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채널 (비)

이우연 낙성대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월간조선 인터뷰 (원문은 길어서 편집)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907100037


  ― 〈군함도〉를 보면, 나치독일이나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망루와 철조망이 있고, 무장 헌병이 지키는 모습은 군함도는 물론이고, 일본의 어떤 사업소에서도 없었습니다.”
  
  ― 무슨 얘기입니까.
  
  “조선인들은 2년 계약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룰 기술을 익히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인들만 투입해서는 위험하고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조선인과 일본인이 조(組)를 짜서 일했습니다. ”
  
  ― 군함도에 있었던 조선인 노무자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가장 많았을 때 1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본인은 그 2배 정도였고….”
  
  ― 군함도에서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당시 일본의 주요 사업장 인근에는 특별위안소(산업위안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군함도에는 2개의 위안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일본인, 하나는 조선인 전용이었습니다. 거기를 드나들 만큼 자유로웠다는 얘기입니다.”


  ―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추정컨대 최대한 10만명, 합리적 숫자로는 7만명 이하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뭡니까.
  
  “1939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66개월 동안 모집・관알선・징용 등의 형태로 도일(渡日)한 노무자의 수는 총 72만3000명입니다. 그렇다면 1944년 9월 이후 6개월 동안 건너간 징용 노무자의 수는 7만~10만명 정도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 모집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일본에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민간기업에서 일본 정부의 승인과 조선총독부의 협조를 얻어서 노무과 직원을 보내 일할 사람들을 자유롭게 모집한 것을 말합니다.”
  
  ―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모집 인원의 몇 배가 몰렸습니다. 전체적인 수는 없지만, 예컨대 200명 모집하는 데 600명이 몰렸다는 식의 기록이 개별 민간기업에 남아 있습니다.”
  
  ― 왜 그렇게 많이 몰렸던 것입니까.
  
  “1939년, 1940년에는 조선에서 농사가 극심한 흉작(凶作)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조선과 일본 간의 임금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탄광에서 일하면 1940년에는 조선의 방직공 월급의 5배, 은행원 월급의 3배를, 1944년에는 일본 대졸(大卒) 초임(初任) 사무직 월급의 2.6배, 순사 월급의 3.7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광부 월급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뭡니까.
  
  “당시 탄광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사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석유가 나지 않는 일본으로서는 석탄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조선에서 모집을 해가도 도망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 도망을 쳤다고요.
  
  “일본으로 밀항(密航)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농촌 출신이다 보니 탄광에서 일하는 것이 고되고 무섭거든요. 그래서 사업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 내에 도망치는 사람이 60~70%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관알선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총독부가 직업소개소 역할을 하면서 선발 요건을 엄격하게 관리하려 한 것이죠.”
  
  ― 형식은 자유모집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성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모집에 대해서는 ‘강제’라는 말을 하기 어렵지만, 1942년 2월~1944년 9월 시행된 관알선과 관련해서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컨대 일본 전체 기업에서 5만명의 조선인 노무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 총독부에서는 이 수를 채우기 위해 면사무소 직원들을 동원, 지주(地主)·구장(區長) 같은 지역 유지들에게 협조를 요청했겠지요. 


지주가 자기네 소작인이나 하인에게 ‘네가 좀 가라’고 하는 경우, ‘옳다구나’ 하고 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별로 내켜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한다고 해서 강제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징용의 경우 100엔 이하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관알선의 경우 그런 처벌규정이 없었습니다.”
  
  ―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거역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경우를 두고 ‘구조적 강제’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한국에서 지금 일하기 싫은데 직장 다니는 사람들도 모두 ‘구조적 강제’겠지요.”
  
  ― 징용은 분명히 강제성이 있었지요.
  
  “그렇죠. 하지만 징용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밀항하려면 일본에서 버는 월급 2개월 치를 주고 작은 배에 목숨을 맡겨야 했는데, 징용의 경우는 그런 위험 없이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으니까요. 심지어는 징용영장을 받은 사람에게 돈을 주고 호적을 산 후 대신 징용을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부산 경찰의 가장 큰 일이 밀항단속과 호적을 바꿔치기해 도일(渡日)하는 사람들을 적발하는 것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후 지정된 사업장에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 그건 불법이었을 텐데, 그게 가능했단 말입니까.
  
  “일본의 탄광 등으로 징용 온 사람들을 빼내는 조선인 업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임금과 더 안전한 일자리를 약속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토목공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미군 상륙에 대비하기 위한 공사를 많이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워낙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각 기관이나 기업에서는 징용 왔다가 도망친 조선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썼지요. ”
  
  ― 일종의 불법체류자 비슷한 경우인데, 그런 경우 임금은 제대로 받았습니까.
  
  “전시(戰時)경제하에서 미쓰비시 같은 기업들에 현금은 차고 넘쳤습니다. 생산하는 족족 정부에서 다 사주니까요. 부족한 것은 일손이었습니다. ”
  
  ― 징용의 경우에도 통상적인 임금은 지불됐다는 얘기죠.
  
  “오히려 징용으로 간 사람들의 처우가 더 좋았습니다.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원호(援護)체계가 적용됐거든요. 1944년경 탄광에서는 평균적으로 월급이 150엔가량이었는데, 징용에 의한 경우 가족수당이 지급됐습니다. 


조선에 두고 온 가족이 세 명인 경우 1인당 5엔씩 본인에게 15엔, 별도로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도 15엔이 지급됐습니다. 물건을 사거나 배급에서도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 그럼 징용으로 끌려가 한 푼도 못 받았다는 식의 기억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6・25 때의 기억이 투사(透寫)된 경우가 많습니다. 노인들이 나이가 들어서 기억을 못 하니까, 한국전쟁 당시 고등학교 앞에다가 차 세워놓고 학생들을 끌고 갔다거나, 임금도 주지 않았다거나, 대가(代價) 없이 쌀을 공출(供出)했다거나 하는 기억을 일제(日帝) 때의 기억으로 혼동하는 거죠.”
  
  ― 임금이나 강제저축한 돈을 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정산(精算)하고 돌아왔어요. 한국인들이 그렇게 금전 관념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다만 하루빨리 귀국하겠다면서 포기한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대개 반 달 치 내지 한 달 치 정도 월급에 불과했어요. 


일본 정부는 나중에 문제가 될 경우에 대비해 기업들로 하여금 그 돈을 공탁(供託)하도록 했습니다.”


  ― 그럼 신일철주금을 비롯한 징용공 판결은 어떤 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까.
  
  “원고(原告)들이 소장(訴狀)에서 요구한 것은 미불(未拂)임금과 정신적・육체적 피해에 따른 손해배상금(위자료)입니다.”
  
  ― 그들의 미불임금은 어느 정도입니까.
  
  “소송을 제기한 4인(사망자 3명, 생존자 1명)을 비롯해 46명이 신일철주금 가마이시(釜石)공장에서 일한 문서가 남아 있어요. 이들이 받아가지 않은 돈은 대략 반 달~한 달 치 월급 정도였습니다. 


조선인 여자정신대를 가장 많이 고용했던 후지코시의 경우 그들이 남기고 간 돈은 180~200엔 정도인데, 이 역시 한 달 치 월급이 채 안 돼요. 이에 대해 대법원은 손해배상금까지 포함해 1억~1억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 대법원은 어떻게 그런 판결을 내린 것일까요.
  
  “대법원 판결은 박경식이나 선행(先行)연구자들이 그랬듯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1939~1945년 임금을 거의 주지 않고 노동을 시켰다는 망상을 가지고 한 판결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한국의 대법원은 어떤 조사도 하지 않고, 판결을 내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