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눈에 드는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주시하고 있는 광경이 지루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태도였다. 유셸 티나는 서고 서쪽의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쪽방 안의 의자에 정신이 널브러진 체로 앉아 있었다.  그녀를 그 자리로 안내한 것은 다름아닌 그 경비원이었다. 희고 찬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경비원은 사실 흔히 볼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기에 평소라면 입을 벌리고 감탄했겠지만, 마음의 동요는 그 작은 여유마저도 그녀에게서부터 강탈해 갔다.


“여기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정적.


“왜 여기야.”


그때, 불평도 질문도 아닌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멈춰 있는 시곗바늘이 대화의 흐름을 잠시 멈추었다.

“그건 답변드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평이한 대답이었다.

명령을 받아 이행하는 자의 숙명과도 같은 대사를 유셸 티나는 이전에도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직접 대상이 되어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어쩐지 낮설게만 느껴졌다. 명령받는 이와 명령하는 자. 그 두 교착점 사이의 관계는 큰 결함이 없는 이상 삼각형의 직각만큼 똑바로 서 있고 수열의 배열처럼 규칙적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적절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지만, 속이 매스꺼워졌다.

마음 깊이 피어난 한 줄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갇혀 버리다니.

그녀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과해야 할 일도 생겼고, 이제 더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복도 밖에서 군화가 또각거리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자 티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알게 모르게 위압감을 주는 소음에 침이 삼켜져 목울대가 일렁거린다. 그리고 어느세 눈 앞에 서 있는 형체를 쳐다본다.

그는 팔 사이로 끼워 넣은 봉투를 날렵하게 티나 쪽으로 내밀었다. 온통 갈색으로 되어 있는 사각형 모양의 종이가 두 겹으로 이어져 있는, 나무랄 데 없는 모범적인 제작 예시.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녀는 봉투를 깔끔하게 둘로 뜯었다.



발령장


귀하를 금일부로 중앙서고 1부 관리관으로 발령함.


(인) 제국 집정대신 세레스티안 나인디드


단촐하지만 먼지 하나 없는 깔끔한 문서였다. 

 명령을 전달하려면 자기가 해도 충분했을 터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렇게 전달하는 건, 마치 퍽퍽한 음식을 억지로 입 안에 쑤셔넣으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와서 불평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선택의 주체는 다름아닌 본인이었으니. 

 고개를 살짝 숙여 알았다는 뜻을 보이려고 했지만, 전달자는 어느세 자리를 떠난 후였다. 뭔가 방해되지 않으려고 떠난다는 투의 일련의 각주.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번거롭다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지금 그녀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다. 

 봉투를 여전히 손에 꽉 쥔 체, 유셸 티나는 문을 열고 바깥쪽으로 나아갔다.


 지식의 나무라고 불리는 구조물의 공식적인 명칭은, 방금 전 문서에서 명기되었듯이, ‘중앙 서고’ 였다. 별칭에 비하면 꽤나 소박하고 꾸밈새가 없는 평범한 이름. 그러나 그 장소의 중요성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제국 운영의 지난 지표들을 수만 장의 책서에 기록해 놓은 곳이 바로 지식의 나무였다. 베일 속에 감춰진 비밀들, 그리고 사람들의 수천 년 치 눈물과 환희를 담고 있는 요람이었다. 대다수가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특별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그 대상이 국가라고 해도 명제가 참이라는 사실은, 시작부터 예고되었던 불편한 진실 중 하나였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가장 유명하고 많이 범용되는 격언.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창시자들은 지식을 제한하되 통제하지는 않았다. 선택되고 허가받은 자들, 황제에게 불변하는 충성심을 보유한 이들은 역사이자 살아온 이야기를 열람할 수 있었다. 이름뿐만인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뿐더러 보유자의 불만만 야기할 뿐이었기에, 훈장 대신 책을 수여한 선택. 과정을 막론하고 결과만 평가한다면, 충분히 옳은 선택이었다. 귀족들의 앎과 백성들의 무지는 점점 그 차이를 더해가 마침내 넘을 수 없는 벽을 두 계층 사이에 솟아오르게 했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과 욕망, 우월감을 유지하고 충족시키기 위해, 혹여나 벽을 타고 올라와 다른 세상의 단편을 보고자 하는 자들을 벽의 반대쪽에선 가죽에 징을 박은 구두로 짓밟아 왔으니.


 비로소 만인이 평안해진 것이다. 질서가 무너져 불만이 속출하는 것이 아닌, 불만이 곧 질서의 불안을 야기한다는 관념이 스며들어 진한 자국을 남기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장간에서도, 한번 녹아버린 불순물을 모두 다시 추출하는 것은 가히 수 년을 들여야 겨우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티나는 직접 마주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익숙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본래 불순물도 그 자체로서는 자연 상태의 순수한 결정이었을 터

였을 것인데, 단순히 비율상 극소량에도 미치지 못해서일까. 아무도 그 핵심적인 사실을 자세히 관찰하려 들지 않았다. 이러저러해서 결국 쓰다 보니, 고치고 닦을 때를 망각한 것일 거라고 티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빼앗겼다는 걸 잊으면, 만사가 태평해지고 마음은 고요하게 정적을 이룬다. 봄에는 시원한 봄바람을 맞고, 겨울에는 손시리는 눈꽃이 어깨춤으로 떨어지는 걸 느껴 버린다. 작지만 소중한 기본적인 일상. 적어도 그들은 그것만큼은 어떻게 하든 내버려 두었다. 세상에 신분이라는 순수한 발상을 흩뿌린 그들로서는 유일하게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자 하사품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했었지? 그녀가 기억 속을 혹시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는지 열심히 뒤적거렸다. 그러나 딱히 기억나는 구절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 아마도 그렇겠지만, 살아 있을 적 선량한 사람이었다. 선량한 것과 순진한 것이 잘 구분되지 않을 것 같지만, 적어도 후자와는 동떨어져있던 그였다. 둘의 실상은 물과 기름의 관계와 같다. 순진하다는 것은 새가 겨울이 되면 제 고향으로 날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의 본성에 새겨진 글자였다. 하지만 선량함. 그 특정한 성격은 타고난 성질과 기질을 달리했다. 새의 혈류 속에는 비행의 능력이 흐르고 있지만, 탄생하고서부터 그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미의 엄하지만 따뜻한 눈초리를 느끼며, 아기 새들은 둥지에서 발을 때고 허공에 날개를 활짝 편 채 몸을 던진다. 위태위태하게, 마치 풍랑에 휩쓸리는 배들처럼 새끼들은 바람의 흐름 위로 걸어 올라가려고 했지만, 처음이란 횟수는 그 짧지만 첨예한 여정의 성공 확률을 극히 낮추었다.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마 바닥에 추락해 뼈가 으깨져 여려 개의 날카로운 조각으로 해체될 것이었다. 그때, 그들의 혈관 속 흐르는 본질은 행운이라기 보단, 운명을 그들에게 주었다. 어린 새들은 날아야만 하는 운명을 심장에 꽁꽁 동여매고, 비로소 거대한 이동수단의 상단부에 탑승하게 되는 것이다. 날기 위해서, 그들은 나는 것이라는 행위의 일부로서 하나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에야 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나는 것은 능력이 아닌, 짊어져야 할 과제일지도 모르겠지, 티나가 잠시 고개를 숙인 상태로 조용히 되뇌었다.


 소설 속에서도 선량함을 지킴으로서 의미를 부여하는 선택을 한 이들은 자기 스스로도 선량해지는 성향을 내비치곤 한다. 그러나 크나큰 실수이다. 선량함으로 타인을 지킨다면, 적어도 자신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자격이 있는 것이다. 무르고 연한 정신과 사고의 흐름은 둔탁하고 예리한 배신, 음모, 계략이라는 흉기에 난도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다른 이들, 특히 소중한 이들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건 모두를 소중히 여겼다는 점이었다. 남들이라면 내버려 둬도 상관이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들까지 그는 보호하고 싶어 했다. 희생적이고 영웅적이며 숭고했던 초인, 이윽고 사람들은 아버지를 수호자로 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가족도, 본인의 권위도 지키지 못했다. 14년 전 겨울의 새벽, 그 날은 추위의 마지막 날 답지 않게 허리가 시릴 정도로 쌀쌀했다. 유셸 티나의 어머니는 그때 죽었다. 거리에 피를 흘리고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눈길 위에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는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에서는 이전의 생기가 어딘가로 전부 적출되기라도 했는지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범인은 결국 찾지 못했다. 어두운 밤이었고, 의존할 증언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아버지의 탓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단지, 착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선량함을 타인에게 내비침으로서 그들로부터 똑같은 선량함을 속에서, 아무리 꽁꽁 숨겨놓은 마음이라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굳은 믿음이 반드시 같은 종류의 단단한 신뢰로 보상되지 않는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순진함이라고 불린 그 약점은 파멸의 불쏘시개가 되어 무섭게 타오를 준비가 되었으나, 불을 붙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어머니를 죽인 범인은 아버지를 한동안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복수심이란 측량할 수 없는 힘에 정면으로 부딫히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겠지,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꽃들이 부서지고, 따뜻한 온기에 봄눈이 살며시 녹아가면 잊혀질 것이라고, 넘어가 줄 거라고 살인자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용서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그는 선량했지만, 순진한 말과는 달리 그의 피에는 덥고 끈적한 무언가가 늘상 흐르고 있었다. 아티엘 티아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는 검은색 빛깔의 물질. 그 물질은 범인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극치를 선사하길 갈망하고 있었다. 순진해질 정도로 어리석었다면, 거기까지 이르지도 못했다는 것이 바로 티나의 생각이었다. 범인이 그보다 한 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지만 않았으면, 본인에게 자초지종을 직접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이제는 전부 바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아버지는 진실을 가슴 속에 숨긴 채로, 하나뿐인 딸과 과 영원히 작별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나가는 수 밖에는 돌파구가 없었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고, 진실을 찾아낸다. 처음부터 정해놓은 확고하고도 단단한 디딤돌. 

 

 하지만 왜, 가 길을 가로막았다. 눈을 감은 체 걷는다고 할지언정, 언제나 정한 길 이외에는 다른 경로를 택하지 않을 것임을, 발걸음이 이끄는 곳으로부터 끌어당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 마음 속의 의심은 끈질기게 추궁해왔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말로서 어렴풋이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상상 속의 그림자들이 어째서 마음을 쥐고 흔들려고 하는지에 대한 연유.

 지식의 나무는 그 의문에 대해선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겁을 먹거나 하는 그런 종류의 충격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반대로 겁을 주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어느 쪽과도 부딫히기 싫었기에, 그녀는 어느세 눈앞에 와 있었던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걸어갔다. 그는 주변에 방문객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건지, 지팡이에 기대어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알베르 님이신가요.”


그들은 중앙 서고 한가운데에 있던 회의실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오래된 건물에선 보수를 위해 나무기둥에 덧칠한 유액의 냄새가 쓰리게 느껴졌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와 일맥상통한 향취, 그러나 묻어서 사라지지 않고 자리에서 부양하고 있었다.


“유셀 티나 경께서 오셨는가?” 


뒤돌아서 있던 그가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노구가 대답 없이 뒤돌아 그녀를 마주한다. 희끗희끗한 장발을 뒤로 하고, 티나는 그의 푸른색 눈을 그대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만약 빛이 비친다면 구슬처럼 반짝거릴 듯한 눈동자는, 어떠한 시선의 이탈을 용납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티아나 가문의 이름은 내게도 친숙하다네. 그 누구도 아티엘 티아나가 제국에 공헌한 바를 손쉽게 뛰어넘지는 못할 태지.”


그가 오래된 갈색의 막대에 기댄 채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전의 일이긴 하다만, 아티엘이 자네의 이름을 내게 언급한 적이 있다네. 태어났을 때 아주 기뻐했었지, 그가.”


티나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그러나 알베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듣기 그렇다면, 본론을. 티나 경,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꾸밈없는, 그리고 동시에 확고한 대답이었다.


“설명하지. 이제부터 하게 될 일은 입 밖으로 세어 나가선 안 될 걸세. 만일 세어 나간다면-”


“제국 관료조직법 제15조, 비밀유지 조항에 따라 엄히 다스려지겠죠. 예, 숙지하고 있습니다. ”


티나가 빠르게 이어붙였다.


“이제 날 따라오게.”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서 있었던 노인이 허리를 펴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쳐 갔다. 보기보다 정정한 노인이었군, 티나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갔다. 적어도 정신적인 면에서라면, 그 부분은 참이었다.

그들은 건물의 윗층으로 향하는 복도를 타고 미끄러지듯 신속하게 이동했다. 딱히 재촉해야 할 당위성이 있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 흘러 나오는 분위기가 몸의 움직임을 보다 역동적으로 유도했다. 


“수도 생활은 어떤가?”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겨우 며칠 밖에 되지 않았지만요.”


그녀의 머리가 무언가 까먹기라도 한 듯 간질거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잘됐군. 자네의 과업과 관련이 있을 것인데,”


알베르가 말했다.

“지식의 나무는 수천 년동안 제국의 서고였지. 그러니 자연스럽게도 가장 지리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가까운 수도에서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네.”


“추측이라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는 뜻이군요.”


“어떤 종류의 흔적이건 간에, 양보다는 질이 중요성을 띈다네. 가령 예를 들자면 해독이 가능한지, 훼손이 어느 정도로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특정한 경우에는 작성자의 객관성마저까지도.”


그가 편 손에는 주름이 산재했다. 


“우리가 보유한 기록에 대비해-”


새끼 손가락을 뺀 전부가 옷소매 속으로 접혀 들어갔다

.

“실제로 유용성이 있는 건 그 정도라고 할 수 있다네. 앞으로는 조금 나아질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일세.”


“거두절미하고, 특히 수도의 주민들을 해아리지 않는 자들은 똑같은 자료를 들여보아도 완전히 모순되는 결론을 내린단 말이네, 티나 경. 몰상식한 자들의 망상을 해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상식으로 가장한 무능. 우리가 늘 상대해야 할 적이지.”


알베르가 ‘209’라고 쓰인 푸른색 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자네 집무실이다만, 지금은 들어갈 이유가 없겠지. 위치만 잘 기억해 두게나. 안내지도 제작 구인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으니.”


그가 말을 마치고는 다시 앞장서 걸었다.


해가 창문으로 삐져나와 바닥을 비추는 한편, 노인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성벽을 쌓는 주민들은 어떻게 돌을 옮긴다고 생각하나, 티나 경?”


“단순히 힘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니, 아마 도구를 사용하겠지요.”


뻔한 대답이었지만 만족했는지, 그가 살짝 소리내어 웃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도구란, 다름 아닌 지식이라네. 옳고 그름을 가려냄이란 즉, 객관적인 증거에 기반해 주관적으로 판단한다는 뜻이지. 허나 경의 말데로, 그건 매우 중한 일이라네.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수백 명, 혹여나 수 천명씩의 생명의 앞날에 그림자를 드리울지, 햇살을 비추어 줄지는 우리로서 알 수가 없다네. 그 사실에 있어서는 나도 장님과 다를 바가 없다만, 지식의 나무는 그와는 상이하다네. 이 서고의 책장은 모든 진상을 깨우치고 있다만, 스스로 말할 능력이 없을 뿐이지. 그게 바로 지식의 나무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들의 과업일세, 티나 경. 스스로와 대화하며, 먼지가 쌓인 기록들 사이에서 가치있어 보이는 내용을 찾아내야 하지. 망치와 못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일 터이니, 최종적인 선택은 결국 스스로가 마쳐야만 할 터이겠지만.”


알베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 여기일세, 티나 경.”


그곳은 서고 전체를 위로서부터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아래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티나가 알고 있었던 그간의 생활과 비해서는 축복이었다. 견디기 힘들었다거나 악감정을 간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향에서의 느긋한 태도와 견주어 보니 보다 신선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쪽이 조금 더 정이 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책을 읽는 장소라면 반드시 공기의 흐름을 누구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아래에서 보이는 인물들은 옆자리, 뒷자리, 위치에 연연하지 않고 열띤 논쟁에 돌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그들을 동그래진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사실, 바로 티나가 경험하고 있는 현상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신기하네요.”


그녀가 짧게 답했다. 하고픈 말들이 온데 버무려져 있어 용이한 수단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알베르의 지팡이가 무겁게 바닥에 실렸다.


“내일은 시간에 맞추어 보도록 하지. 중앙 회의장에서 급한 용무가 있어서, 먼저 가겠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그들은 고개를 숙여 서로 지극히도, 간단한 목례를 주고받았다. 분명히, 확고한 일정의 종료를 의미하는 인사였다. 

하지만 운명은 쉬운 작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알베르 님, 심문 날짜가 정해졌다고 합니다."


발치 앞에 어느새 등장해 있던 검은색 제복 차림의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창백한 머리카락은 전과는 달리, 다소 헝클어져 있었다. 무언가 몸싸움의 흔적 같은 현상이었지만, 티나는 추궁하지 않았다. 세레나스라고 했었나? 


"언제라던가?"


순간, 알베르의 눈빛이 막 제련된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내일 정오일 것 같습니다."


그녀가 지나치게 차분하게 들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양. 티나는 그 표정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었다. 


죽어서라도 망각하기를 갈망했던 날.


영원한 시간의 흐름에서도 잊혀지지 않을 날.


그녀가 아버지를 잃었던 날.


세레나스의 태도는, 확실히 그날을 가리키고 있었다.


"심문이라면, 어떤,"


티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상식을 묻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그렇지 않으면 답을 쥐어짜낼 수 있다는 의지. 


"이스 케이안, 지식의 나무 관원의 반국가 행위에 대한 진상 조사일세."


알베르가 의아해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아마도 티나의 정색한 모습을 보아서였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죠?"

그녀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