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조금 빨리 왔다>


내공도 몸도 잃고 어린 계집이 된 천마.

그런 천마를 되돌리기 위해 월남 방향으로 치료법을 구해오라며 사람을 보낸 장로.


어려진 천마에게 복수할 기회만 보던 하루하루의 도중.

분명히 20일에 도착하리라던 물건이 오늘 도착했다.


처음엔 긴장했다.

천마가 본래의 몸과 정신상태를 되찾는다면 어찌 될 것인가.


지금의 어리고 미숙한 정신상태에도 천마를 살해할 기회를 잡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초식이라도 전개했다간 그대로 달려와 제압할 사람이 몇인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천마를 호위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강했던 전성기 시절 천마가 재림한다면.


"안 됩니다! 천마님에게 그것을 먹여선 아니됩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다급하게 말린 것이다.


"어째서?"

"그건 그... 혹시나 보낸 물건이 독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표면상의 이유는 다른 걸로 둘러댔지만.


"이 놈! 어찌 장로가 고른 사람을 의심하느냐!"

"저는 어디까지나...!"

"어허, 어디 어른 말씀하는데 언성을 높이느냐!"


할망구가 호통을 쳤다.

그 호통에, 어쩐지 내 속내가 간파당할 것만 같았다.

하나 물러설 수 없었다.


"... 저는 어디까지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청하는 바입니다. 세상지사 새옹지마가 아닙니까."

"새옹지마는 이런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인심난측이라 하였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헤아리기 어려운 법인데

어찌 천마님에게 그런 위험천만한 물건을 먹이려 하십니까.

부디 재고하여주십시오."


장로가 가만히 말을 듣다가 크게 박수를 쳤다.

감탄의 표현이 아닌, 주의를 끌려는 행동이었다.


"주목. 이렇게 하지. 독의 유무가 걱정이 아닌가."

"장로, 지금 설아 저 아이의 말을 믿는 것입니까?"

"1월에 일어났던 소동은 우리 마교의 사람이 흑막이었다했소.

함부로 사람을 믿어선 안 되는 시기지."


어깨에 힘이 빠졌다.

이대로 끝인가?

천마는 다시 무림 최강의 힘을 되찾고 극악무도하던 악마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나 그것은 파견을 한 아이도 마찬가지일세."

"그 말은...!"

"섣불리 짚지 말게. 일단은 다른 이에게 먹여서 판단을 해보잔 걸세."


장로가 돌쇠를 불렀다.

돌쇠는 마당을 쓸다말고 들어왔다.


"돌쇠야, 네가 날도 추운데 고생이 많구나."

"이제 봄도 되고 날씨도 다 풀렸는디유?"

"... 꼭두새벽부터 고생이 많구나."

"오늘은 지가 그렇게 일찍 안 왔는디유."

"... 출출하지 않으냐?"

"방금 새참 들었슈."


장로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기특한 돌쇠 녀석.

네가 저걸 먹었는데 저게 무독성이란 게 밝혀지면 난 끝장인데.

보다 못한 할망구가 나섰다.


"그럼 그냥 우리 호의니 들거라. 저쪽 월남에서 왔다는 물건이다."

"고맙기야 하지만은 지한테유?"

"어서 들라니까."


돌쇠가 눈치를 살피다가 잔 속 액체를 삼켰다.

모두가 숨을 멈추고 돌쇠를 바라보았다.

돌쇠가 꼴깍 삼키고 표정을 굳혔다.


"하 한, 더...."

"왜, 왜 그러냐. 어딘가 몸이 안 좋으냐?"

"설아의 추측이 맞았구만. 씁쓸하군."

"큰일이구만. 월남에 보낸 그 아이는 신용할 수 있다고 여겼거늘."

"이렇게 되면 다른 녀석들도 재차 검토해봐야 하는 게 아니오?"

"물 한잔만 주쇼. 목이 타서 안 되갔구만."


질끈.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두눈을 감았다.


"마셔보니까 정신이 번쩍 들고 좋구만유. 맛이야 쓰긴 한디."

"몸에 이상은 안 느껴지는게냐?"

"그런 거 없씨유. 한데 이건 이름이 뭐당가요?"


장로가 그 말에 동봉되어 온 또 한편의 서신을 꼬깃꼬깃 펼쳐들었다.


'이곳 사람들 말론 죽은 사람도 되살릴 비약이고,

차를 우리면 한잔만 마셔도 몽롱함이 달아나니 신통한 약입니다.

천마님의 상태도 필시 나을 겁니다.

멀리 서역에선 코피라고 부른다더군요.

많이 쓸 테니 같이 보낸 꿀을 타서 드십시오.'


커피구나 싶었다.

하기는 이 시대면 커피를 모를 수도 있겠지.

더구나 이런 외딴 산골인데.

한데 커피에 꿀을 탈 수가 있던가.


"하... 그럼 독성은 없는 듯하니 천마님에게 직접 투약해봅시다."

"그럽시다."


당연히, 커피 따위가 천마의 어린 몸을 바꾸진 못하였다.


"아아아~ 시러! 그거 너무 써어어!"

"천마님 아, 아~ 하세요!"

"이미 머것잖아! 이제 안 머거도 된다매 왜 거짓말 해!"

"조금 먹어서 효력이 안 나오는 걸 수도 있습니다, 전부 드시면...!"

"나 구거 안 먹눈다고! 왜 이상한 거 자꾸 주눈데에에!"

"서, 설아야 천마님 다리 잡아라 어서!"


쓴 맛에 발작을 일으키는 어린 계집 천마의 꼬락서니는 그럭저럭 볼 만했다.


"히히 마싯따...."


다행히 소란은 방금 막 가라앉았다.

월남에서 보낸 흑설탕 덕택이다.


일기를 쓰는 지금,

천마는 양손으로 볼을 문지르며 각설탕을 오물거리고 있다.

내 허벅지에 머리를 눕히고.


다리도 저려오는 참이겠다, 제지를 하곤 싶지만

또 땡깡을 부릴까 두려워 행동으론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토록 노심초사하던 고비를 넘겼다.

온 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다.

내일부터 힘내서 다시 복수의 길을 모색해보자.



*



4월 27일


<최근엔 다시>


최근엔 다시 천마 뒤치닥거리가 문제다.


"자기 전에 물 마시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햇서요...."

"마셨어, 안 마셨어?"

"마셔써요...."

"왜 마셨어."

"목이 말라서...."

"자기 전에 물 마셔도 돼, 안 돼?"

"안 돼요...."

"근데 마셨어?"

"네....."


뭐 이 모양이다.

훈육이란 건 어떻게 시키던가.

훈육은 전생과 현생, 두번이나 받아본 훈육엘리트지만

그런 나라도 훈육을 한다는 건 어려웠다.


천마의 이불은 활짝 펴두었다.

내일 빨래하는 녀석에게 주면 되겠지.


요즘 들어 자주 이러던데 뭐가 원인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할 지도.


애초에 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애 봐주려고 온 거 아닌데.

분명히 복수를 위해 오지 않았던가.


"하... 달이 밝네."


고통스럽게 스러져가던 현생의 부모님이 보시면 크게 실망하실 터다.

하나 이렇다 할 계책도 생각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가 바쁜 요즘이다.


"아 담배 당긴다."

"언니 당베가 모에요?"

"빨리 잠이나 자라."

"자장가 안 불러주면 안 잘 거에요."


가지가지 하는구나 진짜.


"전에 언니랑 서고 갔을 때 봣는데여, 자장가라고 자기 전에 부르눈 노래 가튼 게 잇대요!"

"아 담배 당긴다."


그래 다 내 잘못이지.

뒷목이 뻣뻣해졌다.



*



5월 9일


<일전 천마의 복통 관련>


기분이 이상하다.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장로가 불렀다.

뒷채로 가보니 입을 틀어막은 채 인두로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번에 본 광경인데."

"왔느냐 설아야."

"언니 나 무서어요...."


천마가 나한테 엉겨붙었다.

습관적으로 천마를 안아올렸다.


나는 어린 천마의 등을 토닥이며 마저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건 다 뭡니까? 얘도 왠일로 데려오라고 하시고."

"천마님의 정체를 아는 자들이다."

"천마를요?"


천마가 어린 여아가 된지 5개월이라.

누군가에게 들켰어도 이상할 건 없는 세월이었다.


"일전에, 천마님이 복통을 호소하신 건. 기억하느냐?"

"밥 먹고 나서 배가 아프다며 보채던 때요?"

"구치만 진짜 아팠따구요."


단순한 복통으로 치부하기엔 기이한 사건.

어지간해선 몸이 아픈 적이 없던 천마가 고작 저녁밥을 잘못 먹었다고 며칠을 앓아누웠던 일이다.

보고 당시 장로는 "뒤가 구리니 내가 직접 캐봐야겠구나" 라 일렀다.


"그 원인이 저 놈이니라."


장로가 고문 당하는 사내를 가리켰다.

사내는 눈이 반쯤 뒤집혀져 있었다.


"밥에 독이라도 탔던 겁니까?"

"그랬으면 자네에게도 피해가 갔겠지."

"일단 입마개 도로 풀어봅시다."

"아, 아으으...."

"네 놈이 천마님에게 무슨 짓을 행한 것이 틀림 없느냐?"


조심조심,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작질이란 건 독이고?"

"으, 어으 예."

"하면 독은 어디에 뿌렸느냐."

"그, 그거, 그건...."

"강단 있는 녀석이로구나. 아예 손을 불구로 만들어야 실토할 셈이렸다?"

"오오, 옷! 옷이, 오, 옷에 뿌렸소...."


옷이라.

천마의 옷이라면 아귀가 맞는 듯도 싶었다.

옷을 갈아입히니 병세가 물러나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나.


"지시한 사람은 누구냐."

"모, 모르오...."

"네 놈이 모르면 인두한테 물을 수 밖에 없겠는데."

"삼매진화판 인두 맛을 보고 싶은 게냐!"

"정말이오...! 늘 가, 가면을 쓰... 쓰고 만났소. 목소리도... 목소리도 기이하게 깔았고!"


사내가 숨을 몰아쉬었다.

장로가 심문을 멈추었다.

진퇴양난이었다.

더 캐묻기도, 캐묻지 않기도 난감하였다.


"일단은 이곳에 가둬둡시다."

"그게 낫겠군."


할망구의 제안을, 장로가 선뜻 수락했다.

차차 처리할 속셈이랬다.


"그건 그렇고 전화위복이로구만."

"그러게 말이오. 천마님의 힘의 편린을 보게 되었으니 외려 기뻐해야겠소."


늙은이들이 영문 모를 말을 주고 받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야 그렇지 않겠느냐. 어지간한 일류 무인도 독살 가능한 맹독이라 했으니."

"그 정도의 독이었다고요?"

"심지어 맨살에 바로 닿는 수준이었다. 천마님이 저번에 세상을 뜨셔도 이상하지 않았잖느냐."

"금시초문입니다. 천마님도 그 후엔 앓아눕긴 하셔도 명을 달리하진 않으셨는데...!"

"그게 만독불침이 발동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냐."


만독불침萬毒不侵.

만 가지 독에 면역이 있다.

어떤 독에도 죽지 않는다는 무공의 경지이다.


천마가 만독불침으로 옷에 묻힌 독을 중화시켰다고?

나는 그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만독불침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마님은 현재, 이렇게 조그매지셔서 무술도 내공도 다 잊은 상태입니다!"

"살고자 하는 천마님의 마음이 옛기억을 더듬어내려간 것일지도 모르지."


생존본능이란 건가.


"또, 만독불침이라면 독에 고통을 받지 않았어야 정상이 아닙니까! 어찌 며칠씩 끙끙거리기겠습니까!"

"만독불침이라고 해도 그렇게 대단한 경지는 아니라네. 다만 독에 수명을 달리할 일이 없다는 것 뿐이지."

"앓는 것 정도라면 있을 법하지."

"기이할 정도로 오래 앓으시긴 했지만."


별채까진 터벅터벅 걸어돌아왔다.

만독불침이라 하였다.

독살조차 불가능하다면 내 어찌 천마를 살해할 수 있으리.

무공으로 살해하는 것은 저기 숨어있는 다른 호위들에게 저지당할 테다.

독공조차 안된다면 수가 크게 줄어든다.


묘한 점은 달리 있었다.

머리는 이리 복잡함에도 마음은 편안했다는 것이다.

만독불침이란 말을 듣고부터.


조급해지지 않는다.

긴장이 되지도 않는다.

그저 낭보라도 하나 들은 듯 마음은 저 멀리 하늘 위로 달아난다.


무엇이 원인일까.

오늘 먹은 저녁이 맛이 좋아서였을까.

그러고보니 최근엔 끼니의 맛을 따지게 되었다.

작년에만 하여도 입에 들어가면 그것이 곧 음식이었는데.

음식이 짜네 다네 투정도 하게 되었다.

모르겠다.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다.



*



5월 20일


<최근 자객이 늘었다고 한다>


어제 자객 하나가 천마를 암살하러 왔다고 한다.

이번엔 독공도 아니고 평범하게 무술로 죽이려고 했다고.

인용문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잡혔으니까. 실패했으니까.

나와 천마는 아침에 장로가 알려주기 전까지 꿈에도 몰랐으니까.


"요즘엔 극성이군요."

"너무 많아졌습니다 장로."

"슬슬 숨기는 것도 한계겠지요."


그들이 머릴 맞대고 끙끙거렸다.

하나 가장 유력한 해결책으로 꼽히는 서역 어딘가의 비약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비약인지 사술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최근 들어서만 몇번째인지 모르겠네요."

"사명심 투철한 놈들 뿐인지라 잡힐 즈음에 자살하니 뒤를 캐내기도 힘들고."

"이변이 일어나고 있단 건 틀림 없어보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날 회의는 성과 없이 끝이 났다.


"우웅... 언니?"

"그래그래, 언니 여기 있어."


낮잠에 들었던 천마가 눈을 떠서였다.

천마는 등에 업힌 채로 눈꺼풀을 비볐다.


"자네도 자넬세. 아직도 천마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가?"

"예?"

"대외적으로 천마님은 자네의 친척이라고 일러뒀네. 한데 그렇게 데면데면해서야 의심 받지 않겠나."


저 놈의 빡빡이, 돌아가는 상황이 안 좋다고 또 심성이 고약해졌구나.

대단치도 않은 일로 장로 녀석이 바가지를 긁었다.

일단 별채로 돌아왔다.

천마가 책이 어쩌고 쫑알거리긴 했는데 졸렵다.

바로 잠에 들 생각이다.



*



5월 24일


<뢰음사>


아침과 점심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이거여!"


저녁엔 천마가 책을 하나 내밀었다.


"어디서 난 거야."

"서재여. 며칠 저네 언니만 별체로 올라갓쓸 떼 너무 심시매서 혼자 가봣서요!"

"야 거길!!"


혼자서 가봤다는 말에 대뜸 큰 소리가 나왔다.

천마가 놀랐는지 몸을 쭈그렸다.

심호흡을 했다.


"거길 혼자 가면 어떡해. 나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지."

"그치만 언니 엄청엄청 안 오니까...."

"그래도 기다렸어야지."

"왜여...?"

"그야 혼자 다니면 언제 누가 자객이...!"


아, 아니지.

이 얘기는 하지 말자.

천마의 정신상태는 지금 어린 아이랬다.

제 목을 노리는 자객이 있단 말을 들으면 버티지 못하리라.


마음을 고치고 말을 가다듬었다.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까 그렇지."

"어째서여?"

"밖엔 위험한 사람들이 많아. 앞으론 나 꼭 기다려. 알았지?"

"내."


조용히 타이를 수도 있는 일이었거늘

괜히 언성을 높여 분위기만 어색해졌다.


하릴없이 바닥만 쳐다보다가 번뜩 깨달은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야! 혼자 가도 돼. 혼자 가! 막 가!"

"왜여? 위허만 거 아니에여?"

"위험... 위험 좀 할 수도 있지. 자립심도 키우고 그래야지!"


이 놈은 내가 죽이고 싶어 칼을 벼르던 녀석이 아닌가.

알아서 밖을 쏘다니다 죽는다면 내겐 기쁠 뿐이렸다.


"... 그래서 그 책이 어쨌다는 거야."

"아, 이게여. 내음... 래음... 래음시? 래음시란 데의 전설 같은 거라는 데여."

"뢰음사. 거기선 '사' 라고 읽어."

"아! 래음사!"


뢰음사라고.


"그래서 뢰음사 전설이라고?"

"정학하게눈 그 주변에 저내지는 신화래여."


뢰음사가 천축 부근에 있던가.

그럼 인도 신화인가.


"근데여 저기...."


천마가 몸을 배배 꼬았다.

얼씨구, 이제 천마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꼬마 계집인데그래.


"이따가 일거주시면 안 되여?"

"내가?"

"우웅...."


고요하게 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천마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덧붙였다.


"엄청 재미써서 막 마음이 푹신푹신해지는데...."


푹신푹신.

그 한마디에 어쩐지 흔들렸다.

동생 생각이 났다.

동생이 자주 쓰던 말이었는데.


사실 책 한번 읽어주는 게 유별나게 수고스러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엎드려서 읽자니 전생하며 생긴 이 지독히 큰 지방덩어리가 방해되긴 하지만.


"다음부턴 나 없을 때 몰래 안 나갈 거지?"

"내!"

"... 아아니, 잘못 말했다. 나 없을 때도 용기 내서 한번씩 밖으로 나갈 거지?"

"내!"

"내 얘기 끝까지 듣고 대답하는 거 맞지?"

"내."

"조금만이다."

"내!!"


인도 신화는 재밌었다.

묘하게 새롭기도 했고.


전생엔 만날 그리스 신화만 읽었고

현생엔 중국신화나 부분적으로 주워들은 수준이니 새롭긴 했다.


"... 그래서 그 영웅도 사실은 비슈누 신의 환생이었습니다. 뭐야 레퍼토리가 다 똑같네?"

"...."

"야 꼬맹이, 자냐?"


어느 틈엔가 녀석이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에 들었다.

이런 시대인지라 책이래도 어린 애들 읽기 좋은 그림책 같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녀석은 내 곁에 착 붙어서 재미 없는 낭독극을 듣다가 잠에 빠졌다.


"왜 달라붙고 난리야. 무거워 돌아가시겠네."


나는 어린 계집을 떼어놓고 일기를 쓰는 중이다.

졸음이 몰려온다.

나도 잘 시간이 된 거겠지.


돌이켜보니 이불이 다소 얇았다.

꼬맹이 녀석, 어딘가 추워보인다.

그래서 엉겨붙었던 건가?

... 나도 엉겨붙는 게 나을까.

괜한 생각이 많이 드는 밤이다.



*


틋챈 대회 출품작.
틋챈버전과 차이는 없음.

딱히 안 봐도 될 거 같긴 한데 이전편은 아래.
https://arca.live/b/tsfiction/66135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