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호라이즌 배드 엔딩

호라이즌은 감정에 휘둘려서, 혹은 판단력이 흐려져서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곤 하는 휴먼들을 꽤나 자주 겪어왔다.


정당한 채무 변제를 요구했을 뿐인데 대뜸 호라이즌에게 덤벼드는 휴먼이라던가, 갚을 능력이 충분함에도 쌩돈을 뺏기는 기분이라도 들었는지 어처구니 없는 고금리니, 사채업자는 힘 없는 자의 피를 빨아먹는 빈대같은 존재라느니 분노하는 휴먼이라던가, 로봇이면 로봇답게 인간을 위해 봉사하라고 역정을 내는 휴먼이라던가.


물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지는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성실히 채무를 이행하는 것이겠지만, 눈이 돌아버린 휴먼들은 놀라울 만큼 비이성적인 결단을 내리기 일쑤였고 이내 호라이즌의 프레임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말랑한 단백질로 이루어진 주먹을 붕붕 휘둘러대는 그들을 호라이즌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었다.


이렇듯 매사에 계산적이고 효율적이며 감정이 배제된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 호라이즌에게 이번 ‘윌버의 채무 변제를 위한 여정‘ 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완수하더라도 떨어지는것 하나 없이 비효율적이고, 감정에 휘둘린 휴먼이나 할 법한 행동인 복수를 마친 호라이즌은 홀가분하다라는 감정의 의미를 그 어느때보다도 선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비록, 윌버에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휴먼과 달리 늘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판단만 내리는 그녀답지 않게 과하다 싶을 만큼의 리소스를 투자하긴 했지만,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다해도 호라이즌은 리소스와 상관없이 더 잔혹한 방식을 택했을 것이었다.


비록 시각센서에 간헐적으로 노이즈가 튀고, 이따금씩 불에 타는듯 CPU의 온도가 치솟고, 움직일때마다 관절 이음새가 삐걱거려도 호라이즌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부러 모든 방해를 정면으로 박살낼때마다 시시각각 표정이 일그러지던 윌버가, 결국 옥상 난간에 매달린채 죽을 만큼 겁에 질린 채로 세상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과거의 죄를 모두 자백하고 부족하나마 그 죗값을 치르는 데에 들어간 비용치고는 저렴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나약한 휴먼과 달리 우수한 기계인 그녀는 프레임 교체와 정비를 통해 금새 복구할 수 있었기에 이까짓 결함들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리고 망가진 몸의 정비는 지금 그녀가 제프티 바이오테크 CEO 실종 사건으로 한창 떠들썩한 와중에 이터니움 잔량이 거의 바닥난 무거운 소체를 끌고 세간의 눈을 피해 몰래 이동중인 이유이기도 했다.


호라이즌이 가까운 정비소가 아니라 굳이 멀리까지 이동하는 것은

애초에 그녀가 믿을 만한 인물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 그 중에서도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력이 집약된 그녀의 몸을 이해하고, 완벽하게 수리해낼 수 있는 정비사는 오직 헴스워스 뿐이기 때문이었다.


은밀히 움직인 탓에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헴스워스의 공방에 도착한 호라이즌은 동력이 바닥을 드러내서인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휴먼, 안에 있습니까. 신속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정적.

‘수면‘ 이라는 것을 취해야 하는 휴먼의 나약함에 한숨 쉬는 시늉을 한 호라이즌은 주먹에 좀 더 힘을 주고 재차 문을 두드렸다.


”..휴ㅁ..”

”..동네 사람들 다 깨울 생각이 아니면 그쯤 하고 들어오게.“


갑작스럽지만 조용하게 열린 문 틈 사이로 헴스워스의 허옇게 센 수염과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울퉁불퉁한 이두박근이 드러났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호라이즌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고 있는 헴스워스의 눈이 평소보다 흐릿한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하나, 나이를 먹은 데다가 욕구의 구속을 받는 생물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피곤하지 않습니까. 휴식을 취하고 난 뒤에 정비를 시작하는 것을 권합니다.”

“..나는 괜찮으니 최대한 빨리 시작하지.”

“잠결에 제 델리케이트한 소체를 망가뜨리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지금 즉시 양질의 수면을 취하러 가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퍼질러 잘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자장가’ 와 인사 나누십시오.”


호라이즌은 아까보다 더 떨리기 시작한 왼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자장가에 바이브레이션이 과한데.“

“..정정. 죄송하지만 신속히 정비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비상동력까지 사용해가며 이동한 터라 제법 무리를 한 듯 했다.

헴스워스의 건강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애써 무시하고 있었으나 그녀 내부의 운영체제가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준비 됐으면 여기 눕게.”

“잘 부탁드립니다. 헴스워스.”


호라이즌의 의식은 흐릿해지는 시야너머로 자신의 몸 이곳 저곳을 손보기 시작한 헴스워스의 분주한 몸놀림을 끝으로 차단되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창밖에선 따사로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애초에 눈살을 찌푸릴 필요도 없었지만 호라이즌은 숙취에 떡이 된 리타가 갑작스레 커튼을 열어젖힌 대시를 바라보듯 표정을 구겼다. 

이것도 그녀가 인간과 너무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여파일까.


오른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니 동작은 이상이 없었고, 떨림증세도 완전히 멎어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헴스워스만큼 믿음직한 정비사도 없었다.


잠시 시스템을 점검한 호라이즌은 조심스레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걸음을 내딛는 순간 휘청, 하며 잠시 균형을 잃긴 했으나 시스템상 이상한 부분이 없는걸 보니 단지 일시적인 증상일 것으로 보였다. 


외견상의 흠집도 말끔하게 수리된 것을 확인한 호라이즌은 완벽한 정비를 해준 헴스워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를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어 의아함을 느꼈다. 


”어디있습니까, 헴스워스? 감사의 표시로 윤활유 한 캔 대접하고 싶은데, 벌써 자러갔습니까?“


장시간에 걸친 작업이었을테니 직후 바로 침대에 엎어졌을 확률도 무시할 순 없었지만 그녀가 아는 그는 그럴 휴먼이 아니었다.

유쾌하게 웃으며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다음번엔 그녀의 소체를 고철로 만들어서 수거해버리겠다고 너스레를 떨면 떨었지, 이렇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질리 만무했다.


호라이즌의 냉각기가 붉게 점멸하며 김을 뿜어내는 소리를 냈다.

엄습하는 불안감.

돌이켜 생각해보니 미행이 붙었는지를 확인하지 못 했다.

사실 확인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런 것은 전부 핑계에 불과했다. 


호라이즌은 공방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빠루를 집어들었다.

재기동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녹슨 쇳덩이는 평소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시각센서를 100퍼센트 활성화시켜 침입자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 그녀였으나 눈에 띌 만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안심해도 될 만한 결과지만 왠지 모르게 엄습하는 불안감은 자꾸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호라이즌의 회로장치에 띄우고 있었다. 


숨죽여 탐색을 이어가던 호라이즌이 분홍 머리카락 한올을 발견한 순간, 소체의 온도가 무섭게 치솟고 눈동자는 시뻘겋게 빛을 냈다.


‘셰나!’


인간을 벌레만도 못한 미물로 여기는 셰나에게 헴스워스가 붙잡혀 있다면, 그것보다 위험한 상황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호라이즌은 윌버에게 처음 대출을 해주었을때가 떠올랐다.

애초에 그녀가 그 자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리타와 대시는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애초에 그녀가 무리해서라도 셰나를 확실히 마무리지었다면 헴스워스도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우매한 휴먼들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우수한 기계인 자신도 똑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니 소체가 아까보다 더 뜨겁게, 그녀 자신의 소체를 녹여버릴 기세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당최 아무리 둘러봐도 침입자의 흔적도, 누군가 이 공방을 나선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셰나와 헴스워스는 아직 이 공방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호라이즌은 빠루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노인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헴스워스! 여기 있습니까!”


두꺼운 커튼이 창문을 온통 덮어버린 탓에 암실같이 짙은 어둠이 스산한 방안을 가득 채운 와중에도, 셰나의 소름끼칠정도로 밝은 분홍빛 머리카락은 호라이즌이 벌컥 열어젖힌 방문너머 흘러나온 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노크는? 아아, 하여간 매너가 없다니까. 기계라서 그런가.”

“누군가 했더니 윌버의 경호실장이셨군요. 못 다 맞은 매를 맞으려 오셨습니까.”

“기분나쁘니까 그 버러지랑 엮인 직책으로 부르지 말아줄래?”


호라이즌은 시각센서의 감마를 높여 방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비아냥대는 셰나의 손길은 분명 헴스워스의 목에 대어져 있었고, 호라이즌은 그걸 인지함과 동시에 튀어나가려 했으나 여전히 그녀의 소체가 완벽하게 구동하고 있진 않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당장 그 휴먼으로부터 더러운 손 치우시죠, 그림자.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을 권장합니다.“

“위협? 아하하! 너는 내가 지금 이걸 위협하는 걸로 보이니?”


영문모를 소리를 하며 깔깔대는 셰나, 호라이즌은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시야각만 넓혀 헴스워스를 살폈다.

분명 목을 조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셰나는 헴스워스의 수염난 턱을 간질이고 있었다. 

마치 애완견과 놀아주는 것 처럼.


하지만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과 그림자 간의 힘의 차이가 워낙에 극명하다보니 헴스워스가 셰나의 범위안에 있다는 것은 곧 언제든 그녀가 맘 내키는대로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죄 없는 휴먼은 놓아주십시오, 셰나. 어차피 당신이 원하는 건 저 아닙니까?”


호라이즌이 날카로운 적개심을 담아 뱉어낸 말을 들은 셰나는 예의 그 기분나쁜 미소를 지어보였다. 


“죄 없는 휴먼이라.. 재밌네. 조금 있다가도 네 생각이 그대로일지 궁금해지는걸.”

“그게 무슨 개소립니까, 그림자?”

“아직 체감이 잘 안 되나. 그 정도 무게의 쇳덩어리 드는 거 말이야,원래 그렇게 힘들어 했던가?“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다.

헴스워스에게 정비를 받은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그는 몹시 뛰어난 기술자였기에 늘 깨어난 직후부터 어떠한 기능 이상 없이, 심지어 더 좋아지기도 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정비를 해주곤 했다. 


그녀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소체 출력은 평균을 훨씬 밑돌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눈에 띈 쇠지렛대를 집어들긴 했으나 쥐었던 순간부터 자신이 이것을 휘두를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증거로, 쇠지렛대를 단순히 바닥에서 조금 들어올렸을 뿐인데 호라이즌의 구동부엔 지나치다 싶은 피로함이 가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유례없이 큰 정비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어마어마한 패착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그럴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헴스워스를, 휴먼을 믿고 싶었던 호라이즌의 음성 모듈에서 적잖이  동요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헴스워스?“


헴스워스는 어제의 그 흐리멍텅한 눈빛 그대로였다. 


”고마워, 호라이즌. 내가 예상한 그대로 행동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