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힘차고 강하게 잘 일어나서, 

오늘은 일이 잘 되겠구만 하고 오전근무 세미나도 듣고, 데이터 분석도 하면서 잘 보내고나니, 

지도교수가 다음 달에 화상으로 진행하는 학회에 제출할 포스터용 초록을 쓰라는 메일이

점심시간 12시 땡에 옴. 

재택근무 중인데 밥숟갈 뜨려던 거 멈추고, 제출 데드라인이 언제인가 확인해보니 내일임. ㅅㅂ


초록이라는 게, "내가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발표할 거고, 킹왕장 재밌을 거다."라고 

학회에서 발표할 내용 대충 티저로 뿌리는 거다.

그런데 대학원생 나부랭이가 쓰면, 바로 멋대로 학회측에 제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초록 초안 쓰고 나면, 포닥하고, 지도교수 결재 받고 나서야 제출 가능하다. 

즉 내일 제출할 거면, 오늘 근무시간 끝나기 전 (오후 6~7시)에 다 써서 초안을 내부공유부터 해야한다.

그래야 내일까지 회신 주고 받으면서 첨삭 후 결재 받는 셈.

직장하고 거의 똑같이 돌아가는 셈이다. 


대충 초록 쓰라고 6~7시간 줬네?

"시발꺼 못해도 하루는 줘야 하는 게 상식 아니냐" 욕을 하면서 점심을 퍼먹고, 

초록 쓰려고 보니, 존나 쓰기 싫더라. 

학회측이 손나 이상한 조건을 초록에 걸었는데, 

무슨 한국 인터넷 세줄충도 아니고, 

"초록을 세 줄로 쓸 것." 

엄청 짧게 쓰라는 말인 건 알겠는데, 

동료들끼리도 행갈이 안 하고 폰트 줄여서 존나 길게 쓰면 한 줄 아님? 하고 비웃었다. 


농담은 농담으로 두고, 막상 쓰려고 보니 골 때리더라. 

보통 구조를 

1. 실험 내용

2. 간략한 실험 결과의 물리적 해석 및 중요성 강조

3. (있다면) 관련 출판 논문 슬쩍 꺼내서 자랑

4. 발표내용 한 문장 티저 요약 (다 까발리지는 않고)

이렇게 짜는데, A4용지에 12pts 기준으로 실험내용 설명하는 다음 첫문장 쓰고 나니까 세줄 다 썼더라.


"우리는 희토류 기반 금속물질 GdRh2Si2 속 Gd 이온 4f 스핀의 장거리 반강자성체 구조가 펨토초 (10의 -15승 초) 단위로 비자화되는 것을 독일의 방사광가속기 BESSY II, FemtoSpeX 빔라인에서 공급받은 40 fs 길이로 짧은 "sliced" X선을 이용한 공진 X선 산란 테크닉을 통해 관찰했다."


한글로 번역하면 대충 두 줄 나온다마는 

그건 한글 번역이 자리를 덜 차지하는 탓이고, 

실제로 영어로 antiferromagnetic, ultrafast demagnetization dynamics 어쩌고 쓰면 3줄 그냥 씹어먹고 반 줄 더 먹었다. 

첫문장부터 그 꼬라지를 보고나니 더 쓰기 싫어짐.


현실도피로 낮잠 한숨 자고 일어나니 근데 써지긴 써짐. 

단, 세줄 요약은 포기했고, 걍 될대로 되라 하고 내 맘대로 140단어 짜리로 썼지. 

그러고는 지도교수랑 포닥에게 보냈다. 

"내 재주로는 어떻게 해도 3줄 요약은 불가하고, 140단어로 썼다. 

읽어보고 빼도 좋을 것, 또는 넣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달라."

인생은 역시 배째라가 답이다. 

내가 못하면 남이 해주겠지. 단체활동이 묘미란 그런 거야.

그래도 나도 그렇게 무책임한 건 아닌게, 보통 초록 국룰이 200~300단어인데, 

그래도 150 단어 미만으로 줬으니 노력은 한 거야.


낮잠까지 쳐 자고는 4시간 반만에 다 쓰고 

지도교수한테 발송하고 보니까, 지난 3년 허투루 보낸 건 아니구나 싶더라. 

뺑이치고 실험하고 데이터 분석 매일같이 하고, 

(겜생이라 게임 좀 한 것 좀 빼면) 그래도 연구 외에 다른 생활 없이 살았더니 

그게 결국 값을 하네.

세상에 예전에는 ㅈ같은 초록 한 번 쓰려고 2주 넘게 매달렸는데

이제는 욕하면서도 반나절만에 쓰고, 랩에 새로온 포닥들 이런저런 오리엔테이션도 해주고.


야, 근데 졸업은 언제 하냐...? 계약 곧 끝나는데 졸업논문 시작도 안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