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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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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
Itaewon Stampede Accident

1. 개요2. 배경3. 타임라인
3.1. 사고 전3.2. 10월 29일3.3. 10월 30일
4. 여파5. 논란6. 둘러보기

1. 개요 [편집]

사회 채널 일동은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사회 채널은 이태원 참사에 의한 많은 사상자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또한 피해자들과 유가족들께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이태원 압사 사고란, 2022년 10월 29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에서 할로윈을 즐기려던 수많은 인파가 이태원 해밀턴 호텔 옆 골목으로 몰리면서 벌어진 압사 사고이다.

사망자만 최소 158명[기준]이며, 부상자만 200명 가까이 발생한 한국 역사상 최악의 압사 사고로, 1960년 1월 26일에 발생한 서울역 압사 사고를 아득히 뛰어넘는 피해 규모를 기록했다.

2. 배경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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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 직전 영상

우한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느 정도 완화되고 열린 첫 할로윈 축제니만큼 할로윈 축제로 유명했던 이태원에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했고, 특히 6호선 이태원역의 1번 출구와 가까운 해밀톤 호텔의 골목에 많은 인파가 몰리게 된다.

사고가 발생한 이태원 세계음식거리는 길이 325m, 폭 5~7m[2] 정도의 거리였는데, 이 좁은 거리에 들어갈 수 있는 최대 인원보다 약 7배(밀집도 12명/m²)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렸다.

특히나 주변의 노랫소리, 군중들의 소란스러운 말소리들이 겹쳐 전방과 후방의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되었고, 그저 앞으로 향할 뿐인 밀집 행렬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밀집도와 정체가 극심해져 통행이 불가능해지고 혼란이 가중됐다. 생존자 인터뷰에 따르면 사고 발생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전부터는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어 인파에 휩쓸려 다녔고, 3~40분 전부터는 인파 흐름이 완전히 정체되어 아예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길 한가운데에 30분 이상 갇혀 있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위해 바깥으로 점점 더 큰 압박을 주기 시작했고, 그 결과 비탈길 아래쪽으로 큰 힘이 쏠리며 군중이 무너지며 붕괴했다.

사상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해밀톤 호텔 옆 이태원로 173 인근 골목은 폭 4m, 길이 40m에 불과한 양쪽 끝에 턱이 있는 좁은 내리막길이다. 이 골목길은 번화가인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서 시작해 대로변인 이태원역 1번 출입구로 내려가는 통로였던 데다 이태원역 북부의 동선상 해밀톤호텔과 그 옆 골목, 이태원역 1번 출입구와 2번 출입구 등지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대거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해밀톤호텔 옆 골목 길 한쪽으로는 편의점, 술집, 옷가게, 힙합클럽 등 가게들이 있었으나 대다수 가게들이 영업이 끝나 문이 닫혀있었으며, 다른 한 쪽 벽은 해밀톤호텔의 외벽이었기에 피해가 더 커졌다. 거기다가 해당 골목 바닥 자재가 맨들맨들한 석재여서 원래부터 미끄러운데다가 전단지나 술 등의 액체류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더욱 미끄러웠다고 한다. 특히 사고 지점이 내리막이라 피해가 더 커졌다.

대통령 현장보고에 따르면, 피해자 300여 명의 대다수가 골목 중 바닥의 파이어라인으로부터 길이 5.7m, 폭 3.2m 공간에 몰려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은 겨우 넓이 18.24m², 5.5평 정도의 공간(밀집도 16.4명/m²)에 몰려있었던 것이다.

3. 타임라인 [편집]

3.1. 사고 전 [편집]


사고 전날인 10월 28일 저녁, 이태원 뒷골목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1 #2 #3

사고 구간에서 정체가 길어지자 일부 사람들이 앞 사람을 밀치고 이동해 사람들 간 언성이 높아지고, 몇몇은 인파에 떠밀려 넘어지기도 하는가 하면,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지는 등 사건 하루 전에도 사고 징후가 보여지고 있었다. #1, #2

굳이 언론보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파에 떠밀려 다친 사례나 서로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진 사례의 경우 목격담이나 영상, 사진이 넷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사고 당일인 10월 29일 오후부터, 통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 방향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인파로 현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위험을 감지했다. 사고 발생 3시간 40분 전인 18시 34분에 압사 언급을 하며 최초 신고가 접수되었으며, 사고 발생 직전까지 112 신고가 경찰이 공개한 것만 11건이 들어왔다. 신고 내용 모두 압사사고 우려였는데 경찰이 사건을 종결시켜버렸다. 심지어 관할 경찰서인 용산경찰서 이태원파출소가 사고지점 바로 건너편에 있었는데 결국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

특히, 첫 출동의 경우 경찰이 현장에 갔으나 군중에게 해산 요청만 하고 종결시켰다. 게다가 관할 경찰서인 용산경찰서가 상위 기관인 서울경찰청에 사전 및 당일에도 기동대 지원을 요청했으나 서울경찰청에서 묵살한 사실이 드러났다. #[3]
  자세한 내용은 이태원 압사 사고/논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2. 10월 29일 [편집]

3.3. 10월 30일 [편집]

4. 여파 [편집]


결과적으로 이번 참사로 인해 15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196명의 부상자[4]가 발생했다.[기준]

사고 발생 이후 인근 상가들은 안전을 위해 영업을 종료하고 손님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안내했다고 한다.

사고 발생 후부터 수습 전까지 이태원역 일대를 지나는 시내버스는 이태원로 녹사평역 ~ 한강진역 구간, 보광로 이태원역 ~ 청화아파트 구간 통제에 따라 우회운행한다. 현재 대사관로 ~ 한강진역 구간은 통제가 우선 해제되었고, 11월 1일부터 전 구간 통제가 해제되었다.

서울시는 인파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새벽 3시 50분부터 녹사평역~서울역 간 셔틀버스 2대를 운행하였으며 서울 지하철 6호선은 심야 임시편 운행 및 새벽 5시에 조기 운행을 시작했다.

정부는 참사 당일부터 11월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했다.

5. 논란 [편집]

6. 둘러보기 [편집]

[기준] 1.1 1.2 2022년 11월 14일 23시 YTN 보도 기사 기준 https://www.ytn.co.kr/_ln/0103_202211132357388476.[2] 15,000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 넓이였다.[3] 다만 사전에 용산경찰서의 공식적인 요청은 없었고 용산서가 구두로 요청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현재 사실 여부를 확인 중이다. 서울경제 기사[4] 경상: 165명, 중상: 3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