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 천완공단 사태

장주 천완에서 천완공단 노동자 무단대량 해고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에대해 해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시위에 돌입했으나 사측 용역은 경찰이 보는앞에서 노동자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에 시위대도 용역에게 맞서자 그제서야 가만히 보고있던 경찰이 진압을 빌미로 노동자 시위대를 용역을 도와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해산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12.10 천완공단 사태입니다.


해가 흘러 새해가 밝았음에도 강경진압에 대한 항의를 하는 비폭력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군중은 나날이 늘어났습니다. 일단 당국은 두고보자는 입장이었으나 시위대가 줄어들기는 커녕 가면갈수록 늘어나고 있었고 점차 차별철폐와 독립요구까지 구호로 등장하자 당국은 강제 해산시키기로 결정합니다.


피의 수요일사건(천완 3.10사건)

강제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군중이 해산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경찰의 제1 저지선을 돌파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의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듯한 형국이 되자 경찰은 제2저지선이 뚫리자마자 무차별발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평화시위는 폭동으로 바뀌어가면서 시위 과격화로 인해서 해당지역에 계엄령발령과 동시에 공수특전대가 진압군으로 투입되었고 결국  매천군부의 잔혹한 진압으로 인해서 벌어진 이른바 피의 수요일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정작 사태를 악화시킨 군부는 관련자들에게 솜방방이 처벌이나 무죄를 주어 의령측여론은 물론 매천국 일부국민들 뿐만아니라 국제여론까지 악화시켰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연방협약체결이후 군부에서 군사법권이 분리됩니다.


천완5인조 혹은 장원영그룹의 창설

한편 천완의 피의 수요일사건에 피해를 입은 의령인 4인과 1명의 매천인은 천완의 5인조라 불리는 저항조직을 결성합니다.(사법당국은 천완 5인조라 불렀고 언론과 외신에선 장원영 그룹이라 불렀습니다)


그 인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리더: 장원영-본명은 월영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월영(매천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짓는이름)인데 매천인임이 부끄러워서 원영으로 개명, 언론인 출신으로 군부와 정부의 협박에 반발하면서 피의수요일 사태를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퇴직후 군부와 군부가 배후인 극우파의 위협에 결국 망명대신 저항운동에 합류, 홍일점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생존한 인원. 얼굴마담이자 저항조직의 스피커역할.

리더: 완안 염-천완대학 정치학과 시간강사 출신, 한밤중에 집에 난입한 진압군에게 아버지가 끌려갔다가 결국 시체로 돌아왔음에도 관련자들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자신은 보상은 커녕 군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명예훼손죄로 피소되었다가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갈 처지가 되자 살기위해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안면이 있던 장원영이 합류하자 자신은 리더직을 장원영에게 양보하였다. 장원영 부재시 리더역할이자 실질적 리더.

부관겸 행정총책: 장후 휘-천완시청 하급공무원 출신, 애인이 진압군에게 저항하다 자기가 보는앞에서 무참하게 총검에찔려 살해당했고  자신은 들고있던 살기좋은 우리나라: 매천국 시정백서(2081페이지)로 진압군인 머리를 깨부수고 구사일생으로 탈출. 저항조직의 행정전반을 담당했다.

전략가겸 자금관리: 완안 중달-본명은 완안 충, 의령계 소왕국 왕족의 후예로 명문가의 자손이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유복한 집안출신. 일할필요가 없음에도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근무했었으며 매천군에서 장교로 복무(소령출신)하였을 정도로 애국자였으나  의사였던 아내가 거리에서 시민들을 치료하다가 진압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군부와 정부에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보상금을 지불한 극소수의 의령인) 하자 막대한 자금력과 연줄을 가지고 저항운동에 투신한다. 전략전술에도 능했다고 한다.

현장지휘관: 진사 명-의령인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당시 계급은 중사였다. 진압군으로 피의 수요일사건에 종군하다 상부의 발포명령을 거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가 내외언론의 압박에 못이겨 군부가 그를 불명예 제대시키는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한다. 이후 저항운동에 투신하였고 현장지휘관으로 활약하였으나 그룹 일원중 제일먼저 사망했다.

 -출처: 의령자치정부편찬 '의령민족투쟁사: 우리는 어떻게 투쟁하였는가' 에서 발췌


진안문사태(진안문 47항쟁)

세월은 흘러  7주기 추모제가 성경(구 천경,의령국 마지막 수도)에서 성경제국대학(현 천경연방대학)학생들 주도로 옜 의령국의 왕궁인 춘금성 정문인 진안문앞 진안문 광장에서 개최되었고 이는 곧 의령인에대한 차별철폐를 요구하는 비폭력 가두 시위로 발전하였으며 대학생외에도 많은 성경시민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엔 당국은 피의수요일 사건때문에 국제여론의 질타를 받았으므로 어떻게든 평화시위로 끝맺음지으려고 노력했으나 누가 먼저 공격해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나 결국 폭력사태로 번졌습니다.


이에 매천정부는 또다시 계엄령을 발령하고 이번엔 공수부대에 이어 기갑부대와 육군항공대와 공군까지 동원하여 유혈사태를 일으키는데 이를 진안문사태 (진안문 47항쟁)라고 부릅니다.


 이에 호응하여 그동안 평화적인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가들마저 과격폭력노선으로 선회하고 자치론에 회의를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과격폭력투쟁과 무장독립운동이 큰 인기를 얻게됩니다. 


의령민주민족해방전선(UDNLF, 혹은 ULA:의령해방군)의 창설

이에 과격독립운동단체라 하여 그다지 인기도 없고 세도 적었던 성완 5인조가 주축이되어 의령민주민족해방전선(UDNLF, 혹은 ULA:의령해방군)이 창설됩니다.


 임시 군사정부겸 무장독립운동 세력으로서 ULA는 70~80년대 중반까지 많은 전적을 이루었는데 굵직한것만 해도 황족2명에게 암살을 시도하고 전직총리를 납치, 살해하였습니다. 


황족 1명은 권총을 사용하여 지근거리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로 그쳐 실패했으나 영구적인 장애를 입혀 불구로 만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의 황족은 결국 일가족과 함께 폭사시켰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황제(현인황제의 할아버지)가 얼마못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사망하자 일부 의령인들은 '일타 쌍피를 이루었다. ''아무도 성공못시킨 황제(간접)살해에 성공했다'며 국상기간에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어서 전직 총리를 사로잡고 조직원 석방을 요구하며 정부를 협박했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살해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