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city/1246525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휴전이 기정사실화된 1953년 6월,

중공군은 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기 위해

전선의 돌출부였던 '금성 돌출부'에 대한 대공세를 기획한다.


당해 6월 10일, 중공군은 예비대 포함 10개 사단, 34개 대대의 규모로 금성 돌출부에 공세를 펼쳤다.

당시 금성돌출부에는 미 9사단 1개 연대, 수도사단, 국군 2군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미 3사단이 예비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중공군의 춘계공세 이후 최대의 공세를 맞은 한국군은 분투했으나 절반 이상이 신병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수도고지-지형능선을 피탈당한 채로 금성돌출부 동부의 방어선을 내주고 4km 후방으로 후퇴했다.


그런데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 일어난다.

금성지구 전투는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이다.


7월, 중공군은 금성 일대에 개전 이래 최대의 공세를 펼치기로 작정한다.

중공군 24만명이 금성 돌출부 일대에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7월 13일, 중공군은 국군 전선에 대규모 공세를 퍼붓는다.

중공군은 아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침투, 연대지휘소를 급습하기도 했으며 수도사단의 부사단장을 포로로 잡기까지 한다.


이렇게 방어선이 뚫리자 미8군사령관 테일러 대장은 방어선을 금성천 남쪽으로 재조정했고,

국군은 14일부터 15일까지 금성천 이남 화천-금화 군계에 해당했던 적근산, 주파령, 흰바우산(백암산) 부근까지 후퇴한다.


그리고 국군 5사단, 8사단, 6사단 7연대는 일대 최대의 요충지 백암산을 사수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7월 14일, 8사단이 주파리-백암산 서부 방향으로, 5사단은 백암산-1051-876고지로 후퇴하여 적을 저지하고 있었다.


7월 15일, 2군단장 정일권은 손실이 컸던 3사단, 6사단을 예비부대로 전환, 5사단은 백암산 이남 고지군에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오후 6시 20분경 백암산과 1051고지를 피탈, 잔여병력들은 백암산 남단 수동령에서 수상리 남부 고지군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7월 16일, 중공군은 백암산을 점령한 후 더 움직이지 않고 진지공사를 시도했으며,

이 틈을 타서 새벽 6시 5사단 27연대가 백암산을, 35연대가 소백암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27연대는 지형의 불리함으로, 35연대는 적의 역습으로 공격에 실패하고 876고지마저 상실하는 암울한 상황이 되었다.


다음 날인 7월 17일, 7연대와 27연대가 백암산을, 35연대가 소백암산과 876고지를 공략했으나 저항이 거셌고,

5사단장은 백암산 공략부대에 백암산을 우회, 백암산 북부의 고지군 점령을 명령한다.

이에 27연대는 살구정을, 7연대는 1118고지와 962고지를 점령하였다.


7월 18일 아침, 백암산에 대한 항공 폭격이 끝나고 27연대 2대대는 백암산 탈환에 성공하였으며,

이후에 이어진 고지 탈환으로 5사단은 다시 금성천-북한강 이남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한편 7월 20일 밤, 금성 돌출부 서부의 425고지 방향으로 중공군 135사단의 일부가 진격했다.

425고지는 낮은 지형으로 방어하기 힘든 지형이었으나 8사단의 주 저항선이었고,

그들은 425고지를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에 국군 7사단 8연대의 1대대는 조명탄을 쏘는 한편 포병들에게 차단사격 지시를 내렸고, 적들을 패주시키게 된다.


4시간 뒤, 중공군은 또 진격해왔다. 이들은 고지 능선 사이 계곡으로 침투,

수류탄을 마구잡이로 던져가며 주 진지 바로 앞으로 접근해왔다.

이에 1중대장 김한준 대위는 화력을 협곡으로 집중, 난전을 펼치며 적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22일 자정, 중공군이 또 진격해오자 1대대장은 1중대와 2중대에 최후 저지사격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중공군은 고지 정상을 향해 기어올랐고, 새벽 5시경에서는 주 진지에서도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5시 30분경 중공군이 패주했고, 6시경에 고지를 재확보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국군에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으며, 결국 1개월 간 이어진 전투로 금성 돌출부가 사라졌다.

전 전선에서 평균 4km 이상을 후퇴, 192.6㎢의 영토를 피탈당했다.


그러나 화천 최고의 요충지인 화천댐을 피탈당하지는 않았으며,

7월 공세를 막아낸 뒤로는 금성천까지 진격하는 전과 역시 거두었다.


금성천까지 진격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삶에 터전은 사람 하나 없는 황무지가 되었을 것이다.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 말고개 정상부근에 있는 금성지구전투전적비.

이 전투로 국군 1,701명이 전사하고 7,548명이 부상당했으며

4,136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중공군은 27,216명이 전사하고 38,700명이 부상당했으며

아군은 금성천 남안과 화천 북부의 광주산맥 고지군을 사수하였다.


사변 70주기 D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