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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15일 쑹쯔원(宋子文) 국민정부 외교부장은 장제스에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임정 승인의 잠정 유보'를 제안했다.
쑹 부장은 임정이 조선 내부 인민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미국과 영국이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의 독립 인정과 임정 승인은 별개 문제라는 것이었다.
또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참가하지 않았던 소련이 장제스가 주창한 한국의 독립에 관련해 어떤 의사 표시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중국, 영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의 오해를 받기 쉽다는 점도 지적했다. 특히 미국과 영국도 이 점을 고려할 것이 분명하므로, 중국이 독단으로 대한민국 임정을 승인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주석은 쑹 부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임정 승인을 유보했다.
국민당 정부는 임정 임시대통령(1919∼1925)을 지냈던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해방 후에 장 주석을 만나는 것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김구 당시 임정 주석은 1947년 2월 22일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 이승만이 난징을 방문해 조선 독립을 전후한 문제를 상의할 것임을 밝히고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고려해 많은 지원을 부탁한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해 4월 2일 구웨이진(顧維鈞) 주미 중국대사는 미국 국무부의 비밀 보고를 인용해 "미국 정부와 주한 군사당국은 이승만에 대해 불만이 많고, 미국내 한국인 대다수가 지지하지 않고, 미 군부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 들었다"라고 보고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이승만을 융숭히 접대해 미국과 소련의 의심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장 주석에게 내놓았다.
건국 자체는 48년 맞음.
3.1운동이나 임정수립이 독립운동사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민주적 절차에 의거한 국민의 인정을 받는 정통성을 내세울만한 정부는 아니거든. 즉 상징은 큰데 정통성은 도무지 확립할 방법이 없었음. 당장 일제강점기에서조차도 임정이 한국 독립운동의 유일한 서열이자 구심점이었던 것조차도 아니라서 사실상 각 세력이 다 따로 운동함.
정통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실효적인 정부로라도 인정을 받으려면 외교력이라도 엄청 쩔어야 되는데 상해임정은 그것도 아님.
결국 해방 후 주요 인사가 조직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거 참여하면서 그 족적을 남긴 게 임정의 큰 업적이자 엄연한 한계였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