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를 개인에만 국한에서 판단하면 국가나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없게 된다. 당연한 것이 모든 사안에 대해 개인이 각자 알아서 판단해서 행동하고 단지 그 결과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된다면 굳이 법과 제도로써, 혹은 윤리나 도덕과 같은 사회적 규범으로 개인의 행동을 강제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자유의지주의다. 개인이란 절대 불침의 존재이며 누구도 그 판단과 행동에 함부로 관여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혐오든 차별이든 오로지 개인의 의지에만 맡겨야 한다. 개인이 싫어하면 얼마든지 혐오도 할 수 있고 차별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인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개인의 판단에 따른 모든 행동은 정당화된다. 단,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면 그 의도와 상관없이 잘못으로 여겨진다. 이를테면 내가 동성애자를 싫어하는데 아예 그런 표현도 못하게 하는 것은 내 자유를 침해한 것이므로 잘못이다.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따라서 이를 전제로 이해해야만 한다. 내가 곧 선이고 정의고 모든 가치다.

 

그들이 한국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여성은 필연적으로 결혼하면 임신도 하고 출산도 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기르려면 출산휴가나 육아휴가를 써야 하는데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민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사담당자가 그런 여성들에 대해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따라서 그것은 차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이 취업이나 진급 등에 있어 불이익을 겪는 것은 여성 자신이 가진 특징 때문이므로 차별이라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경력단절의 문제에 대해서도 사용자의 입장에서 현장에서 떠난지 몇 년이나 되는 사람을 다시 채용해서 가르쳐가며 일을 시키는 것은 비효율적이므로 인정해야 한다. 즉 그를 전제로 여성들도 알아서 자기들 살 길을 찾으라.

 

그렇다고 그들이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에 대해서만 엄격한가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들에 대해서도 엄격하다. 차라리 집안에 돈이 많아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인정하겠다. 돈이 많아서 과외도 받고 성적관리도 잘해서 좋은 대학을 독점하듯 가는 것이야 문제가 없다. 실력도 안되면서 지방에 산다고, 집안이 가난하다고,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한 경쟁이란 오로지 개인간의 경쟁이다. 사회가 배제된, 공동체의 논리가 배제된 철저히 알몸의 개인들간의 경쟁이다. 꼰대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경쟁에서 패하고 도태되는 것이 자신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각오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경쟁에서 패하고 낙오된 정당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 젊은 세대들은 헬조선이라는 말 그대로 패배와 좌절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IMF 이래로 항상 경제는 안좋았고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었다. 경제성장률도 낮지 않고 국민소득도 꾸준히 오르고 있는데 사회의 양극화로 인해 일자리도 구하기 쉽지 않고, 설사 일자리를 구했어도 수입이 만족스럽지 않다. 당장의 수입만이 아닌 내일에 대한 기대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과연 자신이 결혼은 할 수 있을까? 결혼하면 아이는 낳아 기를 수 있을까? 10년 뒤, 20년 뒤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니까 더욱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이유다. 그래도 그 이유만큼은 정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그들의 개인주의란 그동안 그들이 겪어 온 지독한 좌절과 절망의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전에도 말한 적 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는다고. 어떤 정의도 도덕도 가치도 그들에게는 무의미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저놈들은 무슨 뜬구름잡는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인가. 당장 나부터 살아야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는 왜 하고 있는 것인가.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서도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된 사람들이나 사업을 접어야 하는 영세자영업자들이다. 최저임금이 올라 형편이 나아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다. 어째서인가? 바로 그들이야 말로 자신들이 이입할 수 있는 동질감을 느끼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 오로지 고위직만 바라보며 주장하는 일부 여성주의자들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남성들이 더이상 여성주의자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게 된 이유다.

 

내가 살아야 하니까. 당장 나부터 살아야만 하니까.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들을 살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알아서 살아라. 누군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싫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간섭하고 관여하는 것도 싫다. 그냥 서로 남으로 철저히 별개의 개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공공의 영역에 대해서도 그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정부가, 권력이, 사회가, 개인이 자신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그냥 조금이라도 관여하려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얼핏 진보적이면서 한 편으로 보수적이기도 한 것이다. 보수의 권위주의에도 반대하면서 진보의 사회주의적인 성향에도 반발한다. 공공의 영역보다는 철저히 개인의 감정과 직관과 욕망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것들만이 오롯이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다. 자신들은 그런 지독한 절망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엄혹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도 그들은 그래도 민주화된 내일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이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는 목표로 할 수 있는 나라밖의 모델들이 있었다. 공산주의 소련이든, 민주주의의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이든.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새 그들 나라들과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소련은 이미 붕괴되었고, 민주주의 선진국들 역시 누적된 사회의 모순들로 말미암아 활력을 잃고 바로 대한민국과 같은 문제들로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을 모델로 삼아볼까? 아니면 일본을 본받아볼까? 그런데 북유럽도 생각한 것처럼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고민해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포기해 버릴까? 그냥 예전으로 되돌아가 버릴까? 그런데 그동안 자신들이 정의라 믿던 것들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한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오히려 책임을 물으려 한다. 그 느낌이 어떻겠는가.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옭죄려고만 한다.

 

그러면 답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그 답을 찾지 못해 미국도, 유럽의 선진국들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지독히도 파편화된 젊은 세대들로 인해 사회가 아래에서부터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왔던 가치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지경에 와 있다. 그래서 그들 나라에서도 보다 과격한 극우집단들이 오히려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라도 길을 찾고자 하는 발버둥인 것이다. 없는 길을 찾아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싶은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윽박지르고 옭죄려고만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문제인식은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젊은 세대들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미 절망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희망조차 더이상 희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희망이란 자칫 공포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차라리 지금의 절망을 벗어나는 것이 절망보다 더 큰 공포로까지 여겨질 수 있다. 최저임금이 올라서 자신의 월급이 올라가는 것은 좋지만 자칫 지금의 일자리를 잃을 수 있고 경제가 안좋아지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좋아지는 것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젊은 세대를 설득하고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동안 기성세대가 젊은세대를 방치하고 이용하려고만 해 온 대가일 것이니. 다만 그럼에도 그런 문재인 대통령조차 젊은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지금 젊은 세대들의 이반으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것이라 기대했었다.

 

오죽하면 하태경이나 이준석 따위에 열광하는 이들이 적지 않겠는가. 하태경 의원도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었다. 젊은 남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러고 있다. 그런데도 상관없다. 가식이더라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성세대가 지금껏 그들 말고는 없었다. 누가 반성해야겠는가. 그러니까 누가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는가. 그런데도 여전히 젊은 남성들의 탓만 하고 있으니. 정작 자기들은 들어주려 하지 않으면서 자기들 하는대로 지지하지 않는다고 책임을 떠넘기려고만 하고 있다. 욕먹는 게 당연하다. 그들 역시 이런 현실을 만든 당사자들 가운데 하나다.

 

과연 차별은 옳은가. 혐오도 괜찮은 것인가. 물론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무엇이 차별이고 어떤 것이 혐오인가 고민할 여유가 없다. 사회하부구조가 사회상부구조를 정의한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 현실의 물적 토대 위에 고상한 이상도 가치도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의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길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보수가 나쁜가? 보수화가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답답한 것이다. 답은 없다.

 

출처 - https://goorabain.tistory.com/entry/%EC%A0%8A%EC%9D%80-%EC%9E%90%EC%9C%A0%EC%9D%98%EC%A7%80%EC%A3%BC%EC%9D%98-%EA%B7%B8-%EC%8A%AC%ED%94%88-%EC%9D%B4%EC%9C%A0%EC%99%80-%EC%9D%B4%ED%95%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