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실현을 향해 전진하는 사회의 진보주의에 뒤이어 순수한 진보주의(시간의 힘들에 대한 순수한 믿음)가 온 것과 마찬가지로, 잊힌 마르크스주의에 뒤이어 온 것은 퇴화한 헤겔주의다. 그것은 소비 지향적이고 합의적인 미디어정치의 바탕 위에서 전문가들이 통치함으로써 이성을 평화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중우정치는 전문가들의 통치 형태로 실현되며, 그것만이 증식된 향락의 온상들이 내는 불협화음을 관리하기에 적합하다. 포스트민주주의란 어쩌면 중우정치와 그것의 반대로 가정되는 지식정치(epistemocratie)ㅡ교육 제도의 룰에서 자연스럽게 두각을 나타내며, 크고 작은 향락의 무한한 온상들에 대한 정확히 계산된 경영을 성공리에 수행하는 가장 지적인 자들의 통치ㅡ의 정확한 일치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향락을 경영하는 자들의 한계는 양화하기 더 어렵고 지수화하기 더 어려운 두세 가지 결합된 감정들(낙심, 공포, 그리고 증오)을 그들이 쉽사리 경영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무능함은 좋은 왕, 민주주의적 왕이라는 의고적인 형상의 개입을 불러낸다. 그 왕은 두 몸짓을 하나로 실행하는 데 능숙할 뿐 아니라, 무리의 정념들을 가라앉히고, 데모스를 이원성의 체류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정의로운 일자의 특질을 표시하는 데 능숙하다.

  의고적인 몸짓들을 반복함으로써 한계 없는 탈근대성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민주주의적 왕의 희화적인 형상은 민주주의와 중우정치 사이의 새로운 갈등 형태가 나타나도록 내버려둔다. 이 갈등의 파장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정치의 종언의 경영자들은 틀림없이 다른 의고적 회귀들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가들에게 제기된 질문은 철학에도 똑같이 되돌아온다. 철학을 자신의 절대적 타자, 곧 제멋대로 행동하는 다자의 현사실성이라는 추문 자체 앞에 세우듯, 철학을 민주주의의 맞은 편에 자리하게 만든 철학 자신의 최초의 입장에도 동일한 질문이 되돌아 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나 철학에 대한 희화가 거리에 파다한 만큼, 철학도 민주주의의 현사실성을 다르게 사유하는 길을 더 결연히 재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민의 사무를 지도하는 것뿐 아니라, 어쩌면 철학의 가장 내밀한 관심사인 공포와 증오를 해결하는 일까지 통치 술책의 지혜에만 내맡겨두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철학에게 극단적인 추문이며, 경험론자들에 맞선 플라톤적 오만함이 치러야 할 가장 큰 대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