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현대 #일상 #피폐 #드라마 #노맨스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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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 Chapter 2. 죽어버린 채 살아가기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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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밥을 일단 먹기는 해야 했기에, 난 냉동실에 쳐박아두고 있던 냉동 볶음밥을 하나 꺼내서 먹었다. 그냥 대충 후라이팬에 쏟아준 다음에 적당히 데워주면 끝이라 라면처럼 편해 이거.

원래는 안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동안 거의 제대로 뭘 못 먹은 게 떠올라서 그랬다. 물 마신 거랑 알바 가기 전에 뜯어서 먹은 초코파이 한 개 말곤 진짜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까. 옛날에는 진짜 굶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일부러라도 먹는다. 지금처럼.

괜히 요리를 취미로 두고 나서 살이 찐 게 아니라니까? 뭐, 그건 살이 쪘다기보다는 정상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이 좀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에는 이게 사람 몰골이냐는 소리도 이따금씩 듣곤 했었지.

여하튼, 그렇게 대충 밥을 먹고 나서 소파에 앉아있다 보니까 카톡이 하나 왔다.


[잘 해결됐나] - 카페사장님 (20:13)


사장님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연락을 하긴 했어야 했지. 아무리 그래도 불가피한 일로 일찍 퇴근하게 해주신 거니 말이다. 까먹고 있었네.


[덕분에요] - 나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 나


이상한 오해 같은 것도 없이 조용하게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따지자면 해결된 게 맞지. 다른 일이 따로 벌어지지도 않았으니 이 이상으로 자세하게 적어서 보내진 않았다. 길게 적어봐야 의미도 없을 테고.


[다행이네] - 카페사장님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보자] - 카페사장님 (20:14)

[네 감사합니다] - 나


사장님도 따로 더 궁금한 건 없었는지, 그렇게 짧은 채팅은 끝나게 되었다.

"……으음."

사실, 이걸로 나랑 가까운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내가 TS 증후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셈이었다. 내 인맥이 넓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대부분이다.

그래. '대부분'은 다 알게 됐다고.

대부분이라는 건, 전부는 아니라는 의미지. 마지막으로 알려야 할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오늘이…… 1월 25일."

그리고 설날은 2월 12일.

설이 그리 머지 않았다.

곧 친척들을 만나야 했다. 고모랑 고모부한테 가야지. 다른 때는 몰라도, 도의적으로 최소한 명절 때만큼은 얼굴을 비춰 드려야 한다. 물론 그쪽에서 그렇게 하라고 한 건 절대 아니지만, 내 양심이 허락을 못 해.

구태여 멀리 가지 않아도 내가 생활비를 지금 고모네에게서 얻어먹고 있다. 알바를 다니는 지금은 사실상 형식적인 돈일 뿐이지만, 알바 안 다닐 때는 저 돈으로 생활을 한 것도 사실이고.

이거 말고도 고마운 걸 생각하자면 끝도 없지만 일단은 넘어가고.

이대로는 친척도 날 못 알아볼 게 뻔했다. 의진이도 날 전혀 못 알아봤고, 트리오들은 알면서도 내 꼴을 보고서 얼어붙었으니까 여기에 대해선 더 말이 필요 없겠지.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고모네한테도 연락을 해야지. 너무 늦게 알려드리면 서운하실 거다. 미루다가 또 의진이 건처럼 성가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귀찮은 일은 더 이상 사절이다.


[형] - 나 (20:16)

[머함] - 나 (20:17)


그래서 나는 바로 사촌 형한테 연락을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렸다, 생각났을 때 안 해두면 내 성격에 귀찮다고 또 미뤄버릴 게 뻔하니까.

고모네 식구로는 사촌 형이랑 사촌 누나, 그리고 고모랑 고모부가 있다. 그 중에서 연락하는 데에 가장 부담감이 없는 사람이 형이라, 사촌 형한테 먼저 연락을 하기로 했을 뿐이었다.


[롤] - 현우형 (20:18)


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


[하는중임?] - 나

[ㄴㄴ 방금 끝남] - 현우형

[이김?] - 나

[ㅇㅇ] - 현우형

[ㅊㅊ] - 나


지현우 형. 나보다 한 살 위. 롤을 좋아하지.

반대로 나는 롤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냥 장르가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할 줄은 알지만 구태여 내가 찾아서 하는 일은 없고, 그나마 롤토체스 정도만 정말 가끔씩 하는 정도다.

물론 형이 롤만 하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넘어가고.


[그래서 왜 연락했음?] - 현우형 (20:19)

[아] - 나

[알려줘야 할 게 있어서] - 나

[?] - 현우형

[어떤 건데] - 현우형


……솔직히 이런 걸 말해야 할 때마다 좀 돌려서 말하고 싶긴 한데, 어.

난 그만한 재주가 없다. 여자가 됐다는 걸 어떻게 돌려서 말해.


[나 여자됨] - 나

[?] - 현우형

[TS 증후군이라고] - 나

[찾아보면 나올 것] - 나


그래서 나는 그냥 직진했다.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지만, 아님 어떡하라고. 최선도 차선도 없을 때는 차악이라도 골라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우 형도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갑자기 듣기에는 너무 날벼락 같은 소식이긴 하지.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아니, 이게 좋은 소식일 리는 없잖아 근데.

그래도 이번에는 따로 걱정이 들진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나를 온전히 받아줬던 것처럼, 친척들도 그렇게 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실, 항상 그래왔기도 했고.

- 지이잉

그래도 몇 분이 지나자 전화가 걸려왔다. 당연하지만 현우 형이었다.

"여보세요."

- "……."

형은 내 목소리를 듣곤 말이 없었다. 어째 표정이 상상이 가는 건 내 착각일까.

"여보세요?"

- "……이거 무슨 몰카 같은 거 아니지? 사실 동생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거나."

"생겼겠냐고. 몰카는 뭘 몰카야."

몰카도 이 정도면 광기야. 어떤 미친 새끼가 이런 걸로 몰카를 해.

하루아침에 여자가 된 게 더 미친 일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 "진짜야? 내가 아는 그 동생 맞아? 노을이? 진짜로?"

"진짜지 뭐. 형네 집 2층 침대에서 자고 다녔던 악몽에 시달리는 노을 맞어."

- "뭔데 대체? 이게, 이게 진짜 현실에서 가능한 거라고?"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라고들 하잖아? 그냥 형도 받아들여. 되돌아갈 방법 같은 것도 없다더라."

- "와, 하……."

형은 그냥 어이가 없는 듯했다.

뭐, 사실 그 심정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지만 말이다. 나도 아직 어이가 없어. 난 여자가 되고 싶단 마음 따위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남자였단 말이야.

과거형을 쓴다고 해서 내 정신까지 여자가 됐다는 뜻은 아니다. 여자 좋아했던 남자가 몸 바뀌었다고 바로 그렇게 되면 그게 더 이상해. 바뀔 거라는 생각조차 안 들지만.

- "참…… 사람 팔자가……."

"그건 나도 아니까 됐고. 그래도 형 정도면 반응이 양호하네. 다른 애들은 형보다 더한 반응도 있었어가지고."

- "……쯧, 그래도 너 말하는 거 보니까 우리 동생 맞긴 하는 것 같네."

"……그거 지금 몇 번째나 듣고 있는 말이라서 그런데, 그렇게 내 말투에 문제가 있어 형?"

- "그런 것보다는 그냥 딱 목소리만 바뀐 느낌이니까 그런 건데.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고."

"좋게 안 들려……."

이제는 형까지도 이렇게 말하네. 이제는 그냥 체념하기로 했다.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기도 하고.

"그건 그렇고, 나 이번 설 때 한 번 내려갈 생각이라서. 그래서 연락했어."

- "아, 오려고?"

"당연히 가야지. 언제는 안 갔다고. 근데 내가 이렇게 됐다는 걸 안 알려주고 가면 그, 곤란해지잖아?"

- "그렇네. 알아보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겠구만."

"그러니까."

명절 같은 날은 카페 알바 같은 것도 없다. 정확히는 카페가 아예 문을 닫아버리지. 작은 카페라서 그렇다.

고모네 집을 안 갈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갈 이유만 넘쳐나니까. 이건 지금까지도 그래왔던 거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다. 내가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서는.

- "그래서, 이건 내가 가족들한테 말해두면 되는 거지? 너 TS 증후군 걸렸다는 거."

"응. 부탁해."

- "엄마한테도?"

사촌 형의 엄마라면, 고모다.

"마찬가지로 해줘."

- "그래."

……아빠의 누나기도 하지.

- "이번에도 거기 갈 거야?"

"가야지……. 매년 갔었고."

- "그러면 그건 그대로라고 알려둘게."

"고마워."

내가 변했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딱히 변하는 건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으니까.

이를테면, 과거라든가.

……그래서 고모랑은, 설 전에 조만간 가야 할 곳이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네. 누구보다도, 변해버린 내 모습을 알아봐야만 하는 분이기도 하니까. 굳이 형이 따로 물어본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셀카 같은 거라도 보내드려야 하나?

"근데 좀 궁금하긴 하다."

- "뭐가?"

"친척들이 나 봤을 때 어떤 반응일지. 형은 그렇다 치고 누나 반응이 궁금하네."

- "네 친구들은 어땠길래 그래? 뭐 더한 반응도 있었다면서?"

"얼어붙거나, 아예 날 못 알아보거나."

- "우리라고 딱히 다르진 않을걸."

"그런가?"

- "나도 처음엔 진짜 네가 무슨 몰카라도 찍나 했단 말야. 사실 지금도 실감이 안 난다고. 머리로만 이해한 기분이라고 지금."

"지금도 좀 어색하지? 내 목소리."

- "어색한 수준이 아니라니까? 지금 어, 딱 그거야. 머리에 필터 하나 달아두고 어 이건 동생 목소리야 하고 있다고."

"뭐야 그게. 그래도 이해는 가. 나도 이제야 좀 적응이 된 느낌이라서."

- "적응……. 그러고 보니까 그거, 괜찮은 건 맞지?"

"여자 된 거?"

- "어. TS 증후군 가지고 뭐 좋은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어서."

걱정스러운 말투가 전화기에서 새어 나왔다. 애초에 정보 통제니 뭐니 하고 있는 병인데 좋은 얘기가 나올 수가 없긴 하지.

굳이 정보 통제가 아니더라도 애당초 괴담이 많은 병이기도 하던가.

"딱히 안 괜찮진 않아. 어색한 거랑 또, 내가 이렇게 됐다는 거 계속 주변에 연락하고 했던 거 빼면 아무것도 없어."

- "좋은 건가?"

"좋은 건 아니지만…… 그냥, 크게 의미가 없을 뿐이지. 이거 때문에 나쁜 일이 벌어졌다거나 한 것도 아직은 없고."

나도 처음에는 걱정을 엄청 많이 했었다. 혹시라도 이 병에 걸려버린 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나랑 멀어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능성이 낮다는 걸 알면서도,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는 또 아니라서.

전부 기우였지. 내 사람들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런 나조차도 받아들여줬다. 멀어진다든가 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 TS 증후군이라는 병은 내게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물론 생활이 좀 달라지는 정도의 문제는 있지만 솔직히 내게 부담이 되는 수준은 아니고.

득은 없지만, 딱히 실이랄 것도 없는 셈이었다. 오히려 내 인연이 깨지지 않을 거란 확인을 시켜줬다는 관점에선 오히려 득이기도 한 걸까.

- "너 답네."

"그런가."

그렇다고 느닷없이 성별이 바뀐 걸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만, 어쨌든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든가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기에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거고.

그런 나를 보고서 형은 그리 말했다. 나 답다, 라니.

뭐, 지금은 좋은 의미로 쓴 말일 테니까.

- "알겠다. 네가 괜찮다면 된 거지. 그러면 음, 설 때 보자고. 나한테 연락도 좀 자주 하고."

"그래. 끊어."

더 전해야 할 말 같은 건 없었기에, 나는 여기서 전화를 끊었다.





*****





[트리키타워 할 사람] - 설은찬 (20:52)


전화를 끝내고 나서 대충 씻고 나오니, 트리오 톡방에 메시지가 좀 와 있었다. 언제나처럼 게임 하자고 하는 내용이었지만.

트리키 타워라면 대충 물리엔진 들어간 테트리스다. 실로 설은찬다운 게임 선택이지 않은가. 그나마 뿌요뿌요 테트리스 같은 걸 하자고 안 한 게 다행이지.


[ㄱ] - 김민재 (20:53)

[ㄱ] - 설은찬

[난 공부중] - 서진혁

[ㄲㅈ] - 김민재

[딧코 ㄱ] - 설은찬

[ㅇㅋ] - 김민재


이렇게 초성으로도 대화가 아주 잘 성립하는 걸 세종대왕이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나도 딱히 지금 할 게 없는데. 긴 머리에서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게 거슬리긴 하지만 어차피 자연건조 시키기로 했으니 정말로 지금은 할 게 없었다.

……옷 정리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음.

조금 고민하다가, 오늘은 나도 저 게임 대열에 껴보기로 했다.


[나도] - 나 (20:56)

[딧코] - 김민재

[껴도 됨?] - 나

[아] - 나


참으로 칼 같은 답장 속도구나. 내가 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답장을 보내는 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반응속도가 있어야 가능한 거지? 내가 폰 자판 치는 속도가 느린 것도 절대 아닌데.

생각해봐야 의미 없겠지. 어이가 없는 것도 잠시, 나는 디스코드 음성채팅으로 들어갔다.

"해위."

- "누구…… 아, 노을이구만."

살짝 당황한 듯한 민재의 목소리였다. 역시 여자 목소리가 아직은 익숙하진 않은 건가. 이해는 가.

"아직 시작 안 했나 보네?"

- "설은찬 자식도 방금 들어왔어."

- "누워있는 게 편해서."

은찬이는 좀 늘어지는 듯한 말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이크 음질이 좋은 걸 보면 침대는 아닌 것 같지만.

- "도대체 저 나태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너도 만만치 않은데."

- "……왜 설은찬이 말해야 할 것 같은 대사를 네가 말하는 거지? 노을 씨?"

"틀리냐?"

아무 이유 없이 말했던 건 아니었다. 은찬이는 성격이 느긋하지만, 민재는 인생을 느긋하게 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약간 계획 없이 사는 듯한 모습이라.

결국 도긴개긴이라는 거다. 누가 누구 보고 뭐라 할 자격 같은 거 없어.

- "아 몰라, 걍 둘 다 빨리 들어와."

민재는 짜증난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반박은 안 하는 거 보니까 자기도 왜 내가 그렇게 말했는지 알고는 있구만.

진혁이는 공부 때문에 정신이 없고, 의진이는 음악이라는 꿈을 두고 학교 공부를 접은 거고, 은찬이도 인터넷 방송이라는 걸 도전해보고 있지만.

민재는 그냥 놀고만 있다.

……나처럼 미래를 버린 것도 아니면서.





*****





얼마 안 있어 시작된 게임의 결과는, 사실 뭐 뻔했다. 테트리스 게임이니까.

민재 꼴등, 나 2등, 은찬이 1등.

- "진짜 설은찬 저 새끼는 괴물이라니까?"

"동감."

테트리스 고인물이라는 말은, 물리엔진 테트리스라는 게임에서도 크게 다르게 적용되진 않았다. 분명 일반적인 테트리스랑은 사용되는 테크닉 자체가 다를 텐데 어떻게 이러지.

결국 압도적인 실력의 은찬이를 제외하고서 나랑 민재의 진흙탕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은 이런 쪽의 게임 실력은 비슷하니까. 방금 이것도 근소하게 이긴 거다.

- "테트리스는 나태해야 잘해진다고 생각해."

여전히 느긋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는 은찬이의 재수없는 말이었다.

-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 "그럴 수도 있고."

- "아오 진짜. 옵치 들어와 인마. 데스매치 까."

- "싫을 수도 있고."

- "……요즘따라 더 재수가 없구나 개새끼야."

- "무서울 수도 있고."

- "닥쳐 인마."

한심한 수준의 입씨름에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아서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나도 은찬이가 재수 없긴 한데 쟤 원래 저러는 거 민재 너도 알잖냐…….

- "근데 듣다 보니까 좀 그렇다, 노을아."

"어, 뭐가?"

은찬이의 말이었다.

- "남자 목소리 중 하나가 여자 목소리로 바뀌니까 뭔가 좀 느낌이 그래."

"안 좋은 건 아니지?"

- "좋냐 안 좋냐를 따지면 오히려 새로워서 좋은데."

"……좋아?"

이걸 좋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거였나? 난 조금 의아해져서 고개를 좀 갸웃거렸다.

- "아, 뭔지 알겠다. 나도 오히려 좋긴 해."

그리고 민재도 거들었다.

"어째서지?"

- "고추밭에 꽃 한 송이 피어났잖아."

"……."

퍽이나 직설적인 말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고추밭에 꽃 한 송이.

말 그대로 좆같은 비유구나. 참 너다워.

"넌 다음에 내 집 왔을 때 각오해라. 여장형에 처하겠다."

- "아이고 살려주십쇼 마님!"

"닥쳐."

물론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진심이란 뜻이야. 몸 사려라.

- "갑자기 생각난 건데, 노을 너 설은찬처럼 방송할 생각은 없냐?"

"그거 은찬이가 이미 말했어."

- "노을이가 싫댔고."

- "어, 어……. 그래."

민재는 나와 은찬이의 말에 머쓱해하더니 물러났다. 내가 돈이 궁한 것도 아닌데 방송은 무슨 방송이야.

뭐, TS 증후군 어쩌고 하면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될 순 있겠지만서도……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냐. 사회적인 자살을 바라진 않는다고.

- "어, 한 판 더 고?"

머쓱함을 씻어내고자 민재가 한 말이었다.

"고."

- "고."

은찬이를 이길 순 없겠지만, 뭐 어때. 재밌으면 된 거 아닐까.

우리는 한 시간 정도를 더 그러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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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 2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