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돌개바람이 푸른 솔잎을 하나하나 휘감는 설백의 계절.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공터에서, 팔다리를 휘적이며 이리저리 바람에 휘둘리는 듯한 노인이 있었다.


"...흐음.."


그와 반대로, 용천혈이 눈밭을 채 짓누르기도 전에 땅이 움푹 파일만큼 깊은 걸음걸이를 가진 사내가 있었다.


열양공熱陽功의 공능이 아니었다. 세계에 제 존재감을 깊이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념이 자연스레 풀려나온 것이었다.


등골이 시려울 정도로 쌩-하니 불어오는 바람에도 장무후壯繆后(관우)마냥 짙게 늘어뜨린 수염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신의 터럭 따위가 전부 세파에 흔들리지 않았다.


독단獨斷의 화신이었다.


"본좌는."


휘적휘적 팔다리를 바람따라 내치는 노인을 향한 말이었다.


"검황劍皇이자 도제刀帝이고, 권왕拳王이며 각군脚君이요. 끝으로..."


"......"


사내의 시선이 유순한 호선을 그리는 낡은 도포의 소맷자락에 맺혔다.


"..무후武后라 하오."


칭호를 더해갈 때마다 숨막힐 정도로 짙어지는 발경력. 끝에 이르러서는 그의 주변으로 융단이 깔리고 황포黃袍가 둘러진 듯 했다.


"..허허.. 황제이자 군왕이고, 제후인 무부武夫라... 역적이 찾아오셨군 그래."


 여전히 태평하게 원을 그리는 노인의 손끝은, 그저 바람을 타고 휘둘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도 당당한 의념이라...산 속에서 목검이나 무뎌지게 깎은 노인네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일대의, 산 전체의 자연지기가 노인을 중심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거대한 태극太極을 그리는 바람줄기와 그 위를 타고 흩날리는 눈송이 한 점 한 점이 모두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사내를 배척하지 않는 것이, 허허로운 노인의 성격을 방증했다.


 "..고명한 삼봉태극권三丰太極拳을 위시한, 태극무맥을 견식하고자 무당武當을 올랐소."


"정기신 합일이라면, 전신 세맥에 여유를 좀 주면 될 일이라오."


"...천안통天眼通?"


 아무렇지 않게 툭-내뱉는 한 마디에 미염美髥 몇가닥이 흔들렸다.


 사내에겐 불가의 육신통을 주워섬길만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박귀진이 허투르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대의 내공호흡 또한 이 산의 자연지기라오."


 휘돌며 태극의 그림을 한 번 완결짓듯 허공을 짚는 손끝에, 오랫동안 답답하리만치 꽉꽉 들어차있던 중단전의 공력이 풀려나왔다.


 후웅-! 거세게 날리는 수염이 공력조각을 얽어 반짝였다. 외부의 일수에 쉴새없이 전신을 주천하던 공력이 끄집어내진 것이다.


 그 덕에 가득히 들어찬 기혈 때문에 어긋나기 직전이었던 정기신의 절묘한 균형이 들어맞은 것 역시 사내가 느낀 경악의 일부였다.


 "...대라선이 와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였거늘."


 강호 모든 의원을 뒤적이고, 심지어 정난의 변 당시에 술잔을 나눈 황제가 소개시켜준 어의마저 손 쓸 방도가 없던 일이었다. 그 모든 공력을 축적한 본인도 손 쓸 방도가 없던 문제였을진대, 하물며 타인에게 논할 일이었겠는가.


 "천하 모든 영약을 집어먹었으니...쯧쯧..패도覇道의 끝은 언제나 영락이었소."


 과도해진 축기량 전체가 패도진기였던 탓에 기혈이 쇠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렇다고 이미 넓어질대로 넓어진 단전의 크기는 단 반각의 운기만으로 그득히 들어차기 일쑤였다. 여유 없이 쫒기는 듯한 축기 속도였다.


 조금의 공력이 빠져나와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만으로 사내의 몸가짐은 한 층 더 자연스러워졌다.


"..전대의 무신武神께 가르침을 청하오."


 포권과 함께 눈발이 사라진다. 고인高人에 대한 예우로써 반박귀진으로 품고있던 공력을 맹수의 포효마냥 맹렬히 팔방으로 뻗친 탓이었다.


 "허허..원시안진元始安鎭...."


 나지막히 떨어지는 도호. 승낙이었다.


 츠캉-!!! 일순 허공에 튀기는 불꽃, 뭉뚝한 목검과 천하보검이 맞부딪혔음에도 튀기는 발경력이 동일했다.


 무후武后의 신형이 명멸했다가 후방, 좌측방, 천령개天靈蓋 바로 위 등에서 나타났다. 극도의 쾌검. 어검御劍의 묘리로 띄워둔 보도珤刀로 중重과 패覇를 품은 도초刀招를 떨구면서였다.


  참황광멸인斬荒廣滅刃-이중삼묘三重三妙


  말 그대로 2개의 병기로 세 가지 묘리를 떨치는 초식. 잔영盞影 중 하나는 허초였다.


 "..힘이 잔뜩 들어갔소."


 카앙-!! 그그그극—


 보도와 보검의 극점을 목검이 막아내는 찰나에 산바람이 불었다.


 "북풍음도北風陰道."


 후우웅-!


 절묘히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지점에 파고드는 바람결. 날붙이를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그극-그그그극--채앵!


 그대로 검면을 타고 흘려내지는 무후의 병기들. 강기가 부딪혀 사방이로 튀기는 불똥에 오만하리만치 화려한 비단장포의 끝단이 그을렸다.


 만고불변할 것만 같았던 현세대의 제일인이 휘청거리며 사 보 가량 물러났다. 단 일수에 검에서 검으로 전해진 내가중수법 탓이었다. 몇번이고 진탕된 기혈이 억지로 공력을 토해내며 미풍을 날렸다.


무당산 전체가 노인의 손아귀에 있기에 그랬다. 무후조차 첫 수의 교환 후에야 알아차렸을 만큼 지극한 이치로 다가오는 장악력이었다.


 "다른 의미로 자연체自然體.."


 지금도 느릿하게 호선을 그리며 다가오는 손바닥이 희끗하게 흐려지는 듯 했다. 완연히 자연지기와 동화된 신위神位. 요정妖精 따위가 현신現身한 것도 같았다.


 "...흐랴압-!!"


 젊을 적 남궁씨의 검신劍神을 꺾을 때 이후로 질러보지 않은 기합이 사위를 울렸다. 쌍수에 검권劍拳이, 이기어도以氣御刀로 칭해야 할 보도와 겹쳐오는 각법脚法이 모두 단 하나의 수법에 내쳐졌다.


 차례차례 펼쳐낼 여유도 없는 것마냥 우악스레 발경력을 꽂아넣음에도 항거불능의 위압감이 있었다.


 [내가..천하제일天下第一...]


 우웅- 공기를 통째로 울리는 의념이 새어나왔다. 한 사람의 생生을 그대로 그려내는 절기絶技의 전조였다.


 [북로北虜의 달자達子들을 씹어먹으면서도...]


 권격拳擊에 피비린내가.


 [폐제廢帝의 어림군의 골통을 가르면서도..]


 검인劍刃에 살기가.


 [무림강호를 독보패도獨步覇道 하면서도...!!]


 각법에는 고적孤寂함이.


 [..어릴적의 번왕藩王을 잊지 못했다..!!]


 도초에 처절한 분노가 담겼다. 의념이 색조로 강기를 물들여 암울한 4색이 번뜩였다.


 일순간 노인의 뇌리에 스쳐지나가는 장면 하나. 아궁이가 쪼개지는 것과 겹쳐지는 중년여인이 끌려나가는 환상. 그 뒤 어렴풋이 보이는 금수金繡 금포錦袍의 귀인貴人.


 '천한 것.. 왕부王符의  시녀로 데려가는 것도 영광이니라!'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더냐!!!]


 공월무共越武-겁천혈劫天血


 콰아앙--!!! 우르르릉--!!


 수십 장의 크기만큼 자라나, 하늘마저 겁박할 것 같은 발경 폭풍이 몰아쳤다. 굉음이 울리는게 산골짜기가 온통 부서지는 듯 싶었다.


 [태사太師의 위位를 지닌 도사..!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살기를 줄기줄기 흘리는 안광이 초라한 도포자락에 가 닿았다.


 [그대는....!!!  .....뭐하는 거지?]


 의아함과 경악이 혼재한 의념의 울림.


 [무공은 함흉含胸과 발배拔背를 기본으로 한다.]


 흐느적거리는 손길에 발경력이 뻗어나가지 못하고 뭉친다. 번쩍거리는 광채가 무후의 공월무에서 비롯한 것임을 나타냈다.


 [양팔은 아무렇게나 늘어뜨려 자연의 결 속에 맡겨두고...양발은 적당히 짚어 가장 자연스럽게 한다.]


 완벽한 구형球形. 어느하나 모난 곳이 없는게, 역천逆天이면서도 이상理上이었다.


 [마음 속엔 '융통무애融通無碍' 네 글자를 되내인다.]


 [.......... ...."


 살기마저, 전의마저 빨아들이는 듯 한 유권柔拳. 무채색의 발경력이 노인의 손 위에 있는 구체로 흡수될 때마다 그것은 점점 작아졌다.


 [팔다리는 심제心齊하여 무아지경에 비견되게 하라.]


 둥글게 원을 그려낸 후 호선을 그 속에 그려내는 기파氣波. 어느새 콩알만해진 구체를 멀거니 보고있던 무후의 머릿속에 창공에서 보는 산세가 그려지는것만 같았다.


 [아침에 천주봉天柱峰에서 뛰어노는 제자를 볼 때는 모친母親의 손길과 같게 하고.]


 천주봉에 걸린 구름은 양동陽動 안의 음정陰靜이.


 [점심에 산채山菜를 집어먹을 때는 이파리 하나 상하지 않게 가볍게 놀리고.]


 산 아래 검풍劍風으로 밭을 갈아대는 무당도武當道들은 음정 속의 양동이.


 [저녁놀에 취해 산 끄트머리에 앉아있을 때는 꿈결같이 휘적인다.]


 부드러이 서西에서 동東으로 물결이 원호圓弧에 닿아 완결짓는다.


 [그저 맘가는대로 움직여라. 태극太極은 지극히 무애無碍함이라.]


 ..후우웅-


 고요한 적막 속에 동풍冬風이 끼어들었다. 세차게 수염을 날리며 서로를 마주보는 두 무인武人이 있었다.


원래부터 누더기였던 도포와, 넝마가 되어버린 금포錦袍가 똑같이 나부끼는 산골. 


 정기신이 들어맞는 묘한 감각이 더 젊은 무인의 전신을 꿰뚫었고, 아집이라는 평생의 심마가 심제心齊하는 화톳불에 멍-하니 사라지는 순간에.


 두사람은 만연히 들어찬 미소와 함께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태극이 완연히 그려진 눈밭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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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결말장면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와요..


비무대회 마지막날 기념겸 해서 써봤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