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잔 듯도 했지만 눈은 금세 떠졌다. 나는 5분 동안 꾸는 중세시대 꿈이 상당히 길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5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까지 늘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5분이 지나면 꿈이 자동으로 깨어진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꿈 패키지에서 꿈이 해제되는 조건은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가일몽이니 일장춘몽이니 하는 옛날 이야기에서는 잠깐의 시간 동안 꾸는 꿈이 한 사람의 평생 일대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5분의 꿈속에서 평생의 일대기를 체험한다면 이것도 엄청난 기회가 아닐까? 굳이 깨어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겠지.


아침을 먹자마자 이웃 아저씨가 어제와 같이 찾아왔고 우리는 함께 더 깊은 굴속에서 철광석을 채취하기로 했다. 아저씨는 오늘은 꼭 검을 휴대해야 한다고 하셨다. 깊은 굴속에는 더 강한 소년 고플린들이 산다는 것이었으니까. 


철광 입구에는 노새가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줄에 매어있었고, 우리는 천천히 어제보다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갔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저쪽 횃불 꽂이에다 횃불을 올려놓거라. 여기에서 기다리면 고블린들은 피냄새를 맡고 곧장 달려올 테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칼을 들고 서있으면 될 거야." 


조금 있으니 칼을 든 고블린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제의 새끼 고블린보다는 더 강력한 놈들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 손바닥에는 땀이 찼지만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꼭 힘을 주었다. 

"피터, 내가 목을 노릴 테니 너는 배를 찌르거라."


아저씨의 칼놀림에 장단을 맞추어 내 검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생명을 다한 고블린들은 연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아직 고블린은 연합작전을 수행하지 않는 듯 떼로 몰려올 뿐 체계적인 공격을 구사하지는 않았다. 나는 팔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더 이상 움직일 스테미너가 다 고갈갈될 때까지 고블린을 도륙했다. 

"아저씨, 좀 쉴 수 없나요? 팔이 너무 아프네요."

"여기에서는 냄새를 맡고 올 고블린은 다 온 셈이겠구나."


나는 물통을 높이 쳐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는 어제와 같이 호밀빵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다시 100여 미터를 나아가 횃불을 꽂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처럼 고블린 떼를 습격을 맞이했고, 이제는 철광의 고블린을 소탕하게 되었다. 

철광 굉도의 맨 끝자락에 있는 검은 암석을 곡괭이를 들어 내리찍는 일은 어제보다 더 힘들지는 않았다. 약간의 힘과 체력이 상승한 덕분이기도 했다.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인내심과 민첩성도 상당히 향상되었을 것이다. 


한 나절을 광물 채굴도 보낸 후 망태기에 철광석을 짊어지고 이웃 마을의 대장간으로 가서는 어제와 똑같이 검을 또 한 자루 얻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조금씩 성장하는 내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기만 했다. 집에서의 편안한 저녁 휴식에 대한 기대가 가슴을 부풀게 했다. 


저 멀리 뵈는 마을에서는 검은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향긋한 식사를 준비하는 냄새가 아니었다. 사위는 무척 조용했고 마을에 다가갈수록 그 고요함은 더욱 깊어졌다. 


마을의 첫집은 그대로 지붕과 벽이 모두 불에 타서 집터만 남은 상태였다. 그곳에는 검은 핏자국이 보이고 쓰러진 채 숨진 몸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엄마가 살고 있는 집쪽으로 뛰었다. 


역시 불에 타있었고 사람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꿈속이었지만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황당했다. 이런 슬픔을 겪어야 하다니. 꿈 패키지에 있는 시나리오일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일까? 


나와 아저씨는 마을을 이곳저곳 샅샅이 둘러보았다. 모든 집들은 불에 타버렸고, 살아있는 사람의 흔적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마을의 모든 인원이 사라진 것이다. 


"용의 지배를 받는 마물들이 마을을 공격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 마을을 공격한 마물들을 지배하는 용의 이름이 뭐죠?"

"아수라" 


나는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또 내 꿈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마을이 사라진 것이 당초 꿈 패키지의 시나리오인지, 아니면 내가 마음대로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내 무의식이 최대한 억제된 상태에서 내가 이 중세 시대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복수가 될 줄이야. 그것도 인간을 초월하는 강력함을 지닌 용이 그 복수의 대상이 될 줄이야. 아무튼 5분 동안 꾸게 되는 꿈의 스케일이 실로 방대할 것이라는 예견이 솔솔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띠링 소리와 함께 내 머릿속으로 어떤 텍스트 문자열이 흘러갔다. 


(당신은 중세 시대 꿈 패키지의 목표를 발견했습니다. 이 목표 달성을 꿈에서 깨어나는 조건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나는 용에게 복수하지 않고서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상당히 껄적지근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 5분간 이루어지는 한 인생의 일대기가 과연 무엇인지 볼까? 나는 외쳤다. 


"그래, 이 목표 달성을 꿈에서 깨어나는 조건으로 설정합니다."   


나는 용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영영 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