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포성은 밤하늘을 가르고 남쪽으로 흘렀다.

이른 새벽, 대문 밖은 포성에 잠이 깬 사람들이 모두 대문 밖으로 고개를 빼고 바깥을 보며 고개를 휘적휘적 돌릴 뿐이었다.


포성은 남쪽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이장은 전쟁이 났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피난을 권고하였다.


나의 증조부께서는 이 많은 식솔들을 한꺼번에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이라 판단했는지 어린 딸과 갓 태어난 아들, 그리고 처를 두고 장녀와 장남만 깨워 탈출하기로 한다.


동쪽으로 개성을 지나 서울로 내려가기에는 한참이 걸리기에 피난민들은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내달렸다.


포구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너도나도 선장에게 태워줄 것을 애원하였다. 돈과 재물을 갖다바쳐야 겨우 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문은 우리의 본적지, 황해도 벽성군 추화면(당시 경기도 남연백군)을 영영 떠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조부는 전날 밤에 안녕히 주무시라고 문안 드릴 때 뵈었던 어머니 얼굴이 마지막이 되었던 것이다.


가던 중, 사람을 너무 많이 태운 나머지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선장은 전속력으로 연평도를 향해 내달렸으나, 배는 결국 침몰했다.


생사의 기로 앞에서 증조부는 두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를 놓치지 말라고 엄히 이른다. 그리고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던 틈에 증조부가 붙잡은 나무통 하나에 셋이 의존하고 연평도로 헤엄쳤다. 선장이 배에 실은 그 재물들은 모두 배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았다.


배가 부서졌기 때문에 육지로 갈 수 없었고, 한동안은 연평도에서 지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기까지 3개월은 연평도에 갇혀지냈다.


10월, 인천과 연평도 사이에 왕래가 재개되어 3개월만에 육지에 발을 디뎠다. 인천의 피난민 막사에는 황해도 사람들이 즐비하였다. 우리가 터를 잡은 부평의 어느 피난민 막사가 나의 가호적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인천에 처음 터를 잡았다.


증조부는 벽성에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란 덕에 남한에 넘어와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조부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으나 이북에서 가지고 내려온 재산이 없었기에 새벽부터 신문지를 돌리며 고학을 해야만 했다.


인천, 고양, 수원, 성남 등을 전전하면서 이사만 수십 차례였고, 중동의 뜨거운 폭양 속에서 일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힘들었던 그의 생은 그를 냉혈한으로 만들었다.


수십년 고단한 삶에 이북의 가족 따위는 잊고 살다가 어느 날 꿈에 어머니가 나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집에 날아든 쪽지에서는 95년에 어머니가 이북에서 별세하셨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늘 통일에 대한 뉴스는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번번히 좌절될 때마다 그는 실망을 넘어선 절망을 느꼈다. 언젠가는 고향에 가서 어머니 산소에 술 한 잔 올리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세월은 또 다시 25년이 흘렀다. 결국 고향 땅은 밟아보지 못하고, 70년 객지생활 끝에 남녘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