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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침한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자리에 누워서, 피곤함을 달래고자. 감긴 두 눈은 꿈 속에서 

천천히 떠졌다.


"오빠. "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랜 시절 있었던 기억의 파편.  스산한 바람과 주변에는 낙엽이 휘날리던 

어느 가을의 날이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나중에 또 주교님이 보시면 어쩌실려고."


"아무도 없는데 뭐.  그리고 또 이 때 아니면 또 언제 다시 불러 보겠어? "


왼쪽팔을 파고들며 정겨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껴앉은 팔에 육중한 무언가가 닿았다.


"히힛.  "


 그럼에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파란색 눈동자. 환히 웃는 순수한 웃음은 

누가봐도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모습이었다.


"방끗 방끗 아무 남자한테 막 웃고 다니지 말라니까. 웃음이 천하다고 뒤에서 한 소리씩 하는애들

내가 봤다니까 글쎄."


 그럼에도 불구하고 툭툭, 생각에도 없는 말을 뱉어대던 나. 퉁명스러운 말투가 문장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아마도 그녀의 얼굴에는 심술이 난듯한 표정이었겠지. 왜 이런 말을 했었을까? 나만 보고 싶었나?


"어짜피, 그런 애들은 뒤에서 밖에 이야기 못 해. 내가 그래서 인상 찡그리고 다니면, 이제 또 

그렇다고 욕 하고 다닐껄?"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손사래 치며  다가와  얼굴을 바짝 밀착시켰다. 내 거친 얼굴에 손가락을 

얹즈며 양손의 검지로 나의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는 그녀. 


"....이거 뭐하는 짓 입니까?"


 "보기 미워서 그래. 맨날 그렇게 인상 찡그리고 있는 게. 그렇게 잘 웃고다니던 사람이 이렇게 

근엄한척 하면서 있는거 굳이 나랑 있을때는 할 필요 없지 않겠어?"


 나는 인상이 꽤나 좋은 편이었다. 어디가서 누군가의 밑에서 일 할때 하나씩 꼭 있는 입이 가벼운

친구들이 자신의 뒷 사정을 이야기 하기 편한. 하지만 이 곳에 들어오고 나서부턴 그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었기에 웃지 않기로 했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억지로 근엄하고 무서운 굳은 

표정을 하기로 했었다. 


".....티 납니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던데. "


"내가 오빠랑 몇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걸 모르겠어?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을땐 서로 말 놓자.

딱딱하게 직책으로 말 하지 말고. "


그녀는 다가와, 양손을 맞잡았다. 나에 비해 한참 작던 작고 어린 손이었는데.....이제는 꽤나 커 져서 

내 손의 두번째 마디까지는 자라났었다. 


"손이.....많이 거칠어졌네?. 예전에는 참, 부드럽고 따듯한 손이었는데...."


 거칠어질수 밖에.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검술이었다. 늦게 시작한 시간만큼을 노력으로 매꿔야 하기에

열심히 매일을 갈고 닦았다. 손바닥의 피부가 남아 날 일이 없었고, 그런 노력 끝에 얻은 자리였으니

까 어찌보면, 손바닥의 보드라운 감촉과 맞바꾼게  실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 말 하고, 잡은 손을 깍지 끼고 옆 머리로 가슴팍에 머리를 맞대는 그녀. 두근 두근, 나의 심장이 

뛰었다.


"......주변에 보는 눈도 있는데. 이래도 되나?" 


"잠깐만, 잠깐만......"


" 이렇게 있자. 옛날에, 우리 같이 살았던  그 때 처럼."


 시간이 멈춘듯, 가을 바람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맞닿아 있었다. 서로간에 느껴보는 오랜만의 감촉

의례적으로 주고 받는 인사와 손짓이 아닌 서로간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 짧은 순간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평소와 같은 날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


  한참을 껴앉고 있던 나와 그녀.  한참을 뜬 눈 때문인지 뻑뻑해진 두 눈동자를 눈꺼풀속에 가둘 요량으로 

눈동자를 다시금 한번, 깜빡였다. 


  떨어진 낙엽은 시간을 타고 거꾸로 올라갔다. 바뀐 색깔은 다시금 천천히 파릇했던 처음의 잎새로 돌아서가며

청명했던 여름의 한 순간으로, 나를 되돌려놓았다. 


 무대의 중앙,  책상을 올려다보는 자그만한 키로 되돌아간 좀 더 어린시절의 내가 있었다. 나의 밑에는 그런 나 

보다도 작은 고사리 같은 흔들고있는 그녀가 작게 실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자그만한 입술에서 들려오는 조그만한 미성의 목소리.


".....어?"


"뭐해."


 멀뚱멀뚱 대답하며 햇빛을 막고 있는 나에게 간신히 들릴정도로 작게 말했다. 주변을 두리번 둘러보니 

연극의 클라이막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 숨죽인채 무대의 중앙에 서 있는 나와 그녀를 바라본다. 


"그.....뭐 해야 하더라."


머리를 긁적거리는 나의 모습.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관자놀이를 긁고 어찌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에휴, 하여튼간에. "


 한숨을 푹 쉬며 손을 뻗어 나의 뒷목을 감싸는 그녀. 짧게 민 뒷머리에 그녀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이렇게....하라고."


".....!"


 눈을 감은채, 상체를 살짝 들어 그녀는 그녀의 입과 나의 입을 맞댄다. 살짝 갈라진 매마른 입술이 닿았고,  

무언가 가슴 속에 울컥 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오...!!"


"우와!!!"


 아이들은 두 사람의 입맞춤에 환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이와 함께 이 곳을 보러 온 두 부모들도 모두 무대의 중앙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심장은 고장난듯 미친듯이 뛰었고, 시간은 흐르는듯 마는듯 싶었다.  부드러운 살이 닿는 촉감. 두 입술이 떨어질때

콧잔등으로 뿜어진 미온의 숨결. 적어도 반 세기는 더 지난 일이었지만서도, 마치 방금 전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성황께서 군림하사, 짙은 어둠 몰아 내시니. 아아! 우리는 그분의 아래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나니. 

아아  그분의 품에서 다시 태어났도다."


 극이 막을 내리고, 함께 연기했던 아이들이 모두 모여 원장님의 오르간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삼삼 오오 모여 부르는 

성황축가. 아이들의 노랫 소리가 풀 벌레들 소리가 무성한 저 먼 풀 숲까지 크게 울려 퍼진다.  짝짝, 노랫 소리에 맞춰 

박수를 치는 주변의 사람들.  여름 수련학교의 마지막이 그렇게 끝이 났다.  


무대를 정리하고 내려오는 길. 또각 또각, 발소리가 들린다. 무대 밑을 내려오고 있는 것은 나와 그녀.  


"......"


"......"



 성대한 키스신이 무색하게, 무언가 불편한 관계인듯 내려 오는 둘 사이. 발을 맞춰 걸으려 하니, 먼저 한 발자국 건너가고 

또 거기에 발 맞춰 따라가니 한참을 뒤로 발을 빼는 그녀의 모습. 나는 그런 그녀를 따라 갔다.    


 왼손이 텅 빈거 같아, 집어넣는 나의 오른손.  


"!!!"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밀쳐내는 그녀.  키스를 한 적극적인 모습은 어디로 다 사라진 것인지 귀까지 말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모르게, 그 손이 너무도 탐스러워 보여 기어코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진짜......"


 잠시  멈짓하다 나의 손을 깍지를 끼며 잡는 그녀.  우리는  손을 맞잡으며 같은 보폭으로 무대 뒷편을 걸어 나갔다. 여름밤의

달빛은 환히 우리를 비췄고 나는 환한 달빛 아래 그녀와 손을 맞잡으며 걸어 나갔다. 


 거리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또,  무더운 여름밤의 습한 공기를 몸으로 느끼며 나는 다시금 눈을 깜빡였다


 달이 지고, 해가 뜨고. 또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시간은 앞을 향해  한참을 달려 나갔고, 다음번 눈 뜬 장소에는 부쩍 몸이

커 진 나와 그녀가, 봄 내음이 가득한 어느 폐허에서 겹쳐 있었다.  


"오빠."


야릇한 숨결이 섞여 나오는 매혹적인 목소리. 


 "어...."


 거칠게 몰아 쉬는 숨소리로, 매혹적인 목소리에 화답하는 나의 모습. 욕정의 소용돌이에 밀려 정신이 없는 

나는 아무렇게나 그녀의 물음에 답한다. 


"하...하.....하아.....하...."


"후......후......하......"


 주고 받는 숨소리. 날숨과 들숨을 반복하며 동작을 이어가는 나와 그녀. 땀방울이 몸을 타고 흘렀다. 햇빛을 등진 그녀.

역광에 의해 흐르는 땀방울이 은은한 빛을 만들며 굴곡진 그녀의 나신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덧씌웠다.


"나......너무 좋아. 오빠도.....그래?"


 격렬한 춤사위에 지쳤는지, 허리를 살짝 구부러 뜨리며 나의 귀 옆으로 상체를 숙이는 그녀.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뜨거운 숨결이 귓볼을 타고 나의 안쪽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나도....그래......"


 그녀의 허리가 천천히 뛰자, 이번에는 나의 허리가 빠르고 위로 튀었다. 새 소리, 물 소리 하나 없는 적막한 주변에 

우리 둘 사이의 격렬한 몸동작이 자아내는 소리가 주변에 퍼졌다. 


"그래.....? 그럼.....정말.....다행이다......"


 그리 말하며 환희가 가득한 얼굴로 나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그녀.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입 안의 혀와 혀가 하반신과

같이 서로를 감싸 안았다.   


 천천히, 그녀의 골반과 하반신이 떨려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고 나 또한 하반신이 상기되어 터져 나올것 같았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 앉는 우리 둘. 


"......"


"......."


 뜨거운 것은 그대로 안으로 흘렀고, 혼란스러운 정신은 그제서야 또렷하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그 자리에 나를 가만히 놓아두었고 그녀 또한 자신의 몸을 나의 가슴에 묻은채로 한참을 말 없이 부등켜

안았다. 


"저기......안 아파?"


왼편으로 돌아 누운 그녀. 가슴팍 양 옆으로 길게 늘어진 나의 상처를 검지 손가락으로 쓰윽 문지르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은. 당시엔 꽤, 아팟지만."


"진짜로 아팟겠다. 내가, 거기 그렇게 서 있지만 않았더라면."


긴 상처를 쓰윽 검지로 훑으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 


"그럴수도 있지. 싸우다보면 어쩔 수 없는거고."


"......"


 눈물이라도 흘릴듯한 얼굴. 아니 실제로 눈물이 찔끔 찔끔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나의 가슴에 묻으며  양 팔로 안았다.  


"그래도 다행이야, 다친게 나여서. "


 듣지 못하게 입을 다물면서 몸을 천천히 떠는 그녀. 아마 울고 있는 거겠지, 아마 눈물 흘리고 있는 

것이겠지. 아이를 달래듯 등을 툭툭 치는 나.  


"괜찮아......괜찮아....."


"너가 만약, 거기서 그렇게 쓰러졌다면......나는.....진짜로 무너졌을꺼야."


 울지 말라 부등켜 앉으며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친다.

콧잔등까지 타고 내려온 눈물을 닦으며, 울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등 뒤로 떳던 햇빛이, 무너져내린 폐 건물의 경계와 만나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늘의 안쪽에 있던 나와 

그늘의 경계선에 있는 그녀의 뒷 모습. 햇빛은 지나가며 점점 더 큰 그늘을 만들어 내었고 나는 그런 햇빛

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햇빛이 지면서, 그늘과 빛의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찼다. 땅바닥에서 느껴지던 봄의 

온기는 밀려 들어오는 찬 바람에 의해 싸늘히 식어버렸고 햇빛이 있던 자리에는 하얀색 눈이 끝도 없이 

내렸다.    


 

"오빠......."

 

 차디찬 맨 바닥에 쓰러진 그녀. 옆 얼굴로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나의 눈과 마주쳤다. 

ㅇㅗ ㅃ ㅏ. 입을 벌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따스한 숨결이 찬 바람과 만나 입김이 났다.


"아아......."


 축축히 젖은 바닥. 흘린 피가 들러붙은 그녀의 옆으로 주르륵 흘러 내렸다. 일어나, 그런 그녀를 감싸 안으며

어떻게든 손을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잘려진 팔과 다리에 힘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참, 성가신 년이군. 기어코 여기까지 끌고 나오다니."


 낮선 남자의 목소리. 투구를 눌러 

쓰고 갑옷을 입은 남자는 성이 잔뜩 난 목소리로 볼을 대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발을 올려 짓밟는다.  


 "반반한 년이라, 저항하지 않았으면 잠깐은 요깃거리로 살려두려 했건만. 쯧"


  한쪽 발로는 그녀의 얼굴을 짓밟고, 한 쪽 발로는 바닥을 밟으며 두 손으로는 칼을 높이 들며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높이 든 칼, 칼날이 달빛을 반사하며 어두운 공간에서 빛을내며 반짝였고 반짝이는 칼날은 그대로 

바닥을 향해 베어졌다. 


 "이런, 개,씨발,년이, 얌전히,있었으면, 그냥, 보내 줬잖아!"


 어절의 끝, 쉬어간 횟수 만큼 휘둘러진 칼은 그녀의 몸을 난자했다. 막아보려, 나아가 보려 발버둥 쳐 보았지만

남자와 함께 한 일행에 의해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단말마의 비명소리도 먿었다. 완전히 생기를 잃었는지 간헐적으로 신경이 조금씩 움직일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그녀. 텅 빈 파란색 눈동자.


"잘 가라."


 마지막 칼질에 의해 바다와도 같았던 그 파란색 눈동자 마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피로 난자

된 고깃덩이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끄윽...깍....크윽...."


 소리 쳐 보고 싶었지만, 이미 뚫린 기도에서는 피만 튀길 뿐. 이미 피로 가득 찬 폐에서는 물 소리만 날 뿐. 

목소리는 말이 되어 흘러나오지 못하고, 찬 허공에 소음으로 퍼졌다.  피가 잔뜩 묻은 투구를 벗어 던지며, 

긴 머리를 뒤로 넘긴 후 나에게 다가오는 남자.  나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하하! 헤헤! 어때? 어?  이 새끼야. 내가 너 한테 진 거 같았냐? 응?  말 해봐. 어? 말 해보라고 씨발놈아."


 광기에 젖은 표정으로 말 소리 조차 내지 못하는 나의 머리를 움켜쥐고 흔들며 말하는 남자. 그는 마지막의 싸움에서 져

선택받지 못해 나에게 밀려난 가문의 기사였다.  


"봐준거야. 씨발. 내가, 우리가문이, 또 이런 처형인이라...... 근데도 넌 나를 가뿐히 이긴 줄 알았지? 막 웃고 다니고. 좋은 싸움

이었다 하고. 이 개새끼야. 꼴이 좋아 아주?어? 지가 최곤줄 알았겠지? 어허? 큭큭큭."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응? 생각한 것 만큼 아주 짜릿하고 즐거운 날이네. 하하! 역시 아버님이 말 한게

맞았어. 하하하! 하하하하!!! "


 주변이 떠나가라 웃는 남자의 광소. 옆구리에 찬 단검을 빼어들며 표정을 싹 굳히고 빼어든 단검으로 나의 목덜미를 

옆으로 쓰윽 베어냈다.


"......잘 가라고. 가서, 고깃덩이가 된 저년이랑 저세상에선 부둥켜 앉고 잘 살아봐!"


 잘린 상처에선 피가 줄줄 세어나오고, 머리는 자연스레 바닥으로 가라 앉았다. 땅바닥에는 시냇물이 흐르듯 피가 고였고 

빠진 피 때문에 몸은 가늘게 떨려왔다. 저벅 저벅 군화 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그들이

나를 두고 떠나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의식은 서서히 꺼져나갔고, 나는 초점을 잃은 눈을 천천히 감게 되었다. 


 그것이, 짧다면 짧았던 나의 마지막 기억.


-4-

.......

.........

...........


 생각해보니, 늘 의문이었다.  달이 차면 기울고, 해가 뜨면 지듯이. 운명의 수정구가 검게 물들면 세상에 등장하는 악의 세력과 

그 짝을 맞춰 등장하는 용사와 성녀. 


 세상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는것은, 세상이 아직까지도 그 악의 세력들에게 물들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런 악을 물

리치던 용사와 성녀가 언제나 그들과 싸워 이겨 왔다는 뜻일진데......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니, 기이하게도. 태초에 왕국을 세웠다던 성황을 제외하고선 이후에 뽑힌 그 수많은 용사와 성녀는 

'악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했다.' 까지만 전해 질 뿐. 이후 목숨을 보전해서 살아 남고, 어떻게 남은 인생을 역사에 남기었는지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들 또한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빛이 나는 존재였음에,  어둠이 물러가면 그런 빛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어둠과 함께 짝을지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던 것은 조금만 생각 해보면 누구나 의문을 품을 내용이었다.  하지만 왕국은, 빛이 나는 성검의 뒷켠에

그런 기이한 진실을 숨겨둔채로 천수를 누렸었다.  


 마경. 마의 경계선. 그곳은 모든 용사들이 어둠의 문을 열고 마왕성에 도래하는 첫 시작지점. 하지만 모험의 시작인 그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찬란했던 빛의 의무를 끝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긴 영웅담의 마지막 페이지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성황을 제외한, 나의 앞에 수십은 더 지나친 용사들처럼. 나의 뒤에 수십 수백을 이어 갈 이후의 용사들과

같이. 그대로 그, 축축한 땅바닥과 하나가 되어.  '용사는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해냈습니다.' 라는 구절을 마지막으로 나의

존재를 끝마치고 흙으로 돌아갈 운명이었다. 


 분명히 그럴 운명이었을꺼다. 아마도, 아마도......



"오빠......"


"오빠."


"오.....빠....."


 하지만 그렇게 수십, 수백 수천년을 이어가던 용사들의 비참한 최후. 그들이 이 땅에 남긴 단말마와 마지막 절규는 이 요사스러운

땅에 고스란히 남아서 진언으로서, 깊은 저주로서 모이고 쌓여 있었다.  


 처형인들은 몰랐을것이다. 왕국 또한 예상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이 악순환의 반복이 만들어낸 저주의 고리는 나의 대에 이르러 드디어 그 힘을 전했다.  강대하던 용사들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이 용사들의 무덤에 전한 힘. 


"안돼!!!"


"크아아아악!!!"


"놓아줘.....제발.....제발....!!"



 붉게 물든 시야. 구겨지고 무너진 수천의 용사들의 잔상. 원혼이 되어 바닥에 묻혀진 수백의  최후가 하나의 그림으로, 하나의 힘으로 잘린 나의 팔과 다리 그리고 상처에 스며들며 나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되돌려 놓았다.  


"반역......성자.....후레자식......임금.......전설......거짓......."


"절명......저주의 고리......계약......문...... 어둠.......마경......"


 "신전.....성황......인간.......신화......최후... 단말마...."


"그리고 저주." 


 그 날 이후 나는 가슴속 한 켠으로 그 저주를 품었다.  나를 이 운명의 나락으로 이끈 저 왕국을 참살하기 위해 거대한 응어리를

마음속으로 빗어내었다.


  완전히 잊혀져 이제는 흐릿한 기억속에 남은 그녀의 얼굴을 그리며. 나의 이 힘을 전달할 이 마지막이 될 용사의 길을 끝마칠 

최후의  용사를 기다리며.


"......."


 드디어 맞닿았다! 드디어 도달했다! 심기 일전한 나의 저주의 씨앗을 전달할 최후의 용사가!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나는 내 가슴 속 에서 빗은 모든 원혼을 뱉으며 그의 몸으로 '그것'을 전했다. 


"아아........"


 힘의 근원이 빨려나가는듯 싶었고 나는 모든 힘이 빨려나간 바짝마른 나무의 형상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와는반대로

완전히 죽은것과 진배없던 그의 몸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가 눈 뜨면, 나는 그에게 나의 마지막과 함께 이 추악한 진실에 대해 전하리라. 나의 마지막과 그의 마지막을 이어 저 

멀리 왕성에서 웃음지을 왕에게 최후를 맞게 하리라! 


"으으....."


 뒷통수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즐거히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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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끝. 3편은 현재의 처형인 시점.   진짜 그냥 되는데로 썻다. 원래 어제 올리기로 했는데 어제 

퇴근을 너무 늦게하고 오늘 뜬금없이 출근하는 바람에 후다닥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