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채널 (비)

왠지 써야 될 것 같았음.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당했다'라는 '경험적 지식'을 대전제로 두고 뻗어나간 이데올로기임.
그래서 '여성은 남성에게 억압당하지 않았다'라는 '경험적 지식'과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음.
그 싸움의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좀 더 명확히 이해하게 되는 긍정적 순기능이 '아주 조금' 있음.
싸움의 결과로 '아, 이러이러해서 그동안 내가 살던 세상이 이 모양이었구나. 사실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가 있겠구나.'라고 깨닫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임.


그런데 문제는 '사실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다'라는 진테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임.
그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당했다'라는 테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심장이 멈출 때까지 끝나지 않는 길고 긴 여정을 떠나게 됨.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다'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지식들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대전제를 뒷받침해주는 지식들만 계속 끌어와서 덕지덕지 이어붙이기 시작함.
그 결과, '여성이 남성을 억압해야 한다' 또는 '남성을 다 없애버려야 한다'라는 식의 행동이 튀어나오게 됨.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당했다'라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 진리'로 받아들인 결과, 다른 사람에게 그 '변하지 않는 진리'를 따르기를 강요하는 파시즘적인 존재가 돼버림.


이것은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가진 고질적 문제이기도 함.


    테제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안티테제 '인간은 운명이 정해져 있는 물질적 존재이다.'
    진테제 '운명을 사랑하라. 그리고 운명을 초극하라.'
       -by 니체


니체의 사상이 생각보다 꽤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음.
그리고 왜곡된 니체의 사상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했음.
안타까움.


그래서 내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줌.


한 가지 '사고 실험'을 해보겠음.


상상해보셈. 만약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공허한 세상에서 '혼자' '영원히' 살아가게 된다면?
처음에는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을 지도 모름.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는 다른 존재를 분명 바라게 될 것임.
이제 2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됨.


  1. 생각을 중단하며, '생각을 그만두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을 그만두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을 그만두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영원히' 반복한다.
  2. 운명을 긍정하며, 다른 영혼을 창조해낸다.


니체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2번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음.
인간은 2번을 선택하지 않으면 현재의 모습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기 초극의 가능성을 내부에 품고 있지 않은 '최후의 인간'은 '가장 경멸할 만한 인간'이라고 주장했음.


그리고 사고 실험은 여기서 끝이 아님.


시간은 상대적인 것임.
니체는 '인간의 매 순간순간이 저 영원과 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매 순간순간 2번을 선택해야 한다'라고 주장함.
그러므로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무엇'이며, '모든 것은 영원으로 회귀'한다고 주장함.


이것이 '초인 사상', '영원 회귀 사상'으로 불리는 니체의 사상임.


니체 사상은 한 마디로, '권력을 향한 태초적 의지, 그 자체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음.
니체가 말하는 권력은 ['다른 영혼을 원하는 마음'에 대한 무한 긍정]을 의미함.
파시즘(파쇼 = 묶음)의 끝은 '하나'이며, '나'가 아닌 다른 영혼이 없는 세상임.
['혼자' '영원히'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하나'의 파시즘을 통해서 '하나'를 부정, '파시즘의 부정'을 '하나'로 묶어서 파시즘을 부정]
니체는 ['고정된 정신'은 더이상 '정신'일 수가 없다는 통찰, '너'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정신의 모순성]을 통해서,
[인간이 나아가고 있는, 그리고 인간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파쇼의 완전한 부정이다. 즉, 창조를 향한 무한한 긍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운명이며, 모든 것은 영원으로 회귀하고, 모든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삶을 긍정하라.]라는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냈음.
이것은 '운명에 순응하라'라는 말이 아님. 니체는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 가라'라고 했음.


아래는 우주의 간단한 구조도임.


불교 - 영원
          물질
          시간
          정신
          인간
       자기 수행
        깨달음
     영겁의 윤회
          해탈
          열반
          영원


기독교 - 천지창조
                물질
                시간
                정신
                인간
            악
          지옥
                      선
                    천국
     영원불멸한 하나님


니체 철학 - 영원
                 물질
                 시간
                 정신
                 인간
영원 회귀(똑같은 인생, 똑같은 우주의 무한 반복)
최후의 인간                            도덕적 자기 초극
 낙타                                           낙타
        사자                                       사자
                                                        아이
                                                        초인
                                    영원 회귀(우주의 시작으로의 회귀)


니체는 우주가 '점'일 당시에 최초로 가진 '권력에의 의지'가 결국 인간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권력에의 의지'와 파시즘은 우주적 차원에서부터 서로 대립하고 있는 힘이라고 보았음.
니체 사후에 니체 철학이 왜곡돼서 파시즘에 이용됐었다는 사실은, 정말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가 없음.
우주는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을 수는 있어도 진리를 온전하게 전할 수는 없음.
니체는 자신의 저작을 허무주의와의 투쟁으로 보았으며, 니체의 관점은 퍼스펙티브주의(관점 없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식은 없다)라고 불림.


모든 이데올로기는 파시즘적인 면을 가지고 있음.
이데올로기가 계속되면, 결국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노예로 만듬.
하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를 혐오하면, 그것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나 마찬가지임.
파시즘은 혐오와 거부에서 생겨나는 행동임.


세상을 파괴하는 행동은 결국 나를 파괴하는 행동임.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내 정신 속에 있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임.
인간에게는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음.
우주는 이미 창조됐고, 앞으로도 계속 창조될 것임.
인간과 우주는 서로 다르지 않음.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들을 혐오하지 말고, 페미니스트들에게 사랑과 자비와 긍정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페미니즘에서 탈출하라고 권유를 해야 됨.
결코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라는 의미가 아님.
특히 남성들은 호구처럼 퍼주면 '절대' 안 됨. 그것은 긍정적인 삶의 방식이 아님. 오히려 따질 것은 하나하나 전부 다 따져야 함.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함.
그 대신! 누구의 '삶의 긍정'이 더 올바른지를 따져야 한다는 이야기임.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당했다'를 진리로 삼은 여성들이 긍정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
만약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당했다'가 진리라면, 오히려 지금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을 다시 억압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임.
'만약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지 않으려 한다면, 여성이 남성을 억압하겠다! 여성을 억압하지 않는 남성은 필요 없다!'라고 시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임.
뭔가 이상하지 않음?


그들이 가끔 하는 말 중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게 문제'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문제가 있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라는 뜻임.
이런 이상한 사고방식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애초에 페미니즘이 '완벽한 여성을 원하는 남성의 욕망'과 '남성의 욕망을 이용하려는 여성의 욕망' 사이에서 탄생했기 때문임.
남성들은 페미니즘의 탄생에 관여해놓고 이제 와서 무책임하게 발을 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임.
애초에 여성은 '남성이 억압하려고 해도 억압당하지 않는 존재'임. 시작을 같이 했으니, 끝도 같이 해내야 됨.
안 그러면 모두가 불행해질 뿐임.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음.
덮어놓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음.
공산주의라는 단어의 오용. 공산주의의 개념적인 왜곡. 잘못 이해하고 잘못 활용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참 많았음.
매우 안타까운 상황임.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는 그냥 '철학적인 예측'일 뿐이니 너무 미워하지 마셈.
알아둬서 손해 보거나 하는 종류의 지식이 결코 아님.
내가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줌.


경제력은 결국 '기대 가치'임.
돈은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이 된다는 소리임.


경제력 = 자본(다른 사람 또는 과거의 나에게서 양도받은 가치) + 생산력(가치를 생성해 낼 수 있는 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은 자본과 생산력을 '모두' 가지고 있음.
그런데 마르크스는 사람을 '굳이' 자본가(부르주아)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로 구분했음.
뭔가 말이 안 되지 않음?


여러가지 사회주의 모형이 우후죽순 튀어나올 당시에, 세상은 '탄광 갱도에서 하루 10시간이 넘게 일하는 어린아이'와 '돈이 지갑에서 끝도 없이 흘러 넘치는 고용주'가 존재했음.
아까도 말했지만 경제력은 결국 '기대 가치'임. 한쪽이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못 챙기면 반대쪽이 마음대로 가치를 깎아버릴 수 있다는 소리임.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음. 잘 모르는 사람이 당하는 것은 지금 세상도 여전히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그것도 정도껏이어야 하는데, 도덕을 아예 깡끄리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음.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리고 그들은 '이윤의 획득'이 자신들의 도덕이라고 주장하면서 행동을 정당화시켰음.
덕분에 노동자들 평균 수명이 30살을 넘는 곳이 없어서, 오히려 사회 전체의 경제력은 크게 손해를 보는 지경이 됐음.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가는 끊임없이 자가증식을 시도하는 속성을 가진 '자본'에 인격을 부여한 인격체임.
당시의 고용주들이 돈을 불리는 것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사람이 아니고, 돈의 화신이다'라고 비판한 것임.
실제로 계급주의적인 생각이 사회에 팽배했음.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 존재하는 '경제력의 차이' 같은 애매모호한 구분법하고 비교하면 안 됨. 그것은 새로운 '신분 제도'에 더 가까웠음.


즉,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가의 의미는 '돈>사람'이라는 시대상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지, 돈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 그 점을 꼭 이해해야 됨.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노동자라는 인식이 이미 존재함.
중소기업 가보면 사장이 제일 열심히 일하는 곳도 있음.
주식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도 노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요즘 꽤 많아졌음.
고위 공무원은? 대통령은? 위치와 상관 없이 다 일을 하는 인간임.
이미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분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음.


길거리에서 누가 '삼성 부회장이든 삼성 말단 직원이든 경제력의 차이가 크게 날 뿐이지, 계급의 차이는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계급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계급의 차이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임.
'계급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점점 많아질 것임.
그리고 스스로의 권리는 반드시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임.
'아랫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안하무인적인 윗사람',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괘씸한 아랫사람'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결국 도덕적인 사람과 비도덕적인 사람만 남게 될 것임.
실제 권력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식임.


'이윤의 획득'이 도덕 그 자체라고 대놓고 소리 지르는 자본가들은 더 이상 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최근에 거의 성공해서, 이제 마무리를 향해서 나아가고 단계라고 봄.
지금 크고 있는 애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 걔네들이 꼰대를 얼마나 대놓고 싫어하는지 암?
신좌파들의 세상이 오고 있음. 그런데 신좌파는 신좌파라고 부르면 싫어함. 자유주의자하고 분명히 다름. 그 차이를 모르면 꼰대임.
어디서부터 신좌파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정체성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함.
이제는 그런 식의 '사람을 간단하게 규정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야 됨.


딱 잘라서 언제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시작될 것임.
프롤레타리아 독재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임.
어쩌면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름. 적어도 판을 깔고 있는 것은 확실함.
문재인 대통령은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끈을 놓지 않는 특정 이미지가 있음.
문재인 대통령은 '약자의 편', '원칙주의자', '선한 마음'이라는 3가지 타이틀을 절대로 놓으려고 하지 않음. 그리고 '소득주도 성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음.
그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뇌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번 통찰해보셈.
국가의 대통령이 저 이미지를 놓치 않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특정한 사고 회로가 계속 강화되고 있음.
경제가 어려운데 지지율이 안 떨어지는 이유? 현대 사회를 살아가려면 고정관념을 버려야 됨.
'정보의 교환'이라는 경제 활동이 격렬하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물물교환의 형태라서 측정할 방법이 없으니까 경제가 안 좋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임.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지지자들이 가장 필요한 '이미지'를 계속해서 건네주고 있고, 지지자들은 지지율로 답해주고 있는 상황인 것임.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은 당연히 이해도 잘 안 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을 것임. 본인들에게는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는 '이미지 따위'니까.
나도 솔직히 별로 필요 없음. 애초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하지도 않았음.
하지만 어쩌면 이 과정은 사회의 진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며, 동시에 이미 정해져 있던 필연적인 상황일지도 모름.


세상의 모든 변화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시작해서 인식으로 끝나는 것임.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20세기의 공산주의 정권들처럼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님. 딱 봐도 지금 정부가 그 정도로 힘이 있어 보임?
문재인 대통령의 '이미지'에 사람들이 감화되고, 변화는 점점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
그 결과는 '멍청하고 잘 모른다고 해서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거다'라는 인식임. 쉽게 말해서, 사회에 만연하던 약자 멸시가 점점 사라지는 것임.
약자 멸시를 국민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뇌 구조는 마음먹는다고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들이 스스로 바뀌기 위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필요했던 것임.
그 결과로 강자가 움츠러들고 약자는 분간도 제대로 못하면서 날뛰게 된다는 점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임.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강자의 가치가 빛바래 질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됨. 강자의 가치는 언제나 빛이 나는 법임.
'갑'과 '을'의 관계에서, 내가 너에게 더 많은 가치를 안겨주는지 아니면 너가 나에게 더 많은 가치를 안겨주는지 경쟁하는 것으로 점점 바뀌는 것일 뿐임.
진짜 강자는 사회가 변화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특정 사람 탓을 하지 않음.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는 예상하기가 너무 어렵고, 지금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 가능한 건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음.
주변 국가들의 면면을 봤을 때, 대한민국의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함.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판단력이 있다면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임.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북한을 덮어 놓고 미워하는 빨갱이 혐오자들 또한 판단력이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라는 부분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싸움은 점점 누군가를 탓하고 싶고 욕하고 싶고 공격하고 싶은 사람들의 싸움으로 변해가다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이데올로기는 파시즘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며, 파시즘은 혐오와 거부에서 생겨나는 행동임.
인류 사회의 미래는 혐오와 거부가 최소화되는 퍼스펙티브주의, 개인적 합리주의로 향해 가고 있음.
북한의 자본주의 혐오와 대한민국의 빨갱이 혐오는 지금 같은 선상에 서 있는 상태이며, 둘 다 사라져야 하는 것이 맞음.


세상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깎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가치의 강요'를 거부하는 개인적 합리주의를 실천해나가는 사람들로 나뉘게 될 것임.
그 싸움이 끝나면?
공산 사회임.


무계급이 뭐 엄청 대단한 거라고 생각함?
'공산 사회 = 돈이 사라지는 사회' 또는 '공산 사회 = 정부가 모든 돈을 통제하는 사회'가 아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냅다 혁명부터 일으켜버린 20세기 공산주의 국가들 때문에, 공산 사회가 뭔지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음.


윗사람한테 인격적 모독 당하면 안 참음. 임금 올려달라고 투쟁함. 회사 때려치고 싶으면 사표 던지고 때려침. 이게 사회주의 사회.
다른 사람이 나를 인격적으로 깎아내리지 않음. 회사를 때려치는 게 아니라, 사회를 위한 더 나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싶어서 회사를 나옴. 이게 공산 사회.
공산 사회에서 자본이 국가에 종속된다는 것은, 돈을 정부가 다 통제해서 사회의 돈이 사라져 버리는 개념이 아님.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깎아내리는 파괴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개념임.
공산 사회에서 말하는 국가가 단순히 정부를 뜻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됨. '혼자서도 도덕적일 수 있는 개개인의 합 = 국가' 임. 이건 파시스트들이 주장하는 제멋대로 식의 논리가 아니고, 개인적 합리주의를 통해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사회임.
사실 대단한 게 맞기는 함.
내가 죽기 전에 그 사회를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을 긍정하지 못 할 이유는 없음.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함.


남을 혐오하지 마셈.
바보처럼 당하고 있으라는 뜻이 '절대' 아님.
'너'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가 존재한다는 뜻임.
'너'가 없어지면 '나'도 없어지는 것임.
어떤 행동을 할 때는 행동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건지 꼭 확인하셈.
앞으로 인류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퍼스펙티브주의, 개인적 합리주의를 통한 혐오의 부정임.
이데올로기, 종교, 학문, 기술, 역사 등등 인류의 모든 것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파헤치고 흡수하고 재창조해서 '혼자서도 도덕적일 수 있는 개개인의 합'으로 나아가야 됨.
미국도 지금 온갖 이데올로기들의 싸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음.
하지만 그것은 거시적 입장에서 분명 필요한 일일 것임.
싸움의 과정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혐오는 점점 늘어났다가 다시 점점 줄어들 것임.
사람들은 '가치의 강요'와 '가치의 실현'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결국 도덕적 자기 초극을 통한 '가치의 실현' 쪽으로 저울추가 점점 더 기울어져 갈 것임.


이렇게 잘난 듯이 쓴 나도 한 가지 혐오를 가지고 있음.
나는 '벌레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음.
사람보고 벌레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말 그대로 벌레에 대한 혐오임.
특히 모기랑 파리.
고치려고 노력은 하는데, 진짜 쉽지가 않음.
'안 그래야지'하고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고쳐질 수 있는 것 같음.


석가모니를 예로 들자면,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했음.
그리고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했고,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라고 했음.
이것에 대한 해석이 참 다양한데, 나는 그냥 말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생각함. 석가모니는 모든 우주가 사실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임.
'너와 나는 하나인데, 너는 아직 고통받고 있으니, 너가 깨달을 수 있게 내가 도와주겠다. 왜냐하면 너와 나는 하나니까.'
거부할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는, 아주 합리적인 논리가 성립이 됨.


예수도 마찬가지고, 그 이전의 종교 창시자들도 다 마찬가지임. 예수는 '하나님은 마음 속에 있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라고 했음.
모두 '우주는 하나다'라는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한 사람들이며, 우주의 의지와 진행 방향을 깨닫고 미래를 예측했음이 틀림 없음.
인류 역사에 크게 족적을 남긴 종교는 전부 이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함. 단지 창시자가 죽고 나서 문제가 생겼을 뿐이지, 처음의 선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음.
선지자들을 사기꾼하고 동일시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없음. 애초에 인류가 선지자들의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도 의문임.


그리고 니체는 '석가모니의 관점은 석가모니의 관점이고, 예수의 관점은 예수의 관점이다. 우주는 하나지만, 사람마다 다 관점이 다를 수 밖에 없다.'라는 관점으로 우주를 바라봤음.
그 결과, 니체는 인간 영혼의 진행 방향을 철학적으로 증명해냄으로써 모든 인간의 깨달음을 존중하고 과거와 미래의 합일을 추구하게 된 것임.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음.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니체의 사상에 대해서 탐구해야 함.
니체의 저서는 진짜 보면 볼 수록, 고민하면 고민할 수록 새로운 정보가 눈에 들어오게 됨.
이 정도면 니체는 '아포리즘(핵심과 이치를 표현한 문장)'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를 탄생시켰고, 저서를 종교의 경전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듬.
인류는 아직 니체의 저서를 반의 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고 봄.
그리고 다른 종교의 경전도 다 마찬가지임. 나는 '고대 사람들이 진심으로 코끼리가 대륙을 떠받치고 있다고 믿었다'고 생각하지 않음. '그 의미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고 보는 쪽이 맞음.
인류는 니체의 사상을 바탕으로 현재 존재하는, 또는 기록이 남아있는 종교들의 가르침을 분석하고 탐구해서 스스로의 관점으로 각각 재탄생시킬 필요성이 있음.
그것은 혐오와의 싸움, 거부와의 싸움이 될 것이며, 파시즘에 대항하는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임.
그리고 인류가 파시즘에 맞서서 승리하는 순간, 우주는 다시 영원으로 회귀할 것이며, 모든 것은 다시 반복될 것임. 인류는 멸망하는 대신, 인류를 초월하게 될 것임.
그것은 의미가 다시 무의미로 돌아가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무의미가 의미로 바뀌게 되는 과정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먹기 위해서 굳이 동물을 죽여야만 한다면 벌레를 주요 식량으로 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임.
소통이 가능한 동물들을 죽여 봤자, 인간의 영혼에 흠집만 계속 생길 뿐임.
내가 동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서 하는 말이 아님. 나 고기 엄청 좋아함. 고기 없는 세상을 딱히 상상하고 싶지는 않음. 그냥 저게 사실이라서 하는 말임.
메뚜기 튀김, 전갈 튀김, 번데기, 등등 이런 류의 음식에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 왜 아무도 진지하게 고민을 하지 않는 거임?
돼지나 말, 소를 통째로 튀겨서 음식으로 가져오면 당연히 혐오감을 느끼지, 안 느끼겠음?
만약 삼겹살 한 점 먹을 때마다 살아있는 돼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려야만 한다면(그리고 그것이 강제적인 상황이라면) 삼겹살이 지금처럼 많이 팔리겠음?
저런 벌레 음식은 엽기 체험으로써는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인류의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서는 절대 가치가 있을 수가 없음.
벌레가 벌레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생김새를 아주 철저하게 파괴하고 재창조해야 혐오감이 좀 줄어들지 않겠음?
삼겹살 한 점을 살아있는 돼지로 확대시켜서 생각하기는 쉽지 않은 것처럼, 음식을 보면서 벌레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정도가 돼야 함.
'모르고 먹으면 벌레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의 재창조'를 미래 곤충 음식의 최소 조건으로 봐야 함.
나는 설국열차에 나온 양갱 정도만 돼도, 식탁 옆에 날파리 쭉 줄 세워놓고 한 입 먹을 때마다 주먹으로 한 마리씩 내리쳐서 짓뭉개는 정도로 타협하고 으적으적 먹을 수 있음. 진심임. 이거 누가 사업하면 이색 식당으로 대박 날지도 모름.
제발 혐오감을 극복할 수 있는 쪽으로 연구 좀 해주셈.


진짜 글 열심히 썼음. 부디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서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음.
친구가 맨날 꺼라위키 좀 그만 보라고 하는데도 꿋꿋하게 눈팅해왔는데, 요즘은 좀 회의감이 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