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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미국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전후 펼쳐질 냉전에서 극동아시아에서의 소련 견제를 위해 고민하다가 한반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취임 후 한달 뒤 신의주 상륙작전을 명령, 3달간의 전투를 통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연변 지역도 추가로 점령한다.  이후 군정을 실시하고 정감록의 존재를 알아내 적극 활용하여 주민들 대다수를 친미파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후 실전 경험이 있는 독립군 출신들을 모아 조선경비대를 창설하고 이오지마 전투 및 오키나와 전투에서 곳곳에 있는 벙커에 우선적으로 들어가 내부 일본군을 소탕하는  임무를 시킨다.


1945년 11월: 조선경비대의 희생으로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미군은 몰락 작전을 실행한다.


1946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징병제를 실시해 30만명의 대군을 몰락작전에 투입시킨다.


1948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은 국군은 식민지배와 위안부, 강제 징용에 대한 보상금을 산업 자원 등으로 받아내고 대마도도 추가로 할양받는다.


1950년: 이승만은 선거때가 다가오자 최고의 적수인 전 내무부 장관 김구 후보를 안두희 포병장교를 시켜 암살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실패하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탄핵되고 김구가 대한민국의 2대 대통령이 된다.


1951년: 김구는 몰락 작전을 통해 핵무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고 자체 개발을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 친한파인 트루먼은 지원을 허락했지만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변 보좌관 들의 조언에 따라 보유 수를 700발로 제한하고 미사일도 사정거리를 5000KM로 제한하는 대가로 기술을 지원한다.(사실상 조언 무시.)


1952년 1월: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즉각 군부대를 한-중 국경선으로 이동시켜 발해도라 불리는 구 연변 지역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국군은 즉각 데프콘 2를 발령하는 한편 국방부 장관을 보내 군부대 철수를 요구한다. 3일간의 협상 끝에 대한민국 정부가 대만의 장제스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현 국경선 이북의 영토를 완전 포기하는 조건으로 물러간다. 이후 한국 정부는 '국방 개혁 4개년 계획에 관한 법률' 등을 만드는 한편 경제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1954년: 몰락 작전 때의 전공으로 명성을 얻은 박정희는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1962년:박정희가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1966년: 박정희가 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경제 발전 4개년 계획을 세워서 경제력을 대폭 끌어올리는 한편 국방 분야에 대규모로 투자해

군사력도 끌어올리고 자체 핵무기 개발도 1967년 완료시켜 빠른 속도로 실전배치 시킨다. 


1972년: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국에 대규모 혼란이 발생하고 대만 침공이 미국의 재빠른 개입으로 실패해 공산당에 대한 비난 여론이 증가하자 마오쩌둥은 친위 쿠데타로 반대파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1973년: 마오쩌둥은 친위 쿠데타 이후에도 비판여론이 줄어들지 않자 내부 결집을 위해 자주포과 전투기로 발해도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을 공격하는 한편 혼란을 틈타 특수부대 250명을 남파해 철도와 교량,공장을 파괴하고 군부대를 습격해,부대장을 암살하는 한편 탄약고와 무기고를 폭파하고 정찰 활동도 벌인다. 이에 대한민국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원산에 주둔중이었던 주한미군이 국경선으로 이동한다. 며칠 뒤 특수부대원 전원이 사살 또는 생포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지만 무시당하자 국군 특수부대와 첩보원들이 덩샤오핑을 보복암살한다.


1974년: 박정희가 중국과의 대치상황을 이유로 헌법을 바꿔 지속적으로 대통령 선거 출마와 당선이 가능하게 하려한다. 이에 대다수의 의원들은 즉각 반발하지만


일부 의원들의 배신과 친위 쿠데타로 실패한다.




1978년: 마오쩌둥이 죽은 지 2년이 지나자 본격적으로 중국 고위층이 해외로 도주하기 시작한다. 이때, 조선족 출신의 공산당 고위급 관료가 한국으로 가려하고 중국군이 이를 막는 과정에서 우발적 교전이 발생한다. 이후 사태가 점점 커져가 서해상에서 함대전이 벌어지고 국경 부근에서 전차전과 공중전이 벌어진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박정희는 계엄사령관을 시켜 헌법을 또다시 바꾼다. 사태가 진정되고 이 사실을 안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지만 


군인들과 경찰에 의해 강경 진압된다.




1980년: 제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박정희는 상황을 점검하던 도중 외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케나다, 미국, 스위스, 영국 등 

주요 국가에서 총합 2500만 달러의 통화 스와프 조약을 맺고 외환 은행을 개혁시켜 튼실하게 한다.


1984년: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가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수도경비사령부 덕분에 진압되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그 공으로 제3야전군 사령관이 된다.

그러나 박정희는  '당신이 믿었던 군인들에게 까지 배신당하는데 왜 퇴임하지 않느냐'라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당한다. 

살해 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제 9대 대통령이 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대통령 선거가 벌어지고 최규하는 불출마를 선언한다.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되고 김영삼이 제 10대 대통령이 된다.


1992년: 중국이 소련 붕괴 이후 1년 뒤 자본주의 체제로 변환을 시도한다. 그러나 어설픈 개혁으로 공산당에까지 매우 큰 타격이 가 중국은 여러 갈래로 분열된다.

티베트, 위구르 등이 독립하고 내몽골 자치구는 분열 이후 몽골과 통일된다


1996년: 김대중이 제 11대 대통령이 된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게 반환된다. 그러나 중국은 경제난으로 인해 곳곳에서 대규모 혼란이 발생하는 중 이었고 결국 홍콩은 독립된 도시국가가 된다.

한국에서는 동아시아 전역에 발생한 외환위기의 물결에 휩쓸릴뻔 했지만 박정희때 맺은 통화 스와프 덕분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다.


1998년: 일본민주공화국이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끝까지 공산주의를 고수하던 일본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인민공화국)이 침공한다. 

이에, 일본민주공화국은 맞서 싸우지만 경제난과 전쟁 초반 기습으로 제공권이 빼앗기고 해상자위대도 위험에 처하는 바람에 오키나와에까지 정부기관을 이관시켰으나

미국과 한국의 전쟁 참전으로 방어선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곧바로 반격을 시작해 본토 수복은 물론 통일을 위해 훗카이도까지 상륙한다. 그러나 인민공화국은 마지막 발악으로 주일소련군 기지에서 1메가톤급 핵미사일 탈취, 도쿄를 날려버린다. 전후 일본민주공화국은 수도를 교토로 하는 한편 피해 복구 및 자위대가 재건될때 까지 주일국군 창설과 미군 증파를 요청하고 한국과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



2004년: 이회창이 제 12대 대통령이 된다. 

이회창은 아들의 병역면제로 인해 자신에게 씌워진 안좋은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대규모 감사를 벌이던 도중 이명박과 다스의 수상한

관계를 찾아내고 조사 끝에 이명박이 다스의 실소유주란 것을 알게 된다.  이회창은 관련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검찰에 고발하여 구속 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명박은 자기 혼자만 망할 수는 없다면서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관계,여러 고위 공직자 들과

몇몇 상하원 의원들의 비리를 폭로하여 박근혜는 정치 인생이 끝장나고 의원들이 같이 구속당한다.

이후 감사원은 지시에 따라 공무원들을 상대로한 대규모 감사 덕분에 부패 공직자들을 구속해 이회창은 커다란 지지를 얻는다.

한편 국민들 사이에서는 청문회 증인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노무현 상원 의원이 주목받는다


2008년: 이회창 대통령은 부패 공무원 처리로 인한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재선에 성공한다. 이후 대선이 끝나자마자 닥친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대처한다. 


2012년: 이회창 정부 시절 청문회때의 일로 잘 알려진 노무현이 제 13대 대통령이 된다.


2015년: 중국에서는 공산당 이후 새로 정권을 잡은 자유인민당이 독재와 부패, 무능으로 얼룩지자 본토 전역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다.

이에 인민당은 군대를 출동시켜 시위 인원들을 학살하여 1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