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약간 특이한 선생님이셨다. 그렇다고 괴팍하거나 이상했느냐고 하면 그 정도 범주는 아니었다.


다만 감성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국어 선생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이었을까.


그런 선생은 내가 장래 희망이 소설가라고 하는, 퍽이나 로망 가득한 이야기를 했을 때 내게 관심을 주셨다.


소설가라니. 나는 소설가라고 하는 직업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글이란 자아실현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소설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회사원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정말 멋있어 보였으니까.


그런 나라도 그 또래의 아이들 보다는 글 타래 깨나 풀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어렸던 내 글이 선생에게는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글을 앞으로도 쓰고 싶다고 말하니, 국어 선생님은 내게 꼭 될 수 있을 거라고, 미래엔 네 소설책을 꼭 보고 싶다고 말씀 하셨다. 이 못난 제자는 아직도 당당하게 보여줄 글이 없단 것을, 그 때의 내가 알았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되었을까?


졸업식 날, 그런 내게 선생님은 편지를 한 통 주셨다. 그 때에도 핸드폰이라고 하는 물건은 존재했었다. 그런데 편지라니. 왜 편지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 편지에는 나를 위한 여러가지 조언과 나를 격려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내게 주는 따스한 말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자라면 이런 감정은 필시 담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편지는 진작에 잃어버렸지만, 잊혀지지 않는 문구가 두 가지 있다. 


'소설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란다.'

'네 에고(Ego)를 깨고 나오렴'.


그 때의 나는 그냥 격려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멋있는 말. 감상적인 말. 감수성  풍부한, 그런 따스한 말. 그런게 들어간, 감수성 풍부한 선생님의 편지라고.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얼마나 날카롭고 차가운 말인지. 당시의 나는 꿈이 흠뻑 젖은 상태라서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편지와 함께 내게 읽어보라고 건네주셨던 책은 데미안이었다.


알이란, 하나의 세계라고. 나더러 부화하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그 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나는 아직도 내 알에 갇혀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병아리가 진작에 닭이 되었다면 자신이 태어난 달걀 껍질 따위 기억하고 있을까? 그 허접한 닭대가리가 아니더라도 필시 잊어버렸을 테지.


내 엉덩이는 무겁지도 않고 알 껍데기는 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걸 해야 하니까 생각나는 것일게다.


글을 쓰다가 모두 던져버리고 뇌를 세척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리고 동시에 그 때의 내가 했던 참으로 사치스런 상상도 떠오른다. 미래엔, 글을 써서 선생님께 보여드리겠노라고.


지금의 난 코웃음밖에 나지 않는다. 이 못난 제자가 보여드릴 것은 이세계로 전생한 치트 플레이어 무쌍 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브락시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처럼 해온다면, 알은 여전히 굳건하게 날 지켜줄 거란 사실, 격리할거란 사실이다.


그래, 최소한 죽는다면.

날개짓 한번은 시도해보고 죽는 편이 비극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