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증 채널

잔다르크에 대한 의문은 아주 상식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라가 궁극의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어린 소녀를 왕자에게 데려가는 수비대장과 듣보잡 10대에게 냉큼 군권을 내주는 왕자!

등장부터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기록된 바와 같이 놀라운 전과를 세운다는 것에 이르면 기가 찰 노릇이다.

군대라는 조직이 어떤 조직인가?

텃세 강하기로는 소문났고, 실전경험이 하루도 없는 햇병아리가 지휘한다고 말을 들어처먹을 집단도 아니며, 전투라는 게 애들 소꼽장난이 아니라는 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글을 읽는 이 중에 단 하루라도 군 경험이 있는 이라면 절감할 것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설탕만을 가지고 폭탄을 만들 수도 있으며, 집에서 굴러다니는 세제들만을 가지고도 독가스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교육받지 않아도 간단한 조작법만 알면 쉬운 일입니다. 그것이 콜럼부스의 달걀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내자면 잔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프랑스가 이길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의 계시 따위는 애시당초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잔느의 상식을 초월한 군사적 삽질에서도 프랑스가 승리했던 것입니다.

  

하긴 보통의 설탕이 갑자기 폭탄이 되지도 않고, 세제가 처음부터 독가스인 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1429년 로랭출신의 한 양치기 소녀가 시뇽의 국왕군 수비대에 나타난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변화의 기점이기는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주 노란 피부에 살집이 좋고 힘있게 생긴(예쁜 소녀라고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기록에 따르면 잔다르크는 여자 '장비'같은 생김이었다고 합니다) 17세 소녀가 천사들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국왕군 수비대장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구한 시점의 그것은 현재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것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후세에 그것은 뻘짓으로 보이는 마땅하고, 수비대장 보꿀루가 그녀를 왕태자(아직 왕이 아니었고 나아가 패태자된 상태였다)에게 그를 인도하는 과정 역시 납득하기 힘든 일입니다.

  

허나 역사에 신의 가호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역사는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죠.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계시를 받았다는 잔느도 납득이 안가지만 그를 왕태자에게 인도한 수비대장이나 그녀를 만나고 병사를 빌려준 왕태자도, 모두 상식적으로 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아실 겁니다.

허나 그것은 단일한 사건만을 떼어내 역사를 보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관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한 일이 발생하고 가능하게 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위해서는 잔느의 출현이전의 역사를 되집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잔다르크의 출현 백년 전인 1328년까지 거슬러야 알 수 있는 것들이죠.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르 4세가 사망한 시점에는 왕에게는 자식도 형제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선왕은 후계자를 지목하지도 못한 상태였죠.
이 시점에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필립 4세의 손자이며, 프랑스 공주 이사벨라의 아들인 영국왕 에드워드 3세.
두번째는 잔느 드 나바르의 남편이며 루이 10세의 사위가 되는 필립 데브루
세번째는 필립 3세의 손자인 필립 드 발로아
였습니다.
  
그 중에서 에드워드가 가장 카폐왕조의 혈통을 많이 받은 상태였고, 필립 데브루가 가장 프랑스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삼부회(삼부회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고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니)는 단순히 프랑스 땅에서 태어났다는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로 혈족상으로 가장 멀고 아무런 힘도 없으며, 결정적으로 성격도 나태하기 짝이 없는 필립 드 발로아에게 왕위를 넘겨줍니다.
 
 이것이 발로아 왕조의 창건이자, 이후 유명해지는 백년 전쟁의 시발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백년 전쟁은 왕위 계승권을 가진 영국왕 에드워드의 야심에서 출발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죠.
단순한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닌 경제적으로 영국의 런던시티(영국의 상업지구)의 상인들이 이것을 절실히 요구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에서 가장 주요한 산업 중에 하나가 양모 산업이었으며, 이 양모를 수입하고 있던 지역이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영국의 속셈은 단순히 플랑드르 지방만이 아닌 프랑스의 또다른 주요 산업 지대인 포도주의 보르도도 원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죠.
특히 플랑드르 지역의 모직물 산업에 종사하는 프랑스 국민들 역시 경제적 이유 때문에 친영주의자 였다는 점이 문제였던 것입니다.(당시 플랑드르의 영주인 루이 드 네베르는 국왕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플랑드르 지방의 사람들은 그 중요성 때문에 프랑스의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었고, 스스로도 교황에게 프랑스왕에게 반항할 경우 2백만 플로닝(1플로닝=6실링)에 이르는 막대한 벌금을 물기로 서약한 판이라 쉽게 영국쪽으로 돌아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벌금을 물지 않고 자신들의 이권을 찾을 방법을 찾아냈으니, 그것이 바로 영국왕으로 하여금 프랑스왕의 왕관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프랑스왕에게 반항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개인적인 영토욕과 양국의 상인 세력의 지원을 받는 에드워드가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전쟁 시작 전에 제일 먼저 한 것은 자신을 영국과 프랑스의 왕으로 지칭한 것은 두말한 나위가 없습니다.
실제로 그에게는 새로이 왕이 된 필립6세보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권리가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프랑스는 두 명의 왕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프랑스의 국민과 귀족들 역시 그 두 명의 왕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 초기의 상황은 결코 에드워드의 착실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영국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영국왕은 전쟁을 위해 오랜 기간 시민들에게 대궁의 지참과 훈련을 권장하고 실제 전쟁 바로 직전에는 프랑스의 또다른 적인 신성 로마 제국을 회유하기 위해서 막대한 뇌물(금은 보석, 그리고 여자)을 헌납했죠.
그러나 제해권을 확실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에드워드의 계산과는 달리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격퇴한 것은 초반 몇 번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은 스페인을 끌어들인 프랑스 해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영국왕은 프랑스에 충분한 병력을 보낼 수 없게 됩니다.
 
하긴 아무리 상인 세력이 도와준다고 해도 뇌물로 엄청난 자금을 소모한 터라 전비가 부족한 탓도 있었죠.
 
그 결과 전쟁 초반 영국군의 주요 목표는 약탈에 있었고, 서부 프랑스는 일부 영국왕에게 충성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약탈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충분한 전쟁 준비를 한 영국군에 대해서 프랑스의 귀족군은 패배를 거듭했으나, 영국은 적은 병력 때문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수 없었고, 영국왕 에드워드 역시 전투에서는 승리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에 이릅니다.
 
그 결과가 1차 휴전입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귀엔느, 포아투리고르, 리투장 지역을 확보했죠.
 
그 후 브로타뉴 조약을 통해서 휴전을 이끌어낸 샤를르는 왕이 되어 샤를르 5세가 되었고, 그는 정략 결혼을 통해서 프랑스의 전력을 향상시키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뛰어난 왕이라도 실수는 있는 법.
샤를르는 그의 동생 필립에게 광대한 부르고뉴 지방을 왕자령으로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플랑드르 백작령(앞에서 말했던 플랑드르 지방의 영주가 통치하는 지역)의 상속권을 가진 공주와 결혼시킴으로 프랑스 동부와 북부 국경지대에 또 다른 강대한 세력권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뭐 샤를르 5세의 판단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플랑드르백작의 영애를 왕제(王弟)필립과 결혼시키지 않으면, 에드워드가 청혼할 것이고, 그로인해서 플랑드르 지방이 영국령에 포함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수가 있다면 새로이 플랑드르와 브르고뉴의 영주가 된 동생 필립이 야심을 가지고 자신을 적대하게 되리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이죠.
덤으로 이 브르고뉴공이 홀란드(현재의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윗델스바하家와 결혼을 통해서 그 힘을 증대시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프랑스는 프랑스왕가령과 브르고뉴공령, 그리고 영국왕령으로 나뉜 상태에서 전쟁은 제 2라운드를 맞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불운은 그것만이 아니었죠.
영민한 왕이었던 샤를르 5세가 사망했을 때, 새로이 왕이 된 샤를르 6세는 단 12세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너무 막중한 책임과 혈통적인 나태함, 그리고 그의 왕비이던 방종한 이사보 덕분에 약간 정신이 이상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광기왕 샤를르 6세가 집권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 와중에 왕비인 이사보의 방종함은 도를 지나치고 있었고, 새로이 필립에 이어 브르고뉴공이 된 장이 그의 종형인 오를레앙공을 살해함으로써 브르고뉴공과 오를레앙파로 프랑스의 귀족 세력이 나뉘고 실제적인 내란에 돌입합니다.
그 와중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왕은 이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죠.
 
프랑스의 상황이 이 모양이 되자 새로이 영국왕이 된 헨리 5세는 다시금 아버지의 혈통을 거론하며,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걸어왔고, 그것이 제 2차 전쟁의 시발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2차 전쟁의 시작이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을 통해서 프랑스 귀족 연합군의 완패로 끝나게 되자 전쟁은 프랑스의 압도적 불리 속에서 진행되기에 이릅니다.(당시 프랑스군 사망자 수만 1만명이라고 하니...)
 
이 상황에서 브로고뉴파는 오랜 시가전 끝에 파리를 장악하게 되고, 샤를르 6세의 황태자는 이 일로 파리에서 도망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파리 장악 이후 더 이상의 영국의 진출을 우려하던 브르고뉴공 장이 샤를르 6세와 황태자에게 협상을 요구했는데, 그 운명적인 1419년에 황태자의 친구인 따느귀 드 샤델에 의해서 브로고뉴공 장이 몽트로 단상에서 살해됨으로써, 파리와 브르고뉴파는 왕가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영국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다르마니사가 프랑소아1세에게 구멍뚫린 장의 두개골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영국이 프랑스에 처들어올 수 있었던 구멍이었다고 말했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죠.
 
거기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1420년 체결한 트로야 조약에서 확실한 브로고뉴파로 돌아선 이사보 왕비가 정신병자인 왕을 협박해서 공주인 카트리느를 헨리 5세에게 주고, 그를 프랑스의 섭정이자 후계자로 결정하게 만듦으로써 프랑스는 사실상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됩니다.
  
왕태자는 페위되어 무일푼으로 쫓겨나서 겨우 연명하는 처지에 빠졌죠.
  
하지만 영국의 확실한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 백년 전쟁은 프랑스의 광기왕 샤를르 6세와 영국왕 헨리 5세가 3개월 간격으로 사망하자 또 다시 소강상태를 보입니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영국측에선 겨우 생후 6개월째인 헨리 6세를 가지게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서품조차 받지 못한 폐태자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 없이 전쟁을 할 수 없으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친왕보다도 왕비인 이사보가 프랑스를 말아먹는데 가장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탓에 당시에 '프랑스를 망친 것도 여자요. 구할 것도 여자'라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한 게 발단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가십거리 소문에 불과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싶어했고, 그 점에서 수비대장이나 부르제왕(폐태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잔느의 등장이 가능했던 이유치고 좀 길었군요.
하지만 잔느가 등장 이후의 승리한 이유 역시 짧지는 않습니다.
잔다르크가 신의 계시나 혹은 진짜 장비같은 놀라운 무공 실력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프랑스가 이길 수 밖에 없는 절대 원인이 존재한다는 걸 설명해야 하니까요.
사람들은 약간이라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관론으로 흐르는 습성을 지닙니다. 조금만 뒤로 물러나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해결책이 있음에도 그게 쉽게 되지 않죠.
기껏해야 목까지 뿐이 차지 않는 개울물에서도 사람이 빠져죽는 원인과 같습니다.
그 당시 누구도 보지 못하고 있던 (심지어는 잔다르크도 모르고 있던) 승리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걸 위해서 앞에서 길게 잔느 출현이전의 역사를 되집은 것이기도 합니다.
 
첫째,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영국도 오랜전쟁으로 막대한 전비 부담을 안고 있었으며, 도버 해협을 통한 병력 증원이 쉽지 않았다는 점.
물론 프랑스도 전쟁을 치루고 있지만, 전역에서 원정군이 수비군의 몇 배에 이르는 부담을 안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당시 이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영국군만을 가지고 프랑스를 완전 복속시키기에는 영국군 자체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둘째, 영국에 가담한 브르고뉴파가 영국의 움직임에 그다지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
오를레앙파와의 귀족 내전 통에 국왕파와 척을 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왕가의 일원으로써 프랑스에 대한 자의식만은 가지고 있었던 부르고뉴파는 영국과 협조는 했지만, 결코 영국에 복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언제라도 이윤만 된다면 영국왕을 배신하는 것도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부르고뉴가 프랑스북부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방 영주에 불과하다는 점은 병력의 양과 질의 한계를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셋째, 영국군의 프랑스 잠식이 배후 동조 세력이었던 합스부르크의 반감을 산점.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원래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그 덕에 영국왕의 로비가 초반에는 충실히 작용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을 통해서 프랑스를 혼내주는 선까지만 합스부르크의 임계점이었습니다.
만약 영국이 프랑스를 완전 복속하고 신성로마제국과 접경하게 된다면 제국의 안전에 충분한 위협이 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고 전쟁 후반 영국 지원에서 손을 떼는 원인이 됩니다.
 
넷째, 영국-브르고뉴 연합군이 당초의 예상 외로 너무 많이 승리했다는 점.
뭐 승리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만 그것이 수세나 경합세로 전환되었을 때, 제한된 병력으로 넓은 수비범위를 방어해야 한다는 불이익으로 고스란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의 이유 그리고 배후 지원이 사라지는 세번째 이유가 네번째 원인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죠.
 
다섯째, 선왕의 유산이 충분히 남아있었다는 점.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고 했습니다.
헌데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대륙 2강으로 자리매김한 프랑스가 샤를르 5세때까지만 해도 충실한 방어체계와 병력을 구비하고 있었던 프랑스가 샤를르 6세의 단 1대의 삽질로 초토화될만큼 허접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앞서의 일화에서 보듯이 프랑스는 수세에 몰려있는 상태에서도 후방에 유휴병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수세인 탓에 후방 방어 병력이 밀집도가 높았고, 나아가 동부전선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압박이 줄어들자 이들 병력의 활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여섯째, 프랑스 국민들이 패태자 세력에게 감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는 우리나라만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프랑크 제국 아래로 미흡하나마 통일왕조의 기틀을 오랜동안 유지한 국가입니다. 비록 귀족 세력의 내전을 빌미로 분열되었으나 그것이 영국의 프랑스 복속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프랑스국민의 대다수는 프랑스 국왕의 편이었다는 점입니다.(훗날 파리나 소르본느 대학 세력이 국왕파로 돌아서는 계기)
 
이러한 다수의 원인이 있었음에도 프랑스가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은 이것들 하나하나는 폭발력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모으는 비등점 이상의 열기가 제공되었을 때 엄청난 위력을 내게 되는 것이죠.
 
 
이제와 잔느의 전공을 보자면 두 차례의 승리뿐입니다.
오를레앙진격과 랭스의 승리뿐이죠.
이것 역시 냉철하게 말하자면 패태자 세력이 지리멸렬했다고 자만했던 영국과 부르고뉴의 방만한 경계운용이 원인이었을 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모두 기습이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잔느의 업적을 깎아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그 승리들이 특별히 신의 가호나 잔느 개인의 뛰어난 역량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잔느가 가호를 받은 뛰어난 전사였다면 파리까지 해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죠.
 
 
전사학적, 그리고 전략학적으로 보자면 초반 두 번은 먹힐만한 기습기동이었지만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내부 동조 세력도 열세인 파리 진격을 시도한 것 자체가 '삽질 오브 삽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짓거리'였습니다.
잔느의 승리원인이 명확하듯이 그녀가 패배한 원인 역시 명확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역사는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를 맺는 인과론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잔느의 고속 기동 전술은 기습인 탓에 병력 소모는 적었지만 상당한 거리를 거의 쉼없이 기동했기 때문에 피로도가 매우 컸다는 점.
둘째, 잔느의 일딴 질러보고 생각하자는 무책임 전략에 국왕파 장군들의 반감이 컸다는 점.
셋째, 초반 두 차례 전역에서의 패배에 대해서 학습한 브르고뉴, 영국 연합군이 종심 기동 방어진을 구축하여 파리 근처에 펼쳐놓고 있었다는 점.
 
초반의 두차례 승리가 잔느가 아니어도 됬다면, 잔느의 패배와 포로가 됨은 잔느가 역발산 기개세의 항우나 인중 최고라고 불린 여포라도 별수 없는 것이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덧붙여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당시 프랑군의 사정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프랑스 군 장군이던 라 트레모이유의 서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 미친 여자의 광기에 모든 프랑스의 운명을 맞길 수는 없다'라고 할만큼 잔느의 전술은 주먹구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잔느가 브루고뉴파에 포로로 잡혔을 때 국왕파가 잔느의 구출에 열정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프랑스와 국왕파에게 잔느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 였기 때문입니다.
살아서 삽질을 거듭하는 전략적 철부지 소녀보다 죽어서 성녀가 되는 잔느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비정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비관적인 상황에서 신의 가호든 머든 기대고 싶은 만큼
이성적이 되었을 때 계산적일수밖에 없는 이치이기도 하죠.
 
 
덧붙여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만 잔느가 구명되었다면 프랑스 전역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죽어서 성녀가 되어준 덕분에 라 트레모이유를 비롯한 프랑스 군 장군들이 활동폭이 늘어났고, 결국 브르고뉴를 침묵시키고 영국을 도버해협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잔다르크가 한 거라고는 부르제왕을 비롯한 기존 세력에 휘둘린 거 뿐이고, 단순히 정신나간 미친년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잔다르크가 지휘를 했다고 전술했지만 병사들이 그나마 움직인 이유조차 겉보기만 그럴싸하게 지휘관인 척 꾸몄을 뿐 실제 지휘는 리슈몽 공작이 했기 떄문입니다. 즉 병사들중 상당수는 10대 미친년이 지휘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그들은 자신들을 리슈몽 공작에 의해 움직인다고 여겼습니다.


이 모든 게 허언일까요? 글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