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말입니다, 오를레앙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기는 프랑스가 아니네. 적당히 마시게.“


“제 성격에 부르봉은 될수 없었겠지요. 오를레앙 정도만 되었어도, 지금 이모양은 아닐텐데요.”


199X년 G월 J일.


한 포차에서, 옛 고교의 제자를 만났다.

내가 아끼던 제자였다.


정치적인 것은 제쳐두고 보면, 참한 제자였다.

가난한 가정 환경에서도 좋은 대학까지 갈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렇다고 인품에 흠이 있는것도 아니었고, 나는 그가 꽤 마음에 들어서 고교 졸업 이후에도 나와 교류를 주고받았다.

그의 유일한 흠이라면, 자신의 의견이 너무나도 뚜렷했다는 점이었다.


고교 시절에 토론 활동을 할때부터 드러난 H군의 흠은, 대학 시절에 가서 H군의 발목을 치명적으로 잡았다.

그의 전공은 문헌정보학 이었다. 

책을 여러가지 읽었고, 따라서 자신의 뜻과 맞는 독서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 대학 동아리라는 것이, 겉에서 볼때는 그저 독서 동아리였다. 물론 무엇을 읽느냐가 중요했지만 말이다.

H군의 말에 따르면, 표지가 붉은, 작자 미상의 책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게 H군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었다. 한번 뿌리내린 마음은 그를 움직이게 했다.


거리로 나가 데모를 했다.

다른 동아리와 연합하고, 다른 이들과 연대했다.

그곳 내에서 감투도 썼었다고 한다. 

연합과 연대를 조종가능한 자리였다.

다른 감투들과도 만날수 있는 자리였다.


그것때문에 감옥도 여러번 갔다 왔다고 한다. 

출소 기념으로 한번 만나러 간적이 있는데, 피멍투성이인 그를 보고 걱정했었다. 그리 몸이 상해가고, 배를 굶으면서까지, 부모님 걱정시켜 가면서까지 시위를 할 필요가 있냐고 물었었다. 이제 그만 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었었다. H군 하나정도는 없어도 될것이라 했었다.

H군은 내가 아끼는, 아들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고통받는것이 편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걱정해 주는 나를 뿌리쳤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모두를 망친다고 했다.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개인 몇명은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마땅한 대꾸를 찾을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H군 같은 심지가 없는것이 부끄럽기만 했다.

민주화가 옳은걸, 나도 알고는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났다.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에 해가 솟아서, 쨍쨍했다.

그래,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민주화가 되었다.

난쟁이 같았던 H군의 부모님 두분은, H군이 감옥에 있는동안 아사와 과로사로 각각 돌아가셨다.

나는 그 두분의 상주 노릇을 대신 했다. 아들을 잘 부탁해달란 유언이 머릿속에 맴돌아 괴로웠다.


H군을 그 뒤에 만날수가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는 대의를 합법적으로 펼칠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응원했다. 고통만 받던 H군이, 이제는 보상을 받을줄 알았다.

H군과 같이 시위하던 사람들이 이제 곧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 아니었나. 직후에는 약간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났었지만, 다시 몇년이 더 지나면 H군도 그 밑에서 감투를 쓸것이라 생각했다. 



1996년. 나는 그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늘 그랬듯이, 

서울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었었다.

이곳저곳 화염병이 날아다녔고, 인위적인 안개가 피어올랐다. 

연세대학교는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H군은 다시한번 잡혀갔다.


나는 이해할수 없었다.

민주화는 되었다. 근데 왜 폭력시위를 했던것일까?

H군이 외쳤던 구호가 폭력을 쓸만큼 의미 있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H군을 만나보았지만, 이번에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신문의 말대로라면, H군은 민족해방파(NL)에 속했다고 한다. 

북한을 롤모델로 삼고, 마르크스를 신봉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그의 구호라면, 민주화 이후에도 그가 폭력시위를 한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정도로 H군이 멍청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정말로 북한을 신봉해서 그랬겠나. 착한 H군이, 심지 있는 H군이 저 위쪽의 혹부리우스를 진심으로 믿은걸까. 그럴리 없었다.


대략 1년동안. 그는 감옥에 있었다. 이번에 만난것은 그가 출소 한 뒤에 처음 술자리를 갖는 것이었다.



착잡했다.


내가 알던 H군은 확실히 아니었다.


첫째,

그는 정말로 김씨들을 믿고 있었다.

과거형이긴 했지만, 처음에는 정말로 믿었다고 한다.


둘째, 

고등학교때는 주먹한번 못쥐던 그가, 각목으로 사람을 팼다고 한다. 전경을 죽도록 패봤다고 한다.

전경 뿐만 아니라 아군도, 기강을 잡는다는 이유로 팼다고 한다. 이탈하려던 사람도 팼다고 한다.


셋째,

그는 지금까지 한게 후회된다고 했다. 

입장을 바꾸지 않고 심지가 굳건했던 그는, 어느새 무기력해졌다고 한다. 

그들을 진압한 사람들은, 몇년 전만 해도 자신들을 지원했던 사람들이었다.

이것때문에 오기가 생길법도 했지만, 오기가 빠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87년때와 달리, 인…대중들은 자신들을 손가락질 했다고 한다. 

모두가 잘사는 것을 중요시 했는데, 대다수가 자신들을 손가락질 했다고 한다.

1832년 파리 때처럼, 시민들은 진압군에게 환호를 질렀다고 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여겨서, 그는 윗선에 조금 더, 일반 대중들을 위해 보자고 말했지만, 맞았다.

그는 맞았다. 죽도록 맞았다.



“이제 뭐 하며 살겐가.”


“딱히 할일도 없어서, 막노동이나 할 생각입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진 않을거지만, 대학때 배운 내용도 다 잊어버려서 말입니다.“


“알겠네, 혹여나 너무 힘들면 내가 괜찮은 일자리 하나 정도는…“


”싫습니다.“


나는 할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위로를 해야할지, 비난을 해야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술자리는 끝났다. 

H군과 나는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몇 개월이 지난 후, H군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주변에 초록색 술병이 놓여있었다. 그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H군의 부모님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의 상주 노릇을 했다. 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화환으로 가득 차야할 복도에는 공기만이 있었다.


그를 화장하고, 부모와 같이 납골당에 묻었다.

사진속 그는 웃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