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점은 통제를 벗어난 악동과 닮아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숙면을 방해하는 점도.


잠든사이 늦더위에 시달렸던 몸은 상당량의 수분을 밖으로 배출한 상태다.

그로인한 반동으로 찾아온 극심한 갈증.

곧바로 다시 잠들기엔 무리인듯 싶어 무거운 발을 움직여 거실로 향했다.


새벽녘의 조명을 받아 거실은 전등빛 없이 어느정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유리컵에 결명자차를 한가득 받아 식탁에 앉는다.

광고에서 나올법한 꿀꺽거리는 소리와함께 시원하게 들이켜 말라가던 목을 축여준다.


"캬-핫"


눈을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는 결명자차.

덕분인지 집안풍경의 작은변화가 시야안에 들어온다.


작은구멍.

그것은 식탁의 맞은편 벽과 바닥이만나는 지점에 생겨나 있었다.

분명 전날 잠들기 전까진 없었던 구멍.

쥐구멍 이라고 하기에는 꽤 작은크기.

개미의 소행이려나 싶지만 그러기에는 커다란 구멍.


"바퀴벌레도 구멍을 뚫던가"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좋은징조는 아니다.


선반에 구비해둔 벌레제거약 제트킬라 를 꺼내 주둥이의 빨대를 세워 구멍안쪽에 밀어넣는다.


"뭔진 모르겠지만 극락왕생해라"


의미없는 염불을 외며 1분여간 분사했다.

길게 쏴줬으니 어지간해선 죽던가 하겠지.


약간의 흡족함을 느끼며 식탁으로 돌아와 앉는다.

꽤나 신경을 쓴 탓인지 가벼운 피로가 몰려왔기에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한시간정도 흘렀을까

자연스럽게 눈이떠지며 보이는것은 약을뿌려놨던 구멍.

그 구멍앞으로 자그마한 무언가가 꼼지락 거리듯 움직이는것이 보였다.

벌레...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벌레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 였기에 자세히 보기위해 가까이 다가가 쭈그려 앉는다.

그러자 그것들은 놀란듯 구멍쪽으로 달아나려 했기에 유리컵을 덮어 사로잡았다.

유리컵 벽면에 달라붙어있는 그것들의 모습은 마치 사람과 닮아있었다.


"오...신기한걸"


소인이 실존하다니 동화에서나 나오는 생물일줄 알았건만

그들은 하나같이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기에 얼굴의 생김새까진 알 수 없었다.

이들과의 우호를 위해 엎드려 유리컵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인사를 건내보았다.


"안-녀엉?"


최대한의 상냥함을 담은 인사였으나 그들은 모두 움츠러 들었고 그중 한 녀석은 뒤로 넘어져 쓰고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샛노란 바가지머리와 앳되보이는 얼굴에 떠올라 있는것은 극심한 공포심.

중세시대 수도사 같은 복장의 녀석은 넘어진채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아핫핫! 겁이 많구나?"


격하게 고개를 가로젓던 녀석은 결국 입에 거품을 물며 기절해 버렸다.

남의 상냠함에 그런식으로 보답하다니.


"너무하네"


컵을 들어올려 기절한 녀석에서 손을뻗었다.

해코지가 아닌 녀석을 깨워서 오해를 풀기 위함이다.

하지만 다른소인이 쓰러진 녀석들을 어깨에 들쳐매고 모두들 구멍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고함을 질렀다.


"야 어디가!"


그러자 가장 뒤늦게 뛰어가던 두 녀석이 잠깐 주춤 하더니 그자리에 픽 하고 쓰러져 버렸다.


"얼라리?"


쓰려진 녀석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들여봐도 반응이 없었다.

딴녀석들은 이미 구멍쪽으로 달아나 고개만 내밀어 이쪽을 살피는 중이다.


"뭐야 죽은거야?"


고함소리 한방에 살인자가 되버린건가.

하지만 이놈들은 인간이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식탁위에서 티슈를 뽑아와 죽은녀석들 위에 덮었다.

그후 벌레를 잡듯 티슈째 방바닥을 닦아문질러 녀석들을 들어올렸다.


"그냥 놔두면 찝찝하잖아"


양손으로 티슈를 돌돌뭉쳐 동그랗게 만든 후 휴지통에 던져넣는다.

포물선을 그리며 기분좋에 한번에 쏘옥 들어가는 티슈뭉치.


"아 존나 미안하다?"


뒤늦게 다른 녀석들에게 사과했지만 이미 구멍너머로 사라진 후 였다.

3분여 남짓한 그들과의 첫만남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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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마법의 대륙 타이라니아.

대륙 북부에 위치한 재액의 숲은 최근까지 인간의 출입이 없던 곳이었다.

그러한 재액의 숲 경계부근에서 수풀사이를 헤치며 세사람이 뛰쳐나와 고꾸라졌다.


"쿨럭"


청년사제을 들쳐매고왔던 남성이 후드를 넘기며 외친다.


"대체 저건 뭐야!?"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듯한 목소리의 떨림이 전해지며 여성이 후드를 넘겨 대꾸했다.


"우리가 알아낸건 모르겠다 라는것 뿐이에요"


"희생자가 나왔다고!"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절망감을 맛보는것 외에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었나요?!"


일국의 기사로써 자존심이 구겨진 그녀는 절규하듯 내뱉었다.


"하...한가지 수확은 있었습니다."


"쟝!"


"꼬맹이!"


두사람이 고개를 돌려 응시한 곳에서 젖은바지의 사제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있었다.


"제이슨씨는 또 제 이름을 잊으신 건가요?"


"그런것보다 대체 무얼 알아낸거지?"


"하아..."


더이상의 설교는 포기한듯 사제는 자신이 알아낸것을 모두에게 말했다.


"기도주문을 쓸 수 없었다...?"


"네 사실 그, 겁을먹고 바지에... 아무튼 그때 마음의진정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만"


"통하질 않았다 이거로군?"


"예, 아예 발동조차 되질 않더군요. 아무래도 제 생각에 마나의 흐름자체가 이 세상과는 다른게 아닐까 합니다."


"밀리아도 그렇게 생각하나?"


제이슨의 물음에 기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풀죽어 대답했다.


"미안해요. 당시에 그런걸 확인할 겨를이 없어서... 그래도 쟝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의 마법이 무용지물인 세상이란 거로군요"


"이세계...인가"


"우선 귀환하도록 하겠습니다. 희생당한 두분의 염은 그 후에..."


쟝은 품속에서 말려진 종이를 한장 꺼내 펼치더니 세로로 길게 찢으며 외친다.


"귀환!"


강렬한 빛이 사그러듬과 함께 세명의 인영은 재액의 숲에서 모습을 감췄다. 



대륙 남부에 위치한 왕국 팔람스.

세사람이 귀환의 여신상앞에 모습을 나타낸것은 그들이 차원문너머로 사라진지 꼬박 사흘하고도 반나절이 흐른뒤였다.

두 세상의 시간마저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 이었다.

위원회에 회부된 그들을 기다리는것은 귀족들의 가혹한 질타.

그들의 상황설명 요구에 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무력함은 한낱 벌레와도 같았습니다."


왕국기사의 발언에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져간다.

제이슨이 잠시 한숨을 내뱉은 다음 말을 이었다.


"아마도...삼개월 전 대륙의 절반을 뒤덮은 죽음의 안개는 분명 그것의 소행이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되오."


일순 궁정안은 참가한 귀족들의 다양한 반응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 혼란의 구렁텅이 속에서 신성력이 담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여신 제레이야의 이름으로. 그녀의 종이며 육급신관인 쟝이 말씀올립니다."


쟝은 영겁의 시간과도 같았던 당시를 떠올린다.

여신을 받드는 자로써 숭고한 사명과 언젠가 여신에서 반납할 목숨 사이를 수도없이 저울질 했던 부끄러움을.

하지만 그 모든것을 뒤덮는 감정이 그의 얼굴에 떠오른다.

쟝은 짧게 일축했다.


"마왕"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마왕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휘감고 죽음을 내지르는 자 입니다."


"흐음..."


왕좌에 앉은 국왕이 내뱉는 낮은 신음소리에 장내 모든이의 시선이 모였다.

백발성성한 수염을 말라버린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국왕은 말을 꺼냈다.


국왕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귀를세워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마왕토벌을 위한 대 연합군 창설을 제안한다."


수십여년만에 귀족파와 국왕파의 의견일치.

귀족들은 너나할것없이 발빠르게 각국에 연락을 넣는다.

대부분의 왕국들이 참전의사를 밝히며 세상의 평화를 위한 연합군이 창설되었다.


반년 후


일부가 벌목되어 야영지로 변한 재액의숲에 연합군이 집결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