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피와 쾌락에 절인 듯한 발할라라고 하더라도 사람 사는 곳이라 그런지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수라의 길을 걷게 만드는 전쟁터에 가는 건 필수라지만, 그 뒤에 남녀가 몇 명이고 섞고 섞이는 난교의 장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듯 부부간의 연을 맺는 걸 허락해 주었다.

 

구성원이 전부 남자뿐인 에인헤랴르와 전부 여자뿐인 발키리.

몸이든 마음이든 엮이게 되는 건 필연인지라 서로 어느 쪽이 좋은지 확인하고 손을 뻗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선택의 여지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반강제나 다름없는 선택이었다. 

많은 남자 아래 깔려 겁탈당하고 범해지는 걸로도 모자라 스스로 봉사해야 하는 삶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한 남자만을 집어 부부로서 살아갈 것인가를 내밀 뿐이었으니까.

 

그 외엔 선택지가 없었으니, 발키리로서는 망설이게 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어영부영 선택을 미루다가 그대로 저기 세 남자에게 범해지는 한 발키리가 예시 중 하나였다.

 

“…으.”

 

오딘과 프레이야가 내어준 신혼의 방.

 

아내로서 역할을 다하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이 이 공간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아픈 몸을 이끄는 동안 읽었던 서적들이 있었기에, 이론적으로는 무엇이든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빠삭한 지식을 갖추었다.

스승으로서는 맡은 바 책무를 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내로서는 영 아니었다.

그것도 동생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차마 그 말을 꺼내지는 못해서 결국 이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신 차리자.”

 

두 손으로 얼굴을 짝 쳤다.

 

말하지 못한 게 꼭 눈치가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무작정 싫다고 할 게 아니라,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밤이 찾아오고, 저들만의 연회가 시작되어 갈 때 방의 문이 살포시 열렸다.

바짝 긴장한 몸을 세워 앉은 뒤 이제 막 씻고 들어오는 엘리엇을 마주 보았다.

 

“어, 와, 왔어…?”

 

“왔어…?”

 

엘리엇은 갑작스레 건넨 가벼운 말투에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다.

 

나도 가면을 쓰고 처음부터 끝까지 발키리로서 위엄을 지키라고 한다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이 좋지 못하다는 걸 알기에 금방 내려놓았다.

가면을 써봤자 금방 더럽혀질 거, 조금이라도 지키고자 운을 띄웠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네 형이야. 눈을 뜨고 보니 발할라에 발키리로서 오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너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제 막 부인이 되었다는 여자가 대뜸 자기가 형이란 소리를 하고 이상한 말을 늘어놓으니,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다가오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 굳어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 이 진실을 털어놓음으로써 부부로서의 관계는 유지하되, 아무와도 몸을 섞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이어갈 수만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말이더라도 해낼 자신이 있었다.

 

“내가 말한 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모두 사실이야.”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기백이 장난 아니었다. 발할라에 올 정도이니 말할 것도 없긴 하지만, 그걸 직접 마주하게 되니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분위기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난, 네 형이었다. 전장에서 전사로서 죽지 못한 탓에 에인헤랴르가 되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 누군가를 가르치는 존재로서 오게 되었을 뿐이야.”

 

“…그럴 리가.”

 

나지막이 토해내어진 말 한마디.

 

나를 어떤 눈으로 봐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눈동자였다. 갈 곳을 잃은 눈은 격하게 흔들리다가도 금방 내 앞으로 쏠려 감정을 가득 담았다.

 

“그럴 리가.”

 

“심장이 약해 오래 뛰지도 못하고, 팔과 다리는 나날이 쇠약해져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인생을 살던, 네 형이야.”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러면, 왜 그걸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던 건데? 왜 처음부터 내 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건데? 급하긴 했어도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해서 상황을 벗어나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이건 오딘과 프레이야께서 인정해 준 혼인이라고.”

 

쿵쿵 다가온 그의 얼굴이 가까이 들이밀어졌다. 얼굴과 얼굴 사이에 세워진 손가락 하나가 격하게 흔들렸다.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맺어진 혼인에 부담스러워하여, 거짓말로 이 상황을 피하려는 듯이 보이는 듯했다.

 

“원래 형제가 몸 좀 바뀌었다고 몸을 섞는 건 말이 안 되지. 신들께서 아무리 그것마저 무시하고 허하셨다고 한들, 너와 난 원래 인간이었고 형제였는데 받아들이는 데엔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혼인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기 위함이야. 그래, 차라리 잘 됐어. 원래 남자였던 내가 저기서 남자들과 몸을 섞느니 이렇게 자리를 잡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거야? 혹시 몰라 부부로서 자리를 잡으려고?”

 

“처음부터 노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생각지도 못했었으니까.”

 

엘리엇은 흥분해서 씩씩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천천히, 엘리엇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이 정도는 받을 수 있잖아. 나도 사실은 전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안 그래도 상심이 큰 와중에 이렇게 남자를 상대하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게 내 책임은 아니잖아. 애초 왜 여자의 모습인데? 발키리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던 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르지만, 스승으로서 능력을 어느 정도 좋게 봐주신 걸지도 모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쩔 줄을 몰라 고개를 휘휘 돌렸다. 온몸에서 올라오는 열을 가라앉히고자 손으로 부채질하기까지 했다.

 

입술을 짓씹고 엘리엇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무엇을 바랐든, 아내로서 역할을 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스승이 되어줄 수는 있어.”

 

“…스승은 필요 없어. 침대에 앉아서 종일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직접 전사로 발탁되어 뛰어다녔던 건 나야. 형이 뭘 안다고 날 가르친다는 거야?”

 

그 말에 눈썹이 씰룩였다.

 

안에 잠긴 감정이 찰랑이는 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넘칠 거 같아서, 입꼬리가 비틀렸다.

 

내가 뭐 움직이기 싫어서 책만 읽었나. 왜 말을 그렇게 하는 거지?

내가 이론을 조금 더 알고 있으면 어때서 그렇게 무시하는 거지?

 

내가 바랐던 것을 전부 다 가져가 놓고도 모자라서, 나를 그렇게 낮잡아 보고, 그 무엇에도 의미가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걸 보니 글러 먹은 놈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고 지금이고 형은, 그냥 안주하고 싶을 뿐이잖아.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이잖아. 주어진 역할에서부터 눈을 돌리려고만 하잖아?”

 

“…이런 일만 아니었으면, 나도 받아들였을 거야.”

 

솔직히 남자를 상대하는 일만 아니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피를 흘리고 죽어가더라도, 다시 일어나 싸우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남자였던 내가 여자가 되어서 이런 일이나 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딘의 아래에, 로키라는 신의 장난질에 걸려든 건진 몰라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이런 일만 아니었으면.”

 

“…그래, 나도 형이었다고 하는 여자랑은 하고 싶지 않아. 오딘께 어떻게든 잘 말해서 그만둔다고 말해볼게.”

 

“어?”

 

엘리엇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왜?”

 

“아니, 부부를 그만두자는 게 아니었어. 그냥, 이런 관계만 유지하자는 거였지.”

 

“…필요 없어. 부인으로서 있는 게 아니라면 결국 아까 말한 스승으로서 있는 것뿐인데, 나는 스승 같은 거 필요 없거든.”

 

“나 좀 살려준다고 생각하고 조금만, 조금만 양보해 주면 안 돼?”

 

“내가 전쟁에만 미친 것도 아니고, 죽기 전에도 여자 한 번 못 안아 봤는데 이렇게 묶여 있어야 하는 거야…? 저기 끼어서 하고 싶지는 않아. 안 된다고 하면 나는 다른 발키리에게 부탁할 뿐이야.”

 

차갑게 내치는 엘리엇의 모습에 순간 울컥했다.

 

이렇게 다른 남자의 손에 농락당하는 삶을 살기 싫다고 설명까지 다 해줬는데도 들어주지 않는 엘리엇이 밉고, 또 미워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괜히 이승에 있었던 일들까지 전부 떠올라 속을 헤집는 듯했다.

 

“지금까지 너 원하는 대로 전부 해놓고서, 이거 좀 해줄 수 있잖아? 나는 원하는 거 하나 얻지도 못하고, 쇠약해 죽어서도 이렇게 끌려다니면서 살아야 하는데… 내 처지를 네가 알기나 해?”

 

가슴을 팍팍 치며 호소했다.

 

그러나 엘리엇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몸이 힘드니까, 움직이는 게 힘드니까 수발을 들었어. 형 하나 때문에 여자 만나는 게 힘들어졌고, 형이 바라는 걸 대리만족이라도 시켜주겠다고 전쟁터 나가 싸우느라 내 삶도 제대로 못 살고 결국 죽었어. 그런데 뭐가 어째?”

 

“내가 짐이었다고? 그래, 그럴 거면 처음부터 차라리 죽이지 그랬어. 버리지 그랬어? 괜히 책이라도 읽어서, 어설퍼서 도움도 안 되는 스승이나 하겠다고 발키리가 된 게 문제지.”

 

“살려둬서, 그래서 책을 읽어서 이런 꼴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게 내 책임이라고?”

 

스스로 추하단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지고 싶지 않아서 아무런 말이나 가져다 붙였다.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어떻게든 맞춰보겠다고 억지로 욱여넣었다.

그래서 더욱 앞뒤가 말이 안 맞았고, 그것이 엘리엇의 속을 긁었다.

 

“…그래, 미안해. 그냥 형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나는 나 알아서 살게.”

 

그리고 그 끝에, 툭 놓아버린 엘리엇의 해탈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깊은숨을 내쉬며 홱 돌아가는 엘리엇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대로 놓아준다면 내일부터는 다시 연이 없는 발키리가 되어, 남자들과 몸을 섞게 될 거란 사실이 가까이 다가왔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후다닥 움직여 엘리엇을 붙잡았다.

 

“에, 엘리엇.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도와줘.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줘.”

 

“내 인생은, 늘 형을 위해서였어. 그런데, 죽어서도 형을 위해서라니 말이 안 되지. 형이라고 하고 싶으면 그렇게 살아.”

 

뿌리치는 손길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찌나 센지,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엉덩방아를 찧었음에도 아프다고 매만질 틈이 없었다. 자세를 고치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들어 다리를 붙잡았다.

 

“제발, 제발… 이건, 아니잖아. 맨날 침대 위에서 지내다가, 이런 삶을 살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응…? 뭐, 뭘 바라? 스승이 싫으면, 조금, 조금은 해줄 수 있어. 차라리 네가 조금씩만 봐줘…”

 

“…….”

 

“형이라고 하는 게 싫으면 그냥 리라라고 불러도 돼. 어차피 여기선 리라잖아. …나, 나는.”

 

나는 안타까운 사람이잖아.

 

그 추악한 말이 입에 담기는 일은 없었다.

 

늘 나를 안타깝게 여겨주고, 동정하여 나를 위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나를 동정하는 눈빛에는 수치를 느끼는 빌어먹게 모순된 감정은 나를 지독하리만치 괴롭혔다.

 

다리를 붙들고, 눈물을 머금은 채 엘리엇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포기한 듯 내려다본 그 눈빛에서 조금이나마 양보를 바라는 내가 참으로 웃기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