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요정이 내게 다가온 게... 날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


[그래. 저 계집의 추측이 맞다.]



나는 울컥하고 성이 났다.



"그럼 날 이용하려는 속셈 뿐이었던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여기 오던 길에 추워서 얼어죽을 뻔하던 때도 네가 꼬리로 따뜻하게 녹여줬잖아. 그때도?

언젠가 내가 해줬던 요리, 그 맛 없는 걸 맛있다며 긁어먹었잖아. 그때도?

전에 한번 칭찬해줬을 때 드물게 쑥쓰러워 하던 적 있잖아. 그때도?"


[그랬지. 그런 셈이었지.

아스가르드 보복을 위해 속여 먹고, 너도 죽일 셈이었지.]



아.


여우야.


어깨에 힘이 빠졌다.


사실 별 거 아닌 건데.


여우와 대단한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저 길에서 만나서 함께 다니는, 딱 그 정도로 여겨왔는데.


그런데 내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그런데 내 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



내가 혼자 마음에 품은 문장을 여우가 소리내 발음했다.


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여우를 보았다.



[머리론 아스가르드를 부수는 게 내 역할이라고 되뇌었는데

가슴이 따르질 않았어.


가까이에서 지켜본 넌 그냥 애였단 말이야.

그냥... 그냥 어린애.

사리분별 못하고, 겁 많고, 언짢으면 표정에 드러나는 어린애.]



내가... 내가 애라고?


아닌데. 난 어른인데.


겉은 애지만 어른인데.


완전 어른인데. 진짜 어른인데. 짱 어른인데.



[이 가슴이 속삭였어.

애를 속여먹을 거냐고. 애를 죽일 거냐고.]



답지 않게, 여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답지 않게.



[난 할아버지에게 갓난아이일 적부터 살해 협박을 받으며 자랐어.

내 유년기는 조부가 보낸 자객에 떨며 보낸 일상이었어.

밥상에 앉으면, 그중 어떤 찬에 독이 들어있을지 그것부터 우선 고뇌해야 하는 시절을 보냈어.

그런 내가 애를 죽여야 한다고? 저렇게 어린 애를? 여린 애를?]



여우의 말투는 차분해졌다.


물론 귀를 기울이면, 목소리에 떨림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물론 이 마을에 온 후로도 주저했다.

동족들이 타죽으며 내던 비명이 귀에 맴돌았으니까.

하지만 벨, 그 좀도둑 얼간이보다 못난 놈이 되기도 싫었다.

그래서 겁쟁이처럼, 계속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할지.

지금껏 쭉.]


"지금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빗자루 여성이 "하양아!" 하고 신호를 주었다.


흰 고양이가 온 몸으로 드러누워 여우의 입을 눌렀다.


여우는 무게를 이겨내며 악착같이 말했다.



[드디어 난 포기했다.

아스가르드를 부수겠단 망상도, 애시르 신족을 멸망시키겠단 흉계도.

오늘부터 나는, 한낱 소녀의 한낱 요정이다.


이봐 안경잽이 인간!

손을 잡고 처리하자고 했지?

어른한테 그렇게 건방진 제안 하는 거 아니야!]




*



일단 변신이 되니 싱거웠다.


곰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마리 혼쭐을 내주자 남은 녀석들은 알아서 패주했다.


변신한 나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저승사자를 먹은 이는 내가 아니란 건 알지만, 다들 두려운 것이다. 마법소녀가.


뇌리에 깊게 박혀버린 것이다. 마법소녀가.


날 따라온 걸까.


샘 아저씨랑 아냐 언니도 뒤늦게 도착했다.


나만 안 보이는 걸 꺼림칙하게 여겼는지, 마법소녀의 모습인 날 보고 "댁이 설마 꽃집 처자를...."이라며 말을 흐렸다.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둘다 나 좀 도와줘요."



나는 대뜸 그렇게 대꾸했다.


다들 날 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말할지가 중요하다.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신은 신앙을 먹고 산다고 했지.



"변신 해제."



'파앙-!'


수수하던 마법소녀 복장과 지팡이가 광자가 되어 사라졌다.



"엇 쟤는-."


"쟤 그 꽃집의-."


"벨님 딸 아니야? 쟤가 마법소녀였단 말이야?"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맞아요! 나 마을 변두리에서 꽃이랑 차 파는 걔에요!

이번에 점원 둘 새로 들어온 그 찻집 사장, 걔에요!

여러분이 서있는 그 마을을 만든, 벨 아버지 딸! 저에요!"



군중의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이 정돈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여러분이 마법소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아요!

헬헤임의 저승사자라면 가끔식 자연발생하는 악령들도 손바닥 뒤집듯 간단히 처리하는 괴물들이에요.

그런 저승사자를 먹었다는 건, 그 죄질에서나, 힘에서나 두렵겠죠! 나라도 두려웠을 거에요.

하지만... 하지만 저도 마법소녀잖아요!

절 봐요!

다른 어떤 마법소녀라도 다 잊고, 절 봐요!

여러분이 봐왔던 저는 어떤 아이였어요?

무서운 아이였어요?

아니면 나쁜 아이였나요?"



주민들의 술렁임이 가라앉았다.


내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날 보고 있었다.



"전 여러분 가슴에 꽃이 피었으면 해서 꽃집을 열었어요!

대화재로 다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그렇게 아픔만 가득하잖아요.

꽃 한송이 보고, 차 한잔 마시면서 마음을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다 해서 가게를 차렸어요.

제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으로 보이세요?"



침묵하였다.


긍정이 아니란 점이 모쪼록 고마웠다.



"저는 늘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싸웠어요.

잠깐 흔들렸지만 처음엔 그랬고, 지금도 그랬어요!

악령이란 거 무서웠지만, 때로 강했지만 꾹 참고 싸웠어요!

그래야 하니까. 그러고 싶으니까.

여러분은 악령화 때문에 기억이 안 나시겠지만."



악령이 되면 기억의 일부와 이성을 잃는다.


악령에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도, 이성과 달리, 한번 잃은 기억의 파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하고, 결여된 그대로 남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악령과 싸우다 죽었으면,

다른 무언가의 사유로 죽었다는 식으로 왜곡되거나

혹은 죽은 건 기억하되, 악령에 의해 죽었다는 걸 까맣게 잊게 되거나.


드물게는 자신이 그때 죽었단 기억 자체를 잃기도 하고.  


잃는 파편은 한번에 한 종류가 아니었다.


덕분에 주민의 대부분은 자신들을 처음 이 마을로 끌고 온 마법소녀가 나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었다.



"저 혼자만 하진 못했어요. 절 도와준 사람이 있어요!

아프다고 엄살부리던 절 대신해서 지금, 싸우는 사람이 있어요.

저보다 어린 분인데, 저보다 어리숙한 분인데, 그 분이 저 대신해서 싸워주고 있어요!

성공하면, 모든 괴수가 사라지진 않더라도 한참 많은 수의 괴수가 줄 거에요."



그래도 믿는다.


내가 주민들을 구해왔던 모든 노력이 허사는 아니리라고.


그리 믿고 싶다.



"여러분! 여러분 도움이 필요해요.

제가 아버지 장례식 때조차 혼자서 다 하려고 했잖아요.

이번에 저 혼자 못하는 일이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

이 어리고 나약한 꽃집 여자애는 혼자서 못하는 일이에요.

여러분 도움이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나는 이 마을이 좋다.


아버지가 세우고, 삐약이와 내가 사람들을 모은 마을.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인심이 따뜻하단 점이다.



"뭘... 하면 돼요? 누나."



제일 먼저 물은 이가 야채 가게 칼린이었다.


고맙게도, 칼린이었다.


난 저 애가 물에 빠졌을 때 끌어올려줬을 뿐인데.


저 애와 딱 그 뿐인 사이였는데.


고맙게도, 칼린이었다.


'신은 신앙을 먹고 사는 법이다.'


나는 재차,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손을 모아주세요.

그리고 사람 이름 하나를 떠올려주세요."


"누구 이름이요?"


"아르바. 지금 싸우고 있는 소녀의 이름이에요."



'신앙'이라면 이보다 더 확실한 자세는 없을 것이다.


오늘 시장에 나온 40명 전원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대상은 우리 가게 점원이었다.




*



여우의 고백을 들어서일까.


어쩐지 몸에 힘이 솟았다.


몸을 조금 비틀자, 날 구속하던 시멘트가 깨져버렸다.


아무래도 힘이 조금 많이 솟는 모양이었다.


몸에서 은빛 오라도 은은하게 나왔다.


머리에는 여우귀가 생기고 엉덩이에는 펑퍼짐한 여우 꼬리가 생겨났다.


단지 마음에 응어리가 풀린 것치곤 과한 반응이었다.



[너 그거...!]



여우가 움찔하였다.


여우는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게 어떤 현상인지.


나중에 물어봐야지.


적 마법소녀와 요정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인 듯했다.



"여우야."


[뭐, 뭐야.]


"나 상처 없이 이겨야 해.

근데 난 마법식을 몰라.

아무리 상상해도 난 때려부수는 계열 밖에 안 떠올라.

그치만 내가 쏴야 하는 마법은 그게 아닌 거 같아.

적절한 마법이 있으면 네가 알려줄래?"



자신의 누에 대해 화를 낼 거라 여겼던 걸까.


[아, 아, 어, 그래. 그쪽! 그쪽 말이지?]하며, 여우는 말을 더듬었다.


여우가 요정의 구속을 떨쳐내고 내게 달려왔다.


폴짝하고 내 어깨에 올라와서 여우가 왱알왱알 속닥거렸다.


여성은 "뭐야... 뭐냐고요"하며 지팡이를 부르르 떨었다.


여성이 마그마를 뿜길래 무반동포를 격발했다.


반동으로 지면이 흔들거렸다.


뿜어낸 용암은 포탄에 가로막혔다.


여성이 빗자루에 손을 대자 두터운 유리벽이 생성되었다.



-내 것도 냐아...!



여성의 요정이 유리벽 뒤에 얼음으로 만든 장벽도 쳤다.



"두꺼워보이네."



유리벽만으로도 두께가 굉장했다.


특수한 유리인지 주먹으로 쳐도 부숴질 것 같지 않았다.



"빵야!"



대포 앞에선 장사가 없었다.


'와장창!'


두뼘이 훌쭉 넘어가는 굵기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떨어졌다.


충격에 넘어져서도 날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여성.


여우에게서 들은 마법을 시행했다.


포탄에 마법을 담고....



"이거 맞지? 마법소녀의 힘을 없애는 마법."


[그래. 신체의 피해는 일절 없을 거야.]



'쿠웅-!'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


크아아악 앞으로 1화
....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