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패배하는 주인공


드래곤볼 이전의 작품들은 북두의 권의 켄시로처럼 주인공이 이미 적들보다 강한 상태이며


적의 계략이나 술수 때문에 위기에 몰려도 일신의 능력으로 그걸 깨버리는 식의 묘사가 많았다


하지만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은 무려 2번이나 결승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긴 수련 끝에 3번째 도전에서 우승이라는 꿈을 이루게 되는데


이렇게 주인공보다 강한 적의 등장 - 수련으로 힘을 얻음 - 약한 적들부터 격퇴 - 주인공과 최종보스의 결전 - 승리라는 구도는


드래곤볼과 세인트 세이야의 에스컬레이터식 진행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악명높은 점프의 파워 인플레(나메크에서 처절하게 싸웠던 프리저가 트랭크스에겐 한방나는 식) 또한 드래곤볼과 함께 나타났다









2. 장풍 계열 기술들의 비쥬얼 확립


만화계 최초의 기공포는 83년의 북두의 권 연재분에 나온 북두강장파로 보는 시각이 많으나


단순히 집중선을 그려넣는 묘사를 넘어 가시적인 에너지가 날아가는 식으로 표현한 것은 드래곤볼이 최초였다


이는 87년의 게임 스트리트파이터를 비롯한 많은 후대 작품들에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3. 최초의 스파킹 연출


캐릭터가 변신하거나, 파워업하거나, 숨겨둔 힘을 개방하는 등의 변화가 생기면


그에 맞춰 몸 주위로 에너지 파동이 보이도록 그린 연출을 일본에선 스파킹이라 부른다


이는 드래곤볼의 피콜로 대마왕 편에서 나온 피콜로의 '폭렬마파' 연출을 시초로 하며


이후 사이어인과 프리저 편을 거쳐 초사이어인의 개념이 확립됨과 동시에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다










4. 시대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전개


한때 적이었던 피콜로가 나중에는 동료가 되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인 손오반의 수련을 돕는 스승이 된다거나


계왕권 - 초사이어인 - 초사이어인 2 - 초사이어인 3 라는 성장 또는 각성을 이룰 때마다 신체 변화를 동반하며 변신하거나


이전 에피소드의 보스였던 피콜로가 주인공인 손오공과 손을 잡아도 라데츠를 이기지 못해


결국 오공이 동귀어진하며 목숨을 잃는 식의 충격적인 전개들은 지금 우리가 보기엔 식상하기 그지없지만


무려 1984년 연재를 시작한, 40년 전의 작품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그땐 변신이고 나발이고 없이 그냥 장비 장착이나 개량 등으로 파워업을 묘사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토리야마 아키라의 독창성과 파천황적인 전개가 당시 독자들에게 얼마나 충격이었을 지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5. 완벽의 경지에 오른 컷 분배와 연출 능력


흔히 드래곤볼을 읽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상 중의 하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액션씬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종이 위에 그려져 멈춰있는 그림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 Z형으로 대표되는 시점 변화, 말풍선을 뒤로 배치해 날아가는 인물 뒤로 메아리 치듯 속도감을 주는 연출,


등장인물 간의 공격과 방어가 충돌하는 것이 느껴지도록 대립시키는 구도 확립까지


수많은 장치들을 통해 눈을 따라 읽어가는 독자들에게 영상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 것이다


이는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훨씬 수준높은 액션성과 몰입감을 보여주었으며


만화문법에 있어 새로운 장을 제시한 게임 체인저였던 셈이다











이밖에도 드래곤볼은 여러가지 기록과 사건들을 지닌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소년만화, 최초로 무술대회라는 요소를 넣은 소년만화, 모험활극에서 배틀물로 전환된 소년만화,


지형 자체를 바꿔버리는 공격을 묘사한 소년만화, 최초로 메인 악역이 파워업하는 만화,


우정 노력 승리라는 점프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정작 작품 내에서 뚜렷한 사상이나 인생관 없이 싸움만 하는데


스토리가 명쾌한 만화라는 점까지 다채로우면서도 이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들을 만든 작품이 바로 드래곤볼이었다


드래곤볼이 정립한 여러 클리셰와 법칙들을 지금까지도 사골처럼 우리다 못해 뼈가 사라질 정도로 써먹고 있는 것이다


지루한 모험물에서 화끈한 격투물을 거쳐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액션물의 교과서가 된 드래곤볼과


이를 연재하면서 한 번의 지각이나 펑크도 없이 원고를 마무리하셨던 토리야마 아키라 선생님까지


정말이지 위대한 작가와 작품이라는 말 밖엔 할 수가 없다












그곳에선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