들에게 원수들을 설욕했노라 당당히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작은 위기에 겁을 집어먹고서 싸움을 피하려 한다면, 지금 이 귀주에서 처참하게 도륙당함을 물론이요, 가족들이 너희를 원수에게 겁을 집어먹다 죽은 한심한 자로써 바라볼 것이다. 그것을 바라느냐!!"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오랑캐에 대한 적의로 치환한 고려군 병사들은, 하나같이 하나 된 목소리로 당당하게 외쳤다.


결코 우리는 겁을 집어먹고 병신같이 물러나지 아니하겠노라고.


저승의 가족들에게 네놈은 원수들에게 겁을 집어먹은 것도 모자라 죽임을 당한 버러지 같은 놈이라 손가락질 당하지 아니하겠노라고.


저 금수 같은 오랑캐들을, 단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노라고.


"좋다, 그러하다면 어서 다시 무기를 집어들거라! 원수들에게 너희의 한을 마음껏 풀고, 가족들에게는 자랑스러운 가족이 되며, 주변 사람들에게는 너희의 전공을 마음껏 자랑케 하여라! 


원수들을 한 놈도 살려보내지 말라!"



""""""'와아아아아아!!!!!!!!!!!""""""""


어느새 사기가 충천해진 고려 병사들은,  강감찬의 외침에 모두 큰 소리로 대답하며, 귀주 벌판을 가득히 고려군의 함성으로 메웠다.


"모두 검차에 달라붙어라! 상원수 대감을 돕자!"


"저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들의 목을 베고 생살을 씹자!"


병사들은 검차에 가득히 매달리며, 통나무에 가로막힌 검차를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쿠드드드


꿈쩍도 하지 않던 검차는 어느새 조금씩 나아가는 소리를 냈고, 딱 박힌 듯했던 통나무도 조금씩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콰아앙


-쿵


-터텅


마침내 검차 하나가 통나무를 넘어가는 소리를 낸 것을 시작으로, 좌 우에서 조금씩 검차들이 통나무를 넘는 기분 좋은 울림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검차가 통나무를 넘었다! 검차가 통나무를 넘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자신감을 얻은 고려 군사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검차를 계속 밀어댔고, 마침내 거의 모든 검차들이 통나무를 넘었다.


"적의 저력이 참으로 대단하도다, 어미의 품에서 젖을 먹던 힘까지 짜내어 기어이 틈을 막다니."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거란군 도통 소배압은 감탄하며 말했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미 네놈들은 끝이다, 두 개의 틈 중 하나를 막았다 한들 한 틈으로 들어올 기병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소배압은 그들을 비웃었다.


이미 첫 번째 검차진이 붕괴하여 틈이 생겼고, 두 번째 검차진이 망가지는 것을 막았다 하나 하나의 틈은 남아 있다.


그 틈으로 기병을 진군시켜 적의 진영을 흐뜨려 놓는다면, 20만이라 한들 보병일 뿐인 고려군이 기병을 이길 리가 만무하였다.


그리한다면, 저들을 모두 전멸시킬 수 있으리라.


소배압은 그렇게 생각했다.


-뿌우우우우우


그 순간 갑자기, 귀주 벌판 뒤에서 성가신 호각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화, 황송합니다. 소장도 잘.."


거란군의 수뇌부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어...어어!! 고려 놈들이다! 고려 놈들이 우리 뒤에서 오고있다!!!"


그러나 그때, 고려군의 깃발을 알아본 한 거란 병사가 외쳤다.


높아져가고 있었던 거란군의 사기는 그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깨어졌다.


"상원수, 중갑기병입니다! 중갑기병!!"


달려온 강민첨은 흥분하며 강감찬에게 중갑기병이 왔음을 알렸다.


강감찬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더니, 이내 나팔소리를 듣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기병이다! 우리 기병이 도착했다!"


"원군이 왔다! 이제 살았다!"


"만세! 만세!"


그에 반해, 고려군의 사기는 깨지지 않다 못해 원군이라는 접착제로 하여금 금이 다시 붙어가고 있었다. 


"중갑기병은 돌격하라!"


강감찬의 외침과 동시에, 고려군 하나가 깃발을 휘두르며 중갑기병에게 신호를 보내었다.


"돌격하라!"


신호를 확인한 김종현은, 돌격 명령을 내리며 말을 몰았다. 


고려의 기마군들이 철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격 진형을 갖추며 거란군을 향해 돌진했다.


와아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


철그럭 철그럭 철그럭-


1만 명이 외치는 함성소리와, 1만 필의 군마들이 달리며 내는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과 군마들이 두르고 있는 철갑이 철그럭대는 소리가 합쳐졌다. 


거란군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자신들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리는 듯했다.


반면 고려군들에겐 그 소리가 응원군이 당도했으니, 힘써 싸우라는 힘차고 흥겨운 응원의 음악소리와 같이 들렸다.


"검차들은 일제히 돌격하라!!"


중갑기병이 돌격하는 것을 확인한 강감찬은, 검차진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오냐, 어디 한번 죽어보자, 이 오랑캐 놈들아!"


"가자! 모두 가자! 저 오랑캐들을 모두 죽이자!!"


"돌격!!"


고려군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내지름과 동시에 검차를 힘차게 몰며 거란군에게 돌격했다.


마치 거란군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생살을 씹어 버리겠다는 듯이.


그들은 힘차게 도약하며, 날카로운 검차를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