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남자의 이름을 아는가?
그는 아우슈비츠를 알린죄로 사형당한 남자이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그의 이름은 비톨트 필레츠키

지금은 러시아의 영토인 올로네츠에서 1901년 출생했다 분할 이후에도 폴란드인들은 쉴 새 없이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며, 러시아 역시 이러한 폴란드인들의 봉기에 무자비하게 대응했는데 그의 가문 역시 1864년 봉기에 참여했다가 올로네츠로 강제 이주당했다. 또한 그의 조부 역시 폴란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유배를 끌려갔던 적이 있었으니 비톨트 필레츠키가 열렬한 폴란드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차대전 당시에는 ZHP라는 독립단체에 참여하여 소련과의 전쟁에도 육군병으로 종군하였고 이 때 능력을 인정받아 종전 후에는 부사관을 가쳐 장교로 임관하게 된다.1939년 8월 26일에 육군 기병대위로 소집되었다. 


1939년 11월 9일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얀 붜다르켸비치 육군소령 등 함께 3명이서 폴란드 비밀군을 조직하였다. 이 지하조직은 19,000여 명 규모의 조직으로 발전, 1941년, 폴란드 최대 지하조직인 국내군에 흡수되었다. 1940년 오시비엥침에 위치한 대규모 수용소의 존재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다. 이 때까지 독일이 대규모 수용소를 운영한다는건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이 절멸 캠프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필레츠키는 의문을 가진다. 그 곳에서 저항 조직을 양성하는 한편 첩보활동을 하기 위해 토마싀 세라핀스키란 가명으로 고의적으로 잡혀들어간다. 아우슈비츠에서 필레츠키가 입수한 각종 정보들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국내군을 거쳐 런던의 망명정부와 영국 정부로까지 흘러들어갔다.오늘날 우리가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학살의 규모를 대강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 때 필레츠키가 보낸 비톨트 보고서가 있기 때문. 하지만 필레츠키의 바람과 달리 무시 당했다.한편 수용소 내에 첩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챈 게슈타포가 서서히 추적망을 좁혀옴에 따라 필레츠키는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할 것을 결정하고 1943년 4월 26일 다른 저항조직원 둘과 함께 제빵소에서 일하는척하고 뒷문으로 아우슈비츠를 탈출한다.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이후 필레츠키는 폴란드 저항군 내의 정보부에서 근무하였으며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여한다.


종전 이후 필레츠키는 망명정부의 지시에 따라 신분을 위장하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세워진 폴란드 본토에서 첩보 임무를 수행한다. 1946년 무렵이 되면서 그가 신분이 위장한 것이 소비에트 측에 의해 밝혀지고 망명 정부는 그에게 서방으로 탈출할 것을 지시하지만 필레츠키는 이를 거절하고 결국 1947년에 체포된다. 갖은 고문을 받은 필레츠키에게는 비톨트 보고서를 쓴 이유로 사형이 언도됐고 1948년 5월 25일에 사형당한다. 필레츠키 본인은 이미 재판 이전에 죽음을 예감하여 아내에게 '공산당이 보기에 아우슈비츠는 하찮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날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죽을걸 알면서도 여유로히 웃으며 재판에 참여중인 그

 사형 직전 남긴 유언은 '난 내인생을 살려했으니 내가 죽는 그순간엔 두려움보단 기쁨을 느낄것이다." 였다고 한다. 그가 사형되고 나서 그의 시체는 쓰래기 더미에 버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