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발달하고, 점점 복잡한 것들에 신경을 쓰게 되면서, 현대인들은 수많은 문제와 갈등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사회에서는,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은 ‘다수’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공리주의는 분명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수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사상과 정책의 토대가 되어 안정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 이바지해 왔다. 

 

그러나 21세기가, 특히 지난 10년 사이에, 세상의 많은 것이 바뀌어 갔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너무 작아서 잘 보지 못했던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의 권리, 차이와 차별, 고전적인 성별 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성별관의 정의, 보다 다양해진 정체성과 인종 문제 등, 그동안 다수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여러 문제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사회적 변혁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기존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과 새로운 질서와 도덕성을 내세우며 변화를 촉구하는 사람들은 사회 전반에서 충돌했고, 변화의 목소리는 점차 커져 정책과 경제, 교육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에서 개혁을 이루어냈다. 

 

교통수단에는 노약자뿐 아니라 임산부를 위한 자리가 생겼고, 장애인들의 목소리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비판의 목소리가 분명 있지만 같은 직종의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덜 힘들게 돈을 벌 수 있는 자리에 일정 수준의 여성을 할당하는 제도 역시 마련되었다. 비록 동양인은 여전히 눈을 찢으며 유머와 조롱의 소재로 소비하지만, 흑인과 백인 간의 갈등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사회적 움직임 아래 매체에서 등장하는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풍자나 묘사를 틀어막음으로써 조금씩 봉합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가부장적인 가치를 혐오하고 부정하지만, 가장들은 기존의 권위를 잃어버렸음에도 여전히 가족 부양의 의무를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과거처럼 간섭하는 것은 싫어하고,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식을 낳고 돌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벌어다 주는 돈더미에 앉아 인생을 즐기고만 싶어 하고, 그렇게 해주지 않는, 혹은 못 하는 이들은 루저라고, 찌질이라고 비난한다.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고 가치 있는 시간을 희생해 지켜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주어지는 눈곱만큼의 혜택조차 불편해한다. 그들은 기존의 질서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이점은 그대로 가진 채로, 남들에게는 구세대의 이익을 포기하고 새로운 질서에 따른 불이익을 당연히 받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기득권이 아닐까.

 

장애인들의 경우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에 대한 지원이 미흡한 것은 사실이고, 개인적으로는 그들에 대한 지원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애인/비장애인의 호칭이나, 안내견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장애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검색해 보면,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인즉슨, 결함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공장에서 결함이 있는 불량품이 나왔다고 한다면, 불량품이 아닌, 제대로 생산된 물건들을 비불량품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누군가 주장한다고 했을 때, 그 주장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소수의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다수의 사람을 부르는 호칭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내견도 마찬가지다. 큰 백화점이나 널찍한 공공시설이라면 어느 정도 괜찮겠지만, 작은 카페나 도서관처럼 털이 날리거나 개가 장난을 쳤을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곳에서 그 한 명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수가 희생해야 하고, 만약 그것을 거부했을 경우, 처벌하는 법률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올바르고 정의로운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처럼 개 공포증을 가지고 있거나 털 알레르기가 있는 ‘소수‘들은 장애인들의 숭고한 권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야만 하는 걸까? 소수와 다수,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소수들의 권리의 경중을 자신이 있게 저울질하는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명확하게 처벌과 불이익이 존재하는 법률로써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배려의 이야기다. 멀리 떨어진 학교로 매일같이 대중교통을 타고 등교했어야 했던 나는, 어르신들이나 임산부, 무거운 짐을 들고 있던 사람들에게 곧잘 자리를 양보하곤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스스로 믿었고, 그들을 배려함으로써 나중에 내가 배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버스나 지하철에는 하나둘씩 그러한 배려를 강요하는 자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배려는 마음에서 우러나 자율적으로 행하는 것인데, 정책으로, 예산으로 사회적인 배려를 강요하는 자리를 만들어내서 지하철의 경로우대석이나 임산부 전용 좌석처럼 그 조건에 속하지 않으면 앉는 것 자체로 도덕적인 부담감을 지우고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흉물을 과연 만들어야 했을까. 배려를 강요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삭막한 세상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변화의 가치를 알량한 지식과 논리로 반대하는 머저리가 끄적여놓은 개똥철학으로 여기는 사람도, 아주 조금이지만 공감할만한 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어도 좋다. 모자란 글솜씨에도 이 글을 적은 이유는, 우리가 그저 당연하다고, 올바르다고, 도덕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러한 변화에 대해 조금이나마 의구심이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봤으면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