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스텔스기 하나가 있다. 얼핏 보면 마지 웃는 것 같기도 한 재미있는 얼굴로 인터넷 상에서 매우 유명해진 전투기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제작사의 아주 짧은 생각으로 인해 완전히 미래가 망가져 버린 희대의 불우함을 타고 난 희망고문의 아이콘인 오늘의 주인공, 바로 X-32 되시겠다.

00년대의 미군은 머지않아 다가올 세대 교체로 인한 대격변을 준비중이었다. 냉전 시기 동안 미군 고정익 전투기와 공격기의 주축을 담당했던 F-16 파이팅 팔콘, F/A-18A/B/C/D 호넷, A-10A 썬더볼트 II, AV-8D 해리어 II등의 항공 전력들이 21세기에 들어 대폭 퇴역할 예정이었고, 이로 인한 커다란 전력 공백을 단일 기본 설계로 메워 줘야 할 신형 3군 통합형 다목적 전투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지상 공격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F-22A 랩터를 보조할 미들급 5세대 스텔스 전투기를 뽑는 사업에 록히드 마틴 외에도 한 회사가 더 입찰에 응한다.


바로 보잉사였다. 경영난으로 부침에 빠져 있던 맥도널 더글라스 사를 합병하며 록히드 마틴과 함께 미국 항공업계의 양대 산맥으로 떠올랐던 보잉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 JSF 사업에서 최대한 혁신적인 방법으로 설계한 항공기로 이제까지 써 오던 대체 대상이던 항공기에서 문제가 되어오던 부분을 해결하려던 록히드 마틴과는 달리 탈냉전 기조라 미군이 고가의 첨단 장비에 많이 투자하기 꺼려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최대한 저렴한 가격으로 생산성이 높은 스텔스기 X-32를 제작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보잉은 최대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수단을 총동원해 저렴하면서도 록히드 마틴의 안과 거의 동등한 성능을 내는, 가성비 높은 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선 주익 설계 부터 비범했는데 일반적인 항공기 처럼 주익을 동체 양쪽에 붙이는 구조 대신 주익 일체 성형 기술을 응용해 전익기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가오리 모양의 주익을 제작하고 그 아래에 동체를 조립해 붙이는 식으로 21세기에 제트 전투기의 동체를 2차 대전기 미군 전투기 마냥 간단히 붕어빵 처럼 찍어낼 수 있는 미칠듯한 간단함을 자랑했다.


동체 내부도 간단하긴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스텔스기는 레이다 전파가 터보팬 엔진의 흡기 팬에 맞고 반사되어 정면 RCS를 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동체 내부 깊숙히 엔진을 설치하고 흡기구 역시 일반적인 일직선형이 아닌 S자로 꼬아 놓는데, 이게 구조적인 복잡함과 제작과 설계의 난이도를 높히는 건 물론, 그에 따른 가격 상승까지 일으키는 탓에 스텔스기의 높은 가격의 원인이기 까지 했다. 이 문제를 보잉은 그냥 흡기 팬이 정면에 노출된 간단한 일직선형 흡기구에 레이다 블로커를 장착해 흡기 팬이 레이다 상으로 "가려지는" 효과를 만들어 내며 정면 RCS를 경쟁작인 X-35와 비슷한 수준까지 억제하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보잉은 이 전에 영국에서 해병대 용으로 사 와 면허 생산 했던 해리어 II 에서 얻은 간단한 구조의 단일 엔진 수직 이착륙 기술을 그대로 적용하고 이걸 간단한 추가 부품 장착이라는 개조만으로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X-35 팀이 A,B,C 이렇게 세가지 변형을 따로 설계하고 복잡한 리프트 팬 시스템을 실증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못 쓰게 된 Yak-141 프리스타일 까지 사 오는 등 늘어지는 일정으로 동분서주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을 때 X-32 팀은 부품만 갈아 끼워도 함재기, 해병대용 VTOL기, 공군용 CTOL기로 변신하는 단일 기종의 설계를 다 끝마치고 실증기도 먼저 완성해서 띄우는 데에도 성공했고, 출발을 잘 해냈다. 이제 의기양양해진 X-32 팀에게 남은 일은 착함과 수직이착륙과 같은 앞으로 남은 테스트들도 잘 해내어 탈냉전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신무기 도입 사업에서 그간 F-117과 F-22로 승승장구 하던 록히드 마틴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해군 측에서 함재기 ROC 에서 착함 속도를 제한하고 귀환 탑재 무장량을 9000lbs로 변경 하면서 일이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변경 전의 ROC를 반영하며 일찍 만들어 낸 보잉 측의 시제기가 오히려 독이 된 반면, 록히드 마틴 측은 아직 설계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다시 변경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져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결국, 이미 보잉측은 다 제작된 시제기를 그대로 제출하고 중량 감소와 수평 미익 장착이라는 보완 설계안을 따로 제출해야 했으나 이는 기체 형상 설계가 달라지는 문제였고, 결국 좋은 출발이 무색하게 보잉 팀은 의도치 않게 패널티를 받게 된다. 그래도 아직 평가가 몇 부문 더 남아 있으니 희망은 있었던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런 건 없었다. 이번엔 해리어의 기술을 응용해 단순히 부품만 갈아 끼우면서 VTOL기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화근이 되었다. 기존 해리어는 연소 가스를 내뿜는 노즐이 뒤에 2개, 연소실을 거치지 않은 찬 공기를 뿜어 배기 가스가 흡기구로 들어가는 걸(사람으로 치자면 머리에 비닐 봉지를 씌우는 격) 막는 에어 커튼 노즐 (수평 비행시엔 실추력도 담당한다) 2개가 있는데 이런 구조로 인해 초음속 비행이 불가능했다. X-32도 이런 구조를 응용해서 STOVL/VTOL시 후방의 메인 노즐을 막거나 살짝만 열고 별도로 장착한 전용 노즐과 전방 제트스크린 노즐로 떠오르는 식이었던 탓에 초음속 비행이 불가능한 건 물론, 엔진의 과열 문제 까지 불거졌고 이걸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고 전면에 덮개를 추가하기도 했지만, 그러면 기능적으로 제약이 생겨나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설계 변경 이슈가 이쪽에서도 터졌는데 X-32의 실기는 VTOL/STOVL시 흡기구의 위치 까지 바뀔 예정이었고, 이 정도의 변경은 상당한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양쪽에 하나씩, 총 2개가 나 있는 무장창도 중앙에 대용량으로 하나가 있는 X-35보다 작아서 F-22A 대신 2000lbs JDAM 같은 걸 투하하며 CAS를 해 줘야 할 기체로썬 너무 부족했고, 직선형 흡기구에 레이다 블로커를 조합한 결과는 진화하는 카운터 스텔스 기술에 대응하기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공중 급유 테스트 도중 프로브에 급유용 드로그가 제대로 꽂히질 않는 바람에 연료가 누출되는 사태 까지 벌어지는 등 사고를 치는 동안 록마 팀의 X-35는 수직으로 이륙해 초음속 비행으로 워싱턴 D.C.의 공군 수뇌부 눈 앞 까지 왕복하며 신기술의 우월함을 과시하며 강력한 인상을 심어준다. 결국 신기술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과거보다 더 낫다는 걸 입증하는데 성공한 X-35가 선택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었고, 옛 기술을 재활용한 X-32 역시 그대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탈냉전과 군축만 믿고 옛 기술을 그대로 쓸 것이라 크게 오판한 보잉은 이 대규모 사업에서 패배한 채 예전에 팔던 F-15, F/A-18E/F등의 4세대 전투기들을 X-32를 개발하며 얻은 레이다 블로커 같이 가성비 높은 RCS 저감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노하우를 활용해 F-15SE, F-15EX 이글 II, F/A-18E/F 어드밴스드 수퍼 호넷 같은 4.5세대 세미 스텔스기로 개량하며 해외에 팔아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상당수의 국가들이 형편이 있으면 F-35를, 조금 돈이 모자라면 프랑스제 라팔이나 스웨덴제 JAS-39E/F 그리펜, F-16V 같은 걸 선택하다 보니 생각 외로 실적도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은 게 현실이다. 물론, 인도와 이스라엘에 각각 어드밴스드 수퍼 호넷과 이글 II를 제안하고 있기는 하지만, JSF 사업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이 사업에서 선정되는 걸 보잉 기술의 성공이라 한다면 이건 X-32를 두번 죽이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편, X-32가 공개 된 지 21년이 지난 후, 러시아에선 X-32를 똑 닮은 형상의 전투기인 Su-75 샤흐 이 마트가 공개되며 넷 상에서 잠깐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물론 수호이가 비교적 디자인을 멋지게 뽑기는 해서 X-32 와는 달리 웃는 전투기라는 유머로써의 요소로 활용된 적은 거의 없다. X-32의 흡기구 디자인을 보고 미 공군 수뇌부는 "멋진 비행기가 날기도 잘 난다"며 흉측한 모양새라며 악평하고 "개구리"라고 불러대다 탈락했다는 소식에 다들 뛸 듯이 기뻐한 것을 보면 러시아 항공우주군 수뇌부는 생각이 조금 다른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러우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에 가해진 제재 때문에 샤흐 이 마트도 미래가 어두운 걸 보면, 이건 X-32가 내리는 저주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