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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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주름이 파인, 그러나 피부가 희고 소년 같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고즈넉한 단독주택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그리 크지 않지만 마당이 넓고 나무가 많아서 그는 좋았다. 화사하게 핀 꽃나무가 아름다웠고 정원에 중앙에는 정자와, 그것을 관통하는 아주 큰 고목(古木)나무가 있어 싱그러운 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외관이 벽돌 타일로 장식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에게 짐은 많지 않았다. 침대와 이불장, 컴퓨터 책상과 책장 하나. 나머지는 전부 잡다한 것들이어서 이 정도만 옮겨와도 충분했다. 그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조용히 앉아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가격이 아주 쌌다. 다들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했기에 시골에서 이런 너른 집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저번 달에 돈을 지불하고 계약까지 빠르게 완료했고, 오늘 아무런 문제없이 입주를 했다. 물론 작은 슈퍼마트에 가려고 해도 차로 몇 십분 거리이지만 이런 집이라면 그 정도의 불편을 감수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책장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집어 들고, 바깥 정자에서 어둑어둑해질 때 까지 책을 읽었다. 저녁으론 간단하게 흰 밥에 김치를 곁들여 먹었고, 10시 까지 컴퓨터로 TV프로그램을 감상하다가 침대에 몸을 누여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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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물을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밤중에 꾼 이상한 꿈 때문에 감정에 휩쓸렸다. 그저 평범한 학교 건물을 누군가와 누비는 꿈이었다. 교실 칠판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교문 앞의 운동장에서 한참을 뛰어 놀았다. 그게 끝이었다. 무엇 때문에 슬퍼서 눈물을 흘렸을까.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도저히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을 그는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졸업사진도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릴 기회가 없었다.

 

그만 꿈 생각은 잊기로 하고, 그는 대충 옷을 차려입고 집 밖의 정원으로 나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싱그러운 푸른빛이 그를 맞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그는 그곳으로 다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무슨 일이시죠?

 

-미안합니다. 잠시만 정원을 둘러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일단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주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우리 아들이 이 정원에 흩뿌려져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그는 약간 섬뜩했다. 어쩐지 시골에 있다 해도 유난히 싸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죽은 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께름칙했다.

 

-우리 아들이 죽은 게 딱 고등학교 3학년 되기 직전 이였어요. 갑자기 애가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갔는데 췌장암 말기라고 하더라고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로 요양하러 내려왔지요. 원래는 여기에 풀이랑 저 키 큰 고목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요. 아들을 위해서 남편이랑 나랑 묘목을 사서 나무를 심어서 이렇게 되었어요.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어요.


-그랬어요. 얼마 뒤 아들이 죽기 전 화장을 해 달라고 했지요. 이 정원에 뿌려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몇 년 뒤에 남편 사업이 잘못되어 이 집도 결국 팔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손으로 눈물을 훔치다 가지고 온 가방 안에서 사진을 꺼냈다.


-저 고목에 사진을 올려놓고 가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사진에는 얼굴이 동그랗고 은색 테두리의 안경을 쓴 앳된 소년이 있었다. 그녀는 고목 줄기 가운데에 파인 구멍에다 사진을 넣어놓고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집을 나갔다.

 

그는 그 고목으로 다가가 그 여자가 올려놓은 사진을 꺼냈다. 그는 그 소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 그 소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봄의 푸근한 공기 때문에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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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에서 그는 저번 꿈에 돌아다녔던 학교 교실에 있었다. 교실은 온통 노란 국화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입술을 다물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그 소년에게 노란 국화꽃 하나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는 젊어진 손으로 샛노란 국화꽃을 하나 따서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바깥은 어느새 노을로 어슴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깊게 망각했던 기억이 퍼뜩였다. 그는 고목으로 달려가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그가 꿈에서 본 소년과 똑같은 인물이 들어 있었다. 다만,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흐느꼈다.

 

너였냐. 동현아. 너였냐.

 

그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기둥이 큰 나무를 힘껏 안았다.

 

그의 추억들이 서서히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