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기에 관심이 많은 "자타공인 중증 밀덕후"다. 내가 무기에서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은 다름 아닌 성능이다. 총은 얼마나 신뢰성이 높고, 잘 맞는지, 항공기는 얼마나 멀리, 빨리 많은 무장을 싣고 날 수 있는지, 레이다에 얼마나 작게 잡히는지, 전차는 얼마나 공방 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지, 등등 화려한 성능은 내 이목을 끌기 충분하다. 

하지만, 실제 군과 국방부는 세계 어딜 가나 성능만으로 무기를 고르지 않는다. 그들에겐 성능이나 디자인 말고도 고려해야 할 것이 매우 많다. 군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인지, 현장에서 직접 운용해본 장병들의 반응은 어떤지, 가성비는 어떤지 등등 이들은 하나의 공통점에서 출발한다. 바로 "실전 성능". 밀덕들은 카탈로그 스펙만을 보고 열광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무리 성능이 높아도 치명적인 단점 몇개로 떨어질 수도 있고 성능이 겉으론 시원치 않아 보여도, 현장의 반응이 매우 좋고 만족도가 높으면 채용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은 수많은 고성능 전차로 무장하고 구소련 에게 덤볐지만, 그런 구소련을 구한 것은 육중한 IS 전차도, KV 전차도 아닌 작고 볼품 없어 보이던 T-34였다. 30-06 스프링 필드나 7.62mm 나토 같은 대구경 고위력 탄환을 선호하고, 그런 총에 익숙했던 대전기 직후의 미군은 5.56mm AR-15를 보고는 볼품 없는 어린 아이 장난감 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M-14가 자동 사격시 명중률도 낮고 반동이 심해 맞추기가 매우 어려운 총이라는 악평이 나오며 대신 투입 된 AR-15는 병사들 에겐 반동 적고 잘 맞는, 가뭄에 내린 단비 같은 총이었다. 세계 최초로 G11이 출시 되었을 때, 모두들 이 세상 총이 아니라며 최첨단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열광했다. 하지만 G11이 목표로 했던 ACR 프로젝트는 비용 과다를 이유로 엎어졌고, G11은 냉전 종식 이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게 되었다. 너무 비싸고, 비효율적이며 구조도 지나칠 만큼 복잡해 제대로 굴릴 만한 물건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언론과 방산업체들은 항상 무기가 나올 때 마다 "명품" 이라는 말을 수식어 처럼 단다. 국방부와 군, 업체들이 은연중에 카탈로그 스펙에 목을 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 나왔을 때 그렇게 명품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던 K11은 돌이킬 수 없는 흑역사가 되었다. 광학장비를 보편화 해서 효율적이고 저렴하게 화력을 올릴 수 있었음에도, 국방부는 현장에서 K11이 폭발하고, 쓰기 불편하고, 안정적인 무기가 아님에도 초중전차와 같은 비현실적인 무기에 매달리던 독일 국방군 처럼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단순히 근사한 카탈로그 스펙만 갖고 K11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K11에 한없이 시간과 돈을 낭비한 결과, K11은 온갖 크고 작은 결함만 터뜨리며 사업엔 별 다른 진척 하나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존의 열악한 보병 장구류가 개선된 것도 아니었다. 일부 전문가들이 미국이 이미 실전 테스트를 해서 아무 쓸 모 없다고 한 무기라 그만 포기하고 미군 처럼 광학장비 보급 등의 장구류 개선으로 베트남전 수준에서 탈피해야 한다 했지만, 국방부와 육군엔 소 귀에 경 읽기 였다. 

결국, 무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서야 K11을 포기하고 워리어 플랫폼 사업을 통해 월남전기에 머무르던 보병 장구류를 광학 장비, 피카티니 레일, 신형 전투복 등으로 개선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늦었지만, 이젠 우리도 카탈로그 스펙에만 목을 메기 보단 실전 성능을 신경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