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는 언제 오지."

"언젠가는 오겠지, 씨발."

"너는 욕 좀 하지마."

 

하얀색 정장이 검은색 정장을 나무랐다. 검은색 정장은 침을 뱉듯이 틱틱거렸다.

 

"이 새끼는 왜 안 오고 지랄이야. 씨발, 죽여버리고 싶게."

 

하얀색 정장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검은색 정장은 계속 해서 말을 할 테니. 아마 그 탓이었을 것이다. 마치 아는 것처럼 정장은 정장을 대했다. 검은색 정장이 쏟아낸 욕으로 대한민국 국민 누구보다도 어마해져갈 때, 회색 정장이 소매를 정돈하면서 등장했다. 긴 어둠 속을 뚫고 온 생물이 그러하듯, 회색 정장은 갑자기 위에서 내려쬐는 빛에 미간에 수로를 놓았다.

 

"늦어서 미안해."

"그럴 수도 있지. 다음부터는 일찍 와줘. 너무 오래 기다렸잖아."

"너같이 약속을 안 지키는 씹새끼들 때문에 세상이 요 지경인 거야, 머저리같은 놈아."

 

회색 정장은 남은 한 자리에 앉았다. 원형 탁자에 세 정장이 서로를 바라보며 앉아있다. 어찌 보면 고위 관리자들의 한상 차림을 위한 만남일 지도 모르지만, 원형 탁자는 너무나도 좁아서 세 정장이 팔꿈치를 올리기에만 충분했다. 그 정도 충분함은 있어도 되는 자리였다. 계속 욕을 하던 검은색 정장도 셋이 모이자 말이 없어졌다. 다들 내리쬐는 태양같은, 그러면서도 타닥거리는 조명 아래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자리에서 하얀색 정장이 먼저 분위기를 깼다.

 

"오늘 왜 만났는지 알지?"

"뭐. 저번처럼 정리하자고? 배를 째고 카누잉하자고, 씨발?"

"그건 네가 멋대로 한 거잖아. 우린 그렇게까지 하자고는 안 했어."

"지랄. 그렇게 안 했으면 분명 벌떡 일어나서 우리를 죽이려고 했을 걸."

"둘 다 그만 싸워. 결국 여기서 정리 사업을 하자는 거잖아."

 

회색 정장의 중재에 다시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둘' 만 눈치를 봤다. 두피까지 핏줄이 잔뜩 서있는 검은색 정장은 오히려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자신마저도 노려봤다. 어떻게 가능하냐면, 그냥 바라본다. 그러면 그것은 즉슨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번에는 회색 정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얀색 다음에는 회색이군. 그럼 다음에는 검은색인가? 이봐, 스포일러 하면 안 되지. 그런데 스포일러는 영어로 spoiler 아닌가? 그럼 spoil + er 이니까 망치는 사람인데, '스포일러 하면 안 되지' 이 문장은 망치는 사람 하면 안 되지, 라는 뜻이 되는데. 뜻만 보면 영어를 참 이상하게 쓰고 있었군. 원래 뜻이 무엇인지 모른 체, 결국 영단어가 말하는 본질이 뭔지도 모른 체 마구잡이로 쓰는 거지. 이미 70년대부터 써왔잖아? 그럼 그냥 쓰는 거지. 너처럼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 가장 역겨워.

 

"알겠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볼까 해."

"어떻게?"

"어떻해, 이 오입쟁이 같은 한심한 쓰레기 자식아."

"이제는 더 이상 음지 속에 살지 않을 거야. 조금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바뀌어볼려고 해."

 

아. 하며 하얀색 정장은 입을 다물었다. 정해졌다. 다음 타깃은 누구인가? 그건 마땅히 누구인지 알잖아. 자, 이제 누가 여기서 쓰러져야 하지. 이제 누가 여기서 누운 채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까. 답은 정해졌고, 방법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말했잖아. 본질이 뭔지도 모른 체 마구잡이로 쓴다고. 본질은 뭐지? 정장의 본질은 뭘까? 셋은 뭘 바라보는 것이지? 왜 서로를 바라볼까. 검은색 정장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법이 무엇이지? 이젠 알잖아. 이 정도까지 알려줬는데 아직도 본질이 뭔지 모르는 거야? 아니면 한자를 모르는 거야? 너희들은 대체 뭐지? 너희들의 본질은 대체 어디에 숨어있냐는 거야. 이조차도 모르면 너네들은 병신이야. 정신적으로 미약한 무뇌아. 빡대가리라고. 정신 안 차려?

 

그때 전구 안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찰그랑. 금속이 스테인리스에 부딪치면서 들리는 청량함이 분위기를 깼다. 하지만 반응속도는 검은색 정장이 가장 빨랐다. 왜냐하면 사람은 실질적 합리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절차적 합리성을 지니고 있거든. 어떻게 매일 같은 순간 합리적일 수 있겠어. 때로는 비합리적인 것을 알아도 행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내 상사가 죽이라면 죽여야지. 살리라면 살려야지. 그 행위의 정당성은 나중에 찾아도 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 정장은 그래야 하니까. 어떻게 그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100년 전에 이미 알았을까. 하긴, 그렇게 똑똑하니까 미국 대통령도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사실을 접어두고, 일단 이 정장은 다른 정장을 죽여야 할 것 같다. 그게 비합리적인지, 뭔지 그 정장은 알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은 떠올려봤자 행동을 제약할 뿐이야. 아니, 제약 회사 말고. 정장은 약쟁이가 아니니까. 이 다크서클은 약 때문이 아니라 그냥 피곤해서야. 상사 말고, 정장이 피곤하다고.

 

바닥에는 두 정장이 쓰러졌다. 어느 새 빨개진 정장을 입은 하얀색 정장과, 오묘한 색깔을 지닌 회색 정장은 참으로 엉거주춤하게 누워있었다. 하지만 연기는 아니었다. 이 순간부터, 이로 인한 모든 것에서부터 하얀색과 회색 정장은 죽었다고 나오겠지. 그것은 전화따위 필요없는 아메바적인 신호였다.

 

"씨발, 나만 살아도 되잖아. 왜 내가 죽어야 해,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더 나빠. 나도, 나도 너희랑 똑같은데. 너희들이 뭔데 날 죽이냐 마냐야."

 

검은색 정장은 피가 잔뜩 흐르는 칼을 저 멀리 던졌다. 칼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창살같은 빛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검은색 정장은 칼이 던져진 어둠 속을 지긋이 바라보고 니기미, 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정장을 미처 정리할 틈도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