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 때의 그 일은 뭐였을까. 강제로 사탕 고르라고 끌고 가놓고서는 지맘대로 발길질하고 도망가버리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다행히 오네는 승부하자며 다른 날처럼 다가왔지만 그 때의 일은 잊혀지지 않았다.

"있잖아. 이건 진짜 내 친구 이야기인데."
친구인 프리바에게 털어놓으려 했는데 순애에 미친 순애충답게 매우 흥미롭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나 이 대사 알아. 네 얘기지! 네가 나한테 상담할 정도면, 그래, 오네 이야기구나! 그래, 이 순애충 이론연애박사에게 뭐든지 물어보려무나."
그러고는 이따구 대사를 날리는 바람에 걔한테서 도망쳐버렸다. 도망가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입에 대고 눈웃음을 짓는 프리바는 덤이었다.

그래서 그 후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지금 다시 가만히 보니 오네가 제안하는 승부랍시고 끌고간 장소들은 거의 데이트코스였다. 식당이니 카페니 노래방, 당구장, 피시방... 뭔가 데이트랑 거리가 먼 곳도 많았지만 남녀 단 둘이서 놀러다닌다니, 이거 생각보다 그렇고 그런 일인 거 아닌가?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자. 자꾸 싫어 죽어 거리는데 진짜 싫어하는 건가? 그렇다면 안 되는데... 아이, 뭐가 안 된다는 거야.

가만히 술을 따랐다. 술이 단 건지 쓴 건지 모르겠었다. 대충 몇 잔 하고 바닥에 널브러져 얼굴을 파묻었다.

띵동.
누워서 소주잔을 건드리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인지 확인하려 가려고 했으나 굳이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야, 메모리! 문 열어!"
오네였다. 문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빨리 열어! 안 열면 부술 거야!"
진짜 문을 부술 기세였다. 빨리 문을 열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죽일놈! 문 열 힘도 없는 놈!"
"열었어, 열었어."
"으아아! 이제야 여냐?"

문을 열자마자 오네가 중심을 잃더니 현관에 풀썩 누워버렸다. 얼마나 마셨는지 술냄새가 진동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와?"
"버스도 지하철도 막차 끊겼단 말이야. 근데 너네 집이 가장 가깝네? 그럼 당연히 여기 와야지 어딜 가겠어?"
그러면서 쓰러진 상태에서 내 발목에 얼굴을 비볐다. 진짜 개가 된 듯 했다. 그러더니 정신을 차렸는지 머리로 발목을 한 대 박고 다른 곳으로 굴러가다시피 갔다.

아무튼 그런 오네를 집 안으로 들였다. 이제 보니 한 손에 비닐봉지가 있었는데, 술을 몇 병 사들고 왔다. 여기서 얼마나 더 퍼먹으려 그러는 걸까.
"마시자!"
"그만 자."
"마셔라! 마셔라! 이제 보니 너도 마셨구만? 같이 마시자! 마셔라! 마셔라!"
광기에 젖은 행위예술이었다. 그러더니 술병을 꺼내 거실에 놨다. 두 병이었다.

"마셔라! 마셔라!"
오네가 어떻게든 술병을 따겠다며 병뚜껑을 찾았다. 그러더니 잠깐 머뭇거리더이 승부를 제의했다.
"야, 승부다!"
"승부는 또 뭔 승부?"
"그냥 하자면 해! 너 술 못하잖아! 그니깐 내가 가르쳐준다 생각하고 감사히 여기라고!"
그냥 웃어넘겼다. 이젠 이것도 귀여워보였다. 나 얘 좋아하는 거 맞구나.

오네가 술병을 갖고 뭔가 고심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건 있는데 막상 승부 내용을 안 정한 듯 했다. 그러더니 이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진실게임 해!"
"뭔 진실게임?"
"그런 거 있잖아. 술게임. 술게임 지는 사람이 진실 말하기!"
진실게임? 그거라면... 오늘 알 수 있겠구나.
"일단 시작은 역시 병뚜껑치기로!"
병뚜껑치기. 소주병을 딸 때 생기는 병뚜껑의 꼬리같은 부분을 쳐서 한쪽으로 꼰 뒤 딱밤으로 떨어뜨리는 게임. 떨어뜨린 사람이 패배한다. 단, 여기서 벌칙은 술이 아니라 진실게임이다.

오네가 자신있다는 듯이 병뚜껑을 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선공을 했다.
"자, 나 선공! 자, 쳤다! 어디 해보시지!"
그렇게 번갈아가면서 쳤다. 약하게 치고 강하게도 치고. 그러고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꼬리부분이 거의 너덜너덜해졌다.
"자, 이제 네 차례야!"
"알았어. 간다."
어쩌다보니 몰입이 되었다. 너도 목적이 있겠지만 나도 목적이 있거든? 

그러나 그런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결과는 나의 패배였다. 조금만 톡 쳤는데 맥아리없이 떨어졌다.

"크하하핳, 역시 못하네. 너 나한테 배워라."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럼 묻는다. 네가 좋...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애?"
오네가 멈칫하다가 질문을 바꿨다. 그냥 물어봐도 되는데. 말해줄 수 있는데.
있다. 당연히 있다. 그게 나니까. 그래서 말했다.
"응."
"역시. 당연히 있지. 암, 당연하지."
뭔가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자, 그럼 다음 판."
다음 소주병을 따자 병뚜껑이 또 생겼다. 오네는 한번더를 외치며 병뚜껑을 꼬고 있었다.
그나저나 입으로 내뱉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부끄러웠다.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술기운이 깨는 듯 했다. 아니면 더 강해진 건가.
"이번에도 내가 선공."
"그게 뭐야."
"네가 졌잖아? 그니까 내가 먼저지."

그렇게 이번 판에도 내가 져버렸다. 이번에는 무슨 질문이 들어올까.
"너 좋아하는 여자 있어?"
어? 이 질문? 설마 알고 있는 건가? 진짜 작정하고 들어왔나보다 싶었다. 그냥 확 이 김에 질러버리는 수가 있는데. 얘가 날 좋아하는 지 확신이 안 서니까 그게 문제였다. 그것만 알 수 있었어도.
"응."
그것만 알 수 있었어도 바로 고백해버렸을텐데.

부끄러웠다. 그러나 내 대답에 오히려 오네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러고는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또 병뚜껑 없냐고 들들 볶았다. 그래서 쓰레기통에서 내가 아까 마셨던 병뚜껑을 뒤져보는데 꼬리가 없었다.
"꼬리가 없네."
"뭐야 그게. 아직 물어볼 거 많은데. 그럼..."
그리고 오네가 살짝 골똘해있다가 다른 게임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환해졌다. 그냥 아무 게임이나 막 부르는 것 같았다.
"역시 병뚜껑치기 다음은 업 앤 다운이지! 그럼 숫자를... 아, 사회자가 없네."
"그러네."
"그럼 뭐하지... 아, 369하자! 369!"
"알았어. 그럼 하지 뭐."

얘도 OT에서 실컷 해봤다.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말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지금 너보다 덜 마신 상태다. 내가 더 유리하다는 뜻이고.
이번엔 반드시 알아낸다. 너의 속마음을.
"1!"
"2!"
"자, 소수니까 마셔!"
"그런 게 어딨어?"
"여기!"
그런 것도 있다고?
"짝! 마신다!"
"4!"
"5! 마신다!"
"짝!"
"칠! 마신다"
어 잠만 얘가 자꾸 마셔? 오 이거 할만한 게임인데?
애초에 둘이 하는데 소수에서 마시라 그러면 2 빼고는 다 홀수인데 너만 걸리지. 그냥 생각 없이 지른 것 같았다.
오네도 자기가 질러논 규칙에 자기가 걸려 패배를 직감했는지 손을 떨면서 소주를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자꾸 너만 마시네. 괜찮아?"
"숫자나 불러. 십일."
"알았어. 짝."
"응 네가 벌칙이네. 지가 말해놓고 지가 걸리네.ㅋㅋ"
아, 맞다. 369는 3의 배수가 아니라 끝자리가 3이어야지. 방심하다 당했다.
오네가 자꾸 깔깔대며 뭐라고 하는데 계속 비웃는 투였다.

"자, 그럼 진실게임을 해야지?"
이번에는 무슨 질문일까.
"나한테 사탕 받고난 소감?"
"그... 좋았어..."
머리에서 김이 빠진다는 게 무슨 말인 지 알 것 같았다. 역시 얘도 이게 목적인가?
"구체적으로?"
"사탕 주니까 기분 좋았다고..."
오네가 싱글벙글해했다.

이제 술 한 병이 다 떨어져갔다. 오네는 뭔가 취기가 돌아서 술을 계속 들이키고 있었다. 저게 다 배로 들어가다니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럼 다시 시작! 1!"
"2! 마신다!"
"짝!"
"마셔라! 4!"
계속 이런 흐름이 오갔다. 소수만 나오면 나보고 마시라 그러니 저세상 지옥훈련이었다. 내가 자꾸 못 마시면 어디서 배웠는지 자꾸 허접거리고 있었다.
이렇게는 안 된다. 내가 어떻게든 이겨먹는다.
...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90이었다. 소수가 대체 몇 개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지옥길 그 자체였다. 아예 완전히 취하게 만들려고 할 작정인 듯 했다.
"짝!(94)"
"짝!"
"짝!...어?"
"드디어!"
드디어 오네가 졌다. 드디어 내가 질문할 차례였다. 이제 너의 속마음을 알아차린다.
근데 뭐라고 하지? 뭐라고 묻는 게 좋지?
막상 말하려니 말이 안 나왔다. 하긴 술을 그토록 많이 먹였는데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가능할리가.
일단 생각나는 거부터 해치우자.

"화이트데이 때 나 굳이 끌고갔던 이유가 뭐야?"
"어?"
"승부가 목적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냐고? 뻔히 보이거든?
자, 그럼 말해보시지. 너의 속마음을. 그것이 목적이니까.
"그건, 너를... 아, 내가 아니면 너를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 됐지?"
"그게 뭐야."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럼 설마 나 혼자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럼 난 그동안 개짓거리한거고?

뭔가 침울해졌다. 그냥 기분탓으로 술 한 병 들이켰다. 그러고나니 이제 진짜 몇 모금밖에 안 남았다.
"이러면 369 못하잖아..."
진짜 소수에서 술 마셔야 된다고 생각했던 건가. 하긴 OT에서 배운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거긴 십수명이 돌아가면서 했다고. 역시 오네가 게임하고 싶다고 아무 게임이나 생각나는대로 부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뭐하지? 나도 이렇게 끝내기는 싫었다. 나도 물어볼 거 많은데.

그래서 내가 제안해버렸다. 한번에 여러 가지를 물어볼 수 있는 게임. 서로 번갈아가며 물어볼 수 있는 게임. 이 상황에 이만한 게임은 없을 것이었다.
"손병호 어때?"
"손병호? 좋지! 이 정도로 좋은 생각은 오랜만이니까 내가 이번만 특별히 해주도록 하지!"

그렇게 손병호가 시작되었다. 아까 내가 이겼으니까 나 먼저다.
근데 뭐 먼저 말하지? 술 때문에 헤롱헤롱거렸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건 마지막에 물어봐야 된다고 상기시키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대충 얘가 물었던 거 먼저 하자.
"좋아하는 남자 있는 사람 접어."
오네의 눈이 커지더니 때릴 기세로 다가오려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드는 말로만 병신이니 뭐니 거렸다.
"너도 나한테 물었잖아."
"... 알았어, 접을게. 접으면 되지?"
오네가 한 손가락을 접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구나. 좋겠네. 나였으면.
근데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불안해.

"이제 내 차례다?"
오네는 무슨 질문을 던질까.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다 접어."
접을 수 밖에 없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니까.
"푸하핫, 접었다, 접었다. 너 주제에 누구를 좋아하냐? 어?"
오네가 깔깔대며 웃었다. 안도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비웃는 건지 모르겠었다. 이제 다 헷갈렸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거 찬스 아닌가? 역으로 물어볼 수 있는?
"그럼 너는?"
"어? 어... 그니까... 이건..."
오네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 잠깐 혼란해하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한 손가락을 접었다.
뭐야, 그럼 내 질문권이 날아가잖아. 근데 뭐 의외의 수확이었다. 그리고 그게 나였으면 했다. 그랬으면 했다.
이제 남은 손가락은 나 4개, 오네 3개.

"내 차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접어."
내 질문에 오네가 잠깐 항의하려 하더니 이내 남은 술을 조금 들이켰다.
"아, 그래 알고 있다! 그래도 너한테 소개 안 해줄거야, 새꺄!"
뭔가 기대된다. 나 4개 오네 2개.

"그럼 나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접어."
고개를 무릎에 파묻으며 손가락을 접었다. 오네가 누군지 캐물으려 하는 걸 겨우 말렸다. 나 3개 오네 2개.

"이제 내차례다. 나한테 사탕 받고 기분 좋았다 접어."
오네가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두손에 파묻고 한 손가락을 접었다. 그러면서 열린 한 쪽으로 나를 쳐다봤다.
귀여웠다. 나 3개 오네 1개.

이데 오네의 차례였다.
"내 차례지? 나한테 설렌 적 있는 사람 접어."'
이거 내릴 수 밖에 없잖아. 애초에 알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놀리려고 온 건가?
나 2개 오네 1개. 오히려 오네가 달아올랐다.
"왜? 왜? 대체 왜??"
오네의 질문에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그러더니 오네가 갑자기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에? 어떻게? 왜?"
"아, 됐고 내 차례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남은 질문권 1개를 바로 쓰기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안 접을만한 질문으로 하고 싶었다. 간다.
"최근에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접어."
"..."
안 접었다. 계획대로였다.
"봐주는 거지? 어? 나 봐주는 거지? 그치? 아니면 나 농락하는 거야 새꺄?"
나 2개 오네 1개.

이제 다시 오네의 차례였다. 이게 마지막 질문이 될 것이라는 걸 짐작했는지 자꾸 뜸을 들였다. 오네가 술을 한 잔 들이키고 겨우 입을 뗐다.
"질문이다. 나 좋아하는 사람 접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하면 난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잖아.
그렇게 손가락을 접었다.
순간 공기가 침묵했다. 묘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세상 그 어느 순간보다도 더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달려들어 숨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설렜다. 역시 이게 목적이었구나. 드디어 말했구나. 드디어. 이 순간이.
"나, 나, 나를... 좋..."
나보다 오네가 더 당황한 듯 싶었다. 얼굴이 완전히 빨개지더니 이젠 말도 더듬고 동공이 아예 멈추질 않게 되었다.
"싫어! 죽어! 미친놈!"
나 1개 오네 1개.
그렇게 잠시 조용했다. 진짜 싫어하는 건가?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이제 나의 턴이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내 질문에서 알 수 있겠지.
이미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건 밝혔다. 아주 시원한 묵음으로. 며칠간 나를 둘러쌌던 고민들의 종착이었다.
그래도 뭔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진짜 싫어하는 거였다면? 나 혼자 착각하는 거였다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접어."
오네가 잠시 버퍼링에 걸렸다.
1초. 2초. 요동치는 적막과 함께 시간이 흘렀다. 체크메이트다. 이러면 반응은 역시...
"내가 접을 리가 없잖아, 새꺄!"
안 접어?
"미친놈! 싫어! 나가죽어! 내가 너 다시 보나 봐라!"
오네가 소주병을 들고 문을 나가려 했다.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분노를 보여주면서.

어... 그러면 이거 차인 거야?
어?
나 차인거야?
진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았다. 어렸을 때도 최근에도 이 정도로 갑자기 눈물이 튀어나온 적은 없었다. 이것이 사랑이구나, 사랑은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랬다. 나는 얘를 진짜 좋아하고 있었나보다.

"싫어! 죽어!"
"그렇구나..."
잠시 침묵했다. 나 차인 거구나. 훌쩍였다. 이 기분은 좀 그러네.

"미안해. 괜히 들이대서."
"그래, 미안해해! 평생 미안해해! 죽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나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젠 앞으로 접근하지 않을게."
"그래, 그렇게...어? 뭐라고?
"이제 앞으로 너랑 만나지 않을 거야."
"어?"
계속 걸어나갔다. 비틀거렸다. 이게 실연이라는 거구나. 책에서만 읽던 이야기가 나한테도 일어날 줄은 몰랐다.
오네를 지나쳤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 갔다. 눈물이 한 줄기 내려왔다.
"앞으로 만나지 말자."
"어?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니까..."

뒤에서 조용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주변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술 벌컥 마시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술병을 책상에 내팽개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오네가 마침내 뒤에서 말했다.
"뒤 돌아."
"미안했다."
"돌라고."
그 말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못 볼 얼굴 지금이라도 봐놔야지.

오네가 한 손을 머리 높이로 들어보였다. 뭘 보라는 걸까 생각하며 오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본 모습은 나를 놀라게했다.
오네가 매우 수줍게 하나 남은 손가락을 접어 보였다. 눈물로 질펀해진 눈과 함께.
나 1개 오네 0개. 오네가 결국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래, 나 너 좋아한다! 사실 나 너 좋아했다고! 제작년부터! 그래서 따라다녔고! 그래, 이번에 화이트데이 때 고백해보려다가 부끄러워서 못 했다! 끌고 간 것도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사탕 안 받았으면 해서였고! 됐어?"
"오네야..."
"승부고 뭐고 사실 다 필요 없었어! 난 그냥 너랑 있고 싶었다고! 그냥 다 핑계였어!"
오네가 울면서 속마음을 다 드러냈다. 그리고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라면 아까 다 나온 줄 알았는데 계속 나오고 있었다. 오네가 이 정도로 격한 감정이 표출된 것고 처음이었다.
"지금 여기 온 것도 술기운으로 한 번 걸어보려는 거였고! 그래서 별의별 준비도 다 해놨고!"
오네 쪽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보였다.
"사실 네가 나한테 고백했으면 했던 거였고! 근데 내 마음이 자꾸 이상해서 준비했던 말은 제대로 안 나왔고!"
한 걸음 더 걸어갔다. 세상에 벚꽃이 날리는 듯 했다.
"사실 부끄러워서 말 못했다 됐어?"
오네 쪽으로 계속 다가갔다. 그리고 멈췄다. 내 입을 떼려 했다. 그게 정말이냐고. 그러면 이제부터...

그러나 그 전에 오네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치만 지금은 내맘대로 할거야."
오네가 나한테 키스를 갈겼다. 상상만 하고 있었던 일인데 실제로 일어나니까 실감이 안 났다. 꿈을 꾸는 듯 했다. 구름 위에 있는 듯 했다. 세상이 포근해보였다.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오네가 나를 침대 쪽으로 덮쳤다.
"내가 졌으니까 이제 날 네 맘대로 해도 돼."
그러더니 옷 위쪽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내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오네의 묶어왔던 속마음이 한 번에 다 터져나오는 듯 했다.
"오네야..."
"나 질문권 하나 남았지? 마지막으로 질문. 나랑 사귀고 싶은 사람 접어."
그 말에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가 다시 접어보였다. 오네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안도감. 해방감. 기쁨. 황홀. 행복. 성취감.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미소였다. 이 미소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아찔한 감각이었다. 머리가 몽롱해졌다. 오네도 눈에 초점을 잃고 몸을 완전히 본능에 맡기고 있었다.
"이제 하고싶은 대로 할 거야. 내가 아까 말했지? 준비는 미리 다 해 놨다고."
오네가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오네가 포장지를 뜯고는 내가 입은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자기의 바지까지 내리더니, 다시 한 마디 입을 열었다.
"지금 하고 싶은 사람도 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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