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수도이잔 계획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제국 수도를 이전하려는 계획의 후보지 중 하나가 된 적이 있다.

이유는 대동아공영권에 따라 일본 본토와 한반도, 만주국을 전체적으로 볼 때 용인이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입지 조건이 좋으며, 일본 본토 자체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지라 이왕 힘 있을 때 입지 좋은 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관동 대지진으로 크게 데인 직후였다. 결과적으로 측량까지는 마쳐 곧 천도까지 가능한 상태였으나 각계각층의 반대에 부딪쳤고, 나중에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당연히 백지화되었다.

"중앙계획 소안요강안"으로 알려진 이 계획은 극비리에 이루어진 일본의 국토 계획 중 하나로, 수도 이전 뿐만이 아니라 철도, 고속도로, 공업지구 등에 대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도 이전의 후보지는 후쿠오카, 오카야마, 경성 교외(모현 관청마을) 세 곳이었는데, 이 중 후쿠오카와 오카야마는 일본 본토 안에 있어 제국을 확장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일제의 수도이전계획의 주목적이 제국의 중심지이면서 교통이 편리한 곳에 천도하여 대동아공영권을 실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세 후보지 중에서는 만주-한반도-동남아-일본으로 이어지는 일본 제국의 중심인 용인 쪽이 개연성이 높았다. 이 계획에는 조선인 수백만 명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 일본인을 채워넣는 인구 배정 계획이 포함되어 있는데, 만일 이 계획이 추진되었다면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상상 이상의 탄압이 병행되었을 것이다.

몰론 중앙계획소안이 만들어진 1943년에는 일본의 패배와 제국 해체가 가시화 되어 있었으므로, 영원히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반시설은 이미 건설되었고 사용중이므로 용인시가 발전되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