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기율 팔항주의에 대해서 너무도 고평가가 되면서 빠가 까를 만드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예컨대 삼대기율 팔항주의가 민심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많지만[3] 이 민심이 절대적이었냐는 것에 대해선 학계는 회의적이다. 그리 민심이 절대적이라면 초공작전 때 홍군이 왜 패했으며 주민들이 홍군이 물러나자마자 왜 국민당을 환영했는지[4]같은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엄연히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최대 패착은 인플레이션으로 민심을 잃은 것과 겹쳐져셔 중일전쟁의 큰 피해와 중일전쟁으로 단련되고 미군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 200만을 만주진공작전으로 날려버린 상황에서 무모한 점령지 사수를 남발하다가 일선부대들의 궤멸로 대륙을 말아먹은 것이다.

 

(즉 장제스의 경제정책 실책과 200만 정예군 날려버려서 진거지, 공산당이 잘해서 진게 아님 알았냐 진보 리버럴 새끼들아? 어디서 68운동에 심취해서 지랄하고 있어?)

물론 어디까지나 이런 규율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실제로는 썩 좋다고는 못하다는 의견이 있다. 규율 자체는 그럭저럭 선진적이지만 중공군이 항상 친절하거나 제네바 협약을 잘 지킨건 아니며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 전쟁에서는 교묘한 방법[5]으로 포로들을 세뇌시켜 자국 군대의 장병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중국 국민으로 국적을 변경시켰다. 포로의 신변은 둘째치고 이건 엄연히 납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만 실상이 어찌되었든, 위의 채명신 회고와 같이 당시 참전자들은 중공군을 비교적 신사적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각설하고 마오쩌둥의 집권 후반기에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사고가 터지기 시작하면서 이 규율도 단순한 군율이 아닌 마오쩌둥 우상화에 악용되기 시작했고, 팔항주의의 5번 항목을 유권 해석해 홍위병들에게 쪽도 못쓰고 당하거나 그들의 만행을 팔짱 끼고 방조하는 등 흑역사까지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

 

 

 

 

 

1948년 4월 린뱌오가 지휘하는 공산당군이 창춘을 포위했다. 그는 최고의 야전군 지휘관으로 여겨졌으며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아울러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국민당의 창춘방어군 지휘관 정둥궈에게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도시를 굶겨서 항복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1948년 5월 30일에 그의 명령이 떨어졌다.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라."
(중략)
창춘 시민들은 단체로 공산당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기나 어린아이를 병사들에게 맡긴 채 도망쳤고 어떤 사람들은 초소 앞에서 목을 맸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에 병사들은 단호함을 잃었고 일부는 무릎을 꿇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는 단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암암리에 피난민을 통과시키는 군인들도 있었다.
상부에서 이 문제를 시정시키자 또 다른 풍조가 발견되었다. 군인들이 피난민을 때리고, 포박하고 총을 쏴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덩샤오핑의 주도로 공산당은 대략 500만명 이상의 남자와 여자들, 때로는 아이들까지 징발했다. 덩샤오핑은 마을마다 엄밀한 할당량을 배정하고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곡괭이와 삽을 든 수백만의 징용자들은 전선으로 식량이나 각종 물건을 지어 나르며 병참 지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의 맨 앞에서 행군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총알받이로 이용되었다. 공산당군 선두에서 비무장 상태의 마을 주민들이 물밀듯 몰려오자 국민당군은 당황했다. 당시 일반 사병으로 국민당군의 참호를 지켰던 린징우는, 적군을 막느라 총을 쏘다가 손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비무장한 일반인에게 총을 쏜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났으며 눈을 감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사격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티베트 전쟁 내내 중국 인민해방군이 보인 잔학무도함은 너무나 심각해서, 수년동안 티베트 공산당 지도자였고 티베트 민족정치자문의원회의 부회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푼촉 왕걀마저 중국군이 저지르는 잔학 행위에 항의했다가 티베트인의 자유 투쟁에 동정을 표했다는 명목으로 투옥되었다.
또한 라싸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대 지휘관이었던 청호칭 대령은, 아군이 저지르는 끔찍한 학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티베트군으로 전향해 버렸다. 청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미군과 싸웠고, 티베트로 파견되어 군인으로 몇 년을 더 복무했다가 티베트 저항군에 가담하여 예전의 동료들과 싸웠다.
그는 티베트 동부 지방인 캄과 암도에서 일어난 티베트 저항군과 중국군과의 전투로 인해 약 4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죽었으며, 중국군 수뇌부에서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서 티베트인들에게 주는 식량 배급을 줄이고 통제를 강화하고 더 긴 시간 동안 노동을 시켜야 한다고 작성한 기록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청호칭은 롭상 타시라는 티베트식 이름도 얻었는데, 중국군의 탱크와 비행기가 티베트 민간인을 노리고, 티베트 마을들이 중국군 폭격기에게 폭격당하는 장면도 목격하였다. 청 대령은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으로 여러 해를 살다 타계했다.
- 티베탄 리뷰 1979년 10월 호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에 집결해 있던 학생과 일반시민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고 전차로 역살하는 등 무력탄압해 다수의 사망자를 냈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산둥성 텅저우 거주 장스쥔은 2009년 홍콩의 빈과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진압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정치 선전원으로 지정돼 총기를 받지 못했다. 당시 우리들의 구호는 ‘인민을 부모로 보고, 학생을 자매로 보라'였다. 우리는 인민을 부모로 본다는 군대가 결국 중화민족 최대의 비극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머리에 흰띠를 두른 학생들이 피범벅이 돼 눈 앞에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오쩌둥 기념관 우측 사거리에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나무몽둥이와 가죽띠로 시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봤다.”
당시 진압에 참가한 54군단 소속 지휘관들은 작전 후 일괄 승진했다. 주차오성 군단장은 허난성 군구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당시 사단 정치위원이었던 왕위파는 후에 홍콩주둔부대의 정치위원으로 승진한 뒤 나중에 광저우 군구 부정치위원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