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군이 황해도로 들어왔다는 얘기를 듣고

원나라 때 강화도까지는 못 들어왔으니까

강화도로 들어가면 되겠지? 이러고

왕실은 강화도로 파천할 계획을 세움

먼저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강화도로 파천을 하고 인조는 마지막까지 한성에 남음

후금군이 한성 코 앞에 들이닥치니 인조도 강화도로 파천할 준비를 하는데

읭? 후금군이 이미 강화도를 포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옴

결국 인조는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보가 들려옴

유목민 주제에 배를 타고 강화도에 후금군이 너무나 쉽게 입성했다는 소식.

알고보니 만주족은 해전에도 능통한 민족이었지

결국 자신을 제외한 왕실 전원이 사로잡힌 상황에서

인조는 항복을 선택하고 삼전나루(지금의 석촌역 인근)에서 삼배구고두례를 올림


만약 인조도 강화도로 파천했더라면

삼전도의 굴욕이 아니라 제물포의 굴욕이 되었겠지

대청태종공덕비도 지금 북성동 어딘가에 세워졌겠고


후금군은 한성으로 들어가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지만 그래도 수뇌부는 유목민족 치고는 점잖아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용골대는 한성에 주둔한 군사들을 바로 한성 바깥으로 빼기도 했음

소현세자가 포로로 잡혀갈 때 인조가 예친왕에게

"제가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니 대왕께서 우리 세자를 잘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하니까 예친왕은 뻐기면서 "그래 내가 목숨만은 보전해주지" 이런게 아니라

"이미 세자께서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학식도 높으시니 오히려 제가 배울 것이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자식을 떠나보내는 인조를 안심시킴.


후금 역시 조선을 우대해서 청태종은 연회에서 인조를 자기 바로 옆에 앉히고 "조선의 왕은 나보다는 아래이나 우리 친왕들보다는 격이 높다."라고 하며 높여주고 심지어 전쟁이 끝나고 미군조차 일본에서 미군정을 실행하면서 몇 년간 일본을 감시했는데 후금은 전쟁 끝나자마자 인질들 데리고 바로 빠짐


여러모로 원나라와는 다른 후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