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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토눌라가 문둠비케라타스라는 칭호를 자기 자신에게 붙인 지 사흘이 지나고, 에밀란투카들도 하사품을 받고 물러났다. 리두두의 백성들이 다시 뒷정리를 하는 동안, 베르토눌라는 연회를 너무 즐겨서 어지러운 머리를 가볍게 하기 위해 동굴 한켠에 피운 화로를 지긋이 바라보며 쉬고 있었다. 그 덕에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의 권능이 낙원의 여왕 앞에 미칠 수 있었고, 그 주변에서 불을 쬐던 모든 이가 여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베르토눌라여! 베르토눌라여!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기겁하였으나, 베르토눌라만은 정신을 보존하고 대답하였다.


"베르토눌라는 여기 있습니다. 화로의 수호자여, 말씀하십시오."


그것을 들은 헤스티아가 말을 이었다.


"베르토눌라여. 당신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 줄을 나는 압니다. 그러나 당신은 신께서 부여하신 거룩한 사명을 내팽개치고, 이미 지배자가 따로 있는 하늘을 두고 그 정리하는 자를 자처하니 당장 타르타로스로 끌려가도 변호해 줄 이가 없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그 죄를 가볍게 하려거든 올림포스에서 무릎을 꿇고 백 일을 빌고, 계시를 받아 백 가지 과업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베르토눌라는 이에 응수했다.


"올림포스는 나를 두고 변방의 마굿간에 처박혀도 싼 자로 여길 땐 언제고, 무엇 때문에 생각을 바꾸어 백일 동안 무릎을 꿇고 버틴 뒤에 백 가지 과업을 행할 영웅으로 여기게 되었단 말입니까? 아무리 신이라 해도 태도가 그렇게 순식간에 바뀌면 누구라도 쉬이 믿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화로에서 계시가 들려왔다.


"당신의 뜻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신의 뜻을 가벼이 여긴 것은 신들이 먼저 당신을 가볍게 여긴 탓이니, 서로 잘못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 앞서 말했던 과업은 없던 것으로 하고, 관직을 원하신다면 테살리아의 필마오네보다 더 좋은 것을 내리겠습니다. 당신도 신들의 우행(愚行)을 없던 것으로 해 주십시오."


세상의 모든 따뜻한 것을 다스리는 이가 먼저 자세를 낮게 하니, 베르토눌라도 불쾌함을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또한 양쪽 무릎을 꿇고 그에게 용서를 발었다.


"저는 본디 영원한 삶에 집착하여 숙명을 거스르고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한 죄인인데, 이런 저를 벌하기는커녕 직무를 주신 신들께서 어찌 우행을 하였다고 하십니까? 그 끝없는 자비하심에 그저 탄복하고 경외할 따름입니다. 그저 용서하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는 다시 올림포스에서 내린 직무를 수행하기로 하였다. 헤스티아의 불꽃이 리두두의 한켠에 있던 작은 화로에서 튀어나와 동굴 밖으로 나가니, 베르토눌라도 그를 따라 날아갔다. 오래지 않아 그 불꽃이 멈추었는데, 그곳엔 풍성한 딤랑 산의 숲조차도 초라하게 느껴지도록 만들 정도로 울창한 숲이 있었다. 그 숲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으로 보일 정도로 높게 자란 나무들이 무성했고, 각 나무에는 수없이 많은 황금색 열매가 열여 있었다. 베르토눌라는 감탄하며 위를 바라보다, 제 시선 아래에서 누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러자 님프들이 먼지떨이와 물뿌리개 따위를 들고 나무들을 돌보는 것이 보였다.


"당신이 이 보물과 우리를 보호해 줄 분이시군요."


베르토눌라는 헤스티아의 불꽃으로부터 자신이 이 황금사과밭을 신의 힘을 노리는 괴한들의 손아귀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황금사과는 우주를 이루는 원소와 시공과 작용에 대해 권위를 지닌 이의 음식으로, 입에 댄 이가 관장하는 것을 흥기(興氣)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지닌 과일이다. 그 때문에 각지의 왕과 현자와 대상인들도 그것을 탐하여 자신이 먹고 그 다스리는 것을 융성케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함부로 신의 것을 취하지 못하도록 누군가 황금사과밭을 지켜야 했는데, 웬만한 짐승이나 잡졸들은 님프들이 처리할 수 있었지만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이 오면 막을 도리가 없었기에 이때 베르토눌라를 부른 것이다.


"과연 이는 신들이 베르토눌라의 힘을 알아주었기에 내린 직무이다!"


베르토눌라는 이렇게 외치고 맡은 일에 임하였다. 과연 그 전에는 숨어서 님프들을 흘겨보던 맹수나 도적들이 베르토눌라의 기운을 느끼자 기척도 남기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 이에 신들도 전과 달리 그를 신뢰하여 제물을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고, 베르토눌라 또한 이에 응하여 리두두의 양식을 주거나 일꾼들을 빌려 주며 몇몇 신들과 우애를 다졌다.


그러나 이것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면, 이 순례의 이야기는 다른 여러 흥미로운 전설에 밀려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못하였으리라. 


베르토눌라는 여느 때와 같이 숲을 둘러보며 몰래 침입한 도적이나 짐승이나 새가 귀중한 황금사과를 따고 있지 않을까 살피고 있었다. 이는 로마의 광활한 통치권을 둘러보는 드높고 성스러운 대리석 탑에 흔히 오현제라 불리며 추앙받는 이들이, 그 중에서도 저질스런 변덕쟁이이자 백 년 뒤를 볼 줄 아는 현자인 하드리아누스가 군림하던 때였다. 그가 숲의 중심에서 약간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다른 큰 나무들에 둘러싸여 눈에 잘 띄지 않는 나무에 다가가니, 황금사과 하나가 다 익지도 못한 상태에서 바닥에 떨어진 채 물러 터지려 하는 것이 보였다. 님프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여 줍지 않은 것이었다.


무른 나무열매란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벌레들이 파먹고 똥을 싸 기름진 땅을 만들고, 그 안에 있는 씨앗이 땅에 묻혀 새로운 나무가 되어 자라는 법이다. 그러나 황금사과는 수정과 성장을 전담하는 님프들처럼 허락받은 이가 아니면 벌레조차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신의 영역에서 자라므로 그럴 일이 없었고, 떨어진 열매는 따로 모아서는 끓여서 죽처럼 만든 뒤 식혀 대지에 바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베르토눌라는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불경한 뜻을 품고 말았다.


"옛 생각이 나는구나. 내 백성들이 문명을 접하지 못하고 짐승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 적엔 이런 썩지 않고 물러터지기만 한 과일이 먹으면 쓴맛이 나지만 왠지 기분이 좋아지던 귀한 별미였는데, 내가 로마에 갔다 오고 나서야 그게 과실주란 되려는 발효된 열매란 것을 깨달았지. 크기가 작은 걸 보니 완전히 익기도 전에 떨어진 것 같은데, 이런 황금사과도 발효가 되어 과실주가 되려나?"


베르토눌라는 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열매를 감히 입에 대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연 귀한 열매였던지라 덜 익고 물렀는데도 식감이 기분 나쁘게 물컹거리지 않고 과일즙으로 만든 묵처럼 부드럽고 말랑했으며, 맛 또한 꿀에 절인 듯 달콤했다. 약간 쓴물이 나와 양쪽 볼살 아래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고급주를 들이키는 느낌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오래도록 입 속에서 굴리고 목구멍 아래로 과즙을 흘려보내니, 자신이 리두두와 딤랑 산 낙원의 여왕 풀크라무타이자 하늘을 정리하는 성녀 문둠비케라타스임이 새삼 자랑스러웠다.


베르토눌라는 자신이 여왕이자 성녀임이 너무나도 기뻤다.


베르토눌라는 자신을 드높이는 강인한 몸을 뽐내고 싶었다.


베르토눌라는 자신과 같은 이가 앞으로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곧 베르토눌라의 마음은 교만과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본디 황금사과는 맛본 이로 하여금 그의 권위와 그 치하에 있는 것들을 북돋아 주지만, 온전히 익지 못한 것을 먹으면 정신이 여물지 못한 아이인 채 권위를 언은 자와 같이 변하여 제 힘만 믿는 난폭한 자가 되고 그 백성들도 타락하며, 썩어가는 것을 먹으면 머리가 잘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무능해지고 백성들 또한 만사에 무감각해지니, 신들조차도 적당히 익은 것이 아니면 결코 손조차 대지 않았다. 그러니 덜 익고 발효하는 것을 먹은 베르토눌라의 정신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아니, 이보시오! 당신 그걸 먹은 건 아니겠지요!?"


님프 하나가 뒤늦게 그를 발견해 소리쳤으나, 이미 베르토눌라의 정신은 광기에 휩싸여 혼미해졌다. 그 힘을 잘 알던 님프는 즉시 올림포스에 보고하러 뛰어나갔지만 베르토눌라가 더 빨리 천상으로 이동하여 그 행동이 별 의미가 없었다. 미쳐버린 여자가 하늘로 향한 것은 그의 광기가 더 이상 차오를 수 없을 만큼 차서 자신의 칭호대로 하늘을 다스려야 한다는 망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베르토눌라는 주신들의 회당에 도착하였다. 신들이 아직 정무를 보고 있었기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회당 한가운데에는 요정들이 화려하게 장식한 넓은 식탁에 귀하고 맛난 음식들을 차려 놓았고 그 주변에도 또 다른 요정들이 구름을 뭉쳐 안락한 의자를 만들어 두었었다. 그날이 마침 헤라의 생일을 맞아 전에 열린 것보다 더 성대한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자 베르토눌라의 마음 속에서 들끓던 탐욕의 독기가 식욕 쪽에 다다라 그의 내장이 끝없는 굶주림을 호소했고, 결국 베르토눌라는 식탁 위에 있던 모든 음식들을 분화구에 내던지듯이 자기 입속에 털어넣었으니, 그 음식들이 신의 음식이었던 만큼 먹은 이의 몸이 더욱 굳건해졌다.


베르토눌라는 식탁 위에 그릇과 부스러기만이 남고 본래 있던 음식들이 내장 안에서 소화되어 황금사과의 독기를 융화해 버린 뒤에야 겨우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화려했던 연회 개최지는 지진이라도 겪은 듯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베르토눌라는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쳐 버렸는데, 그 와중에 부하들 나누어 주겠다고 다 못 마셨던 술동이를 챙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