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이 날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배 한척이 침몰하였다는 뉴스를 보고 불안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오전 강의를 듣고 '전원 구출'이라는 뉴스 헤드라인을 식당 텔레비전에서 보고 안도하였지만, 집에 돌아와서 사실 그것이 오보였고, 많은 학생들이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채 물 속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어째서 그 아이들이 죽었어야 했는지 하나님께 많은 이들이 따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째서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야만 하는건지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심판대에 올리려고 하던 시도가 반기독교 세력 외에도 교계 내에서도 논의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세대에서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신 위르겐 몰트만 교수를 청빙하여 '세월호 이후의 신학'이라는 세미나를 열었으며, 학술회지 '현대신학'에서도 신정론과 변신학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때로 기억합니다.

 굳이 이러한 신학적인 이야기 말고도 우리는 하나님께 자주 항변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라는 항변을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하곤 합니다. 인류는 비극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을 찾아 그에게 따지곤 하였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겨온 부조리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말한대로, 평온한 일상이 갑자기 깨지고, 우리는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에 내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성경의 한 인물이 떠오르곤 합니다.

 욥은 이전까지는 평탄한 삶을 살아오던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갑작스레 전 재산을 다 잃고, 자식도 잃고, 심지어 건강까지 잃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가 이러한 비극에 처하게 된 것은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친구들이 그에게 와서 그의 비극의 원인에 대해 논하곤 합니다. 이 친구들의 논리는 지극히 간단한 인과론에 기초한 이야기였습니다. 원인 없이는 결과가 없으며, 고통에는 그에 맞는 원인이 있으므로, 이는 욥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인과론에 기초한 논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틀린 것이었습니다. 욥은 진짜 인간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고통 속에 있던 것입니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욥이 하나님께 그의 고통을 토로하였을 때, 폭풍 속에서 대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욥이 그의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물었을 때에, 전능자의 대답은 "네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인해 고통과 고난을 겪고 있다." 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욥기 38장에서 41장까지의 하나님의 대답은 대략 '내가 땅의 기초를 놓고, 도량형을 어떻게 세웠으며, 태초의 바닷물이 어떻게 터졌고, 그것을 어떻게 막았는지,구름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눈과 우박은 어디서 오며,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네가 아느냐?'라는 식의 대답이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은 답으로 내놓으셨습니다. 욥이 자기가 알 수 없는 고통이라는 부조리로 질문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대답은 역시 부조리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대답하신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답답합니다. 왜냐면 비극은 실존이고, 비극과 부조리는 우리와 가장 맞닿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을 정말 신실하게 섬겼던 어느 집사님이 갑작스레 불치병에 걸려 돌아가셨다던가,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섬겼던 어느 선교사님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러한 비극들을 우리는 교회 가운데에서 자주 들어오며 우리는 이러할 때에 공의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물론 우리들 가운데에 기적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들 가운데에 부조리한 비극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곤 합니다. 비극 앞에서 비신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정하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이 과연 어떠한 식으로 표출되는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교수는 기존 전통적인 하나님의 전능성, 즉 무소불위하시고 보좌 위에 앉으사 전적으로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듯한 그러한 신적 전능성을 거부합니다.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하나님의 전능성을 찾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하지만 이는 결핍과 능력부족에서 온 고난이 아닌 자원적인 고난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가운데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몰트만 교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그는 고난을 당할 수 있고 자신의 피조물의 고난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렇기에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고난의 계시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능성은 고난받는 당신의 자녀와 함께 고통받는 사랑으로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십자가에 못박는 사랑이고, 아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랑이며, 성령은 정복당할 수 없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전능성은 십자가에 못박혀 그들의 고통과 고난에 참여하신 삼위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이 고난, 고통, 비극과 부조리 가운데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너지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셨으며,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종말은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 삶 속에 현존합니다. 이는 고통받는 형제 가운데에는 함께 고통받는 하나님과, 위로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고통 끝에서도 끝내 최후 승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실존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 속에서 고통가운데 살아가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위로를 바라보고 사는 존재가 됩니다. 고난은 그렇기에 우리 실존에 있어 또 다른 희망이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땅을 쟁기질하는 자들의 땀과 눈물 속에서 그의 소망은 더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비극과 고난, 고통은 그렇게 우리에게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되며, 삶의 부조리 가운데서 우리는 그제서야 진정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사랑으로 우리의 고통 가운데에 함께하시며 우리의 실존에서 위로하시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우리 역시 고통받는 이웃 가운데서 우리도 삼위 하나님처럼 행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그렇기에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시기를 바랍니다. 그 가운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임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