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스트리트뷰 찍어봄 (2021-)

카라간다 시내 전경

카라간다는 카자흐스탄 중부 사르아르카 고원에 위치한 인구 50만의 도시로, 90년대까지 카자흐 제2의 도시였던 탄광도시. 도시의 이름은 이 지역에 노란 꽃이 피는 골담초(qarağan) 관목이 많아서 붙여졌다고 전해짐. 카라간다는 소련 시절에는 돈바스·쿠즈바스와 함께 소련 3대 석탄 산지로 우랄 공업지역에 연료를 공급했다고 하며, 현재도 이곳에서 채굴된 발전·야금용 석탄이 해외로 수출된다고 함. 이러한 도시의 발달에는 스탈린 시기 중앙아시아로 끌려와 허허벌판에 철도와 광산, 그리고 도시 자체를 건설한 정치범과 강제이주자들이 큰 기여를 했다고.


모 레스토랑에 설치된 “어디-어디? 카라간다!” 기념비

카라간다는 구 소련권에서는 다른 의미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러시아어에는 “어디?(Gde?)”라는 질문에 대답을 얼버무릴 때 “카라간다에(v Karagande)”라고 대답하는 관용 표현이 있다고. 이 표현은 스탈린 시기 말 잘못하면 굴라그로 끌려가던 시절을 반영한 말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카더라: 약간 우리말의 ‘이르면 일본놈’과 비슷한 맥락 ㅋㅋ; 카라간다 중심가의 한 식당에는 2011년 “어디-어디? 카라간다!” 기념비가 제막해 도시의 소소한 랜드마크(?)가 되었다는데, 대충 두리번거리는 두 남자 사이로 초원에 사는 마멋이 “카라간다 0km”라 적힌 표지판을 보여주는 동상임.


카자흐스탄 주요 도시 인구

카라간다 일대는 카자흐족이 유목 생활을 해 오던 땅이었지만, 지역의 정착 역사는 제정 말기 이주해온 러시아/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세운 작은 마을들에서 시작되었음. 1930년대 소련은 석탄이 풍부한 이 지역에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했고, 동시에 50년대까지 카라간다 수용소를 운영하면서 이들을 노동력으로 동원하고 도시에 정착시킴(수감자들은 출소 후에도 이주가 제한됨). 20세기 중후반 카라간다는 소련 3대 석탄 산지로 우랄 공업지대에 연료를 공급했으며, 알마티와 비교해도 규모가 크게 뒤지지 않는 명실상부한 카자흐 제2의 도시였음. 그러나 소련 붕괴 후 산업 쇠퇴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면서 제2의 도시 자리를 아스타나에 내주게 됨.


카라간다 민족 구성 (1939년) (2004-23년)

소련 시절 카라간다와 주변 광산도시들의 인구는 대체로 동슬라브인 위주였으나, 다른 카자흐 도시들도 그렇듯 독립 이후 러시아인의 유출과 이촌향도 현상으로 현재는 카자흐인의 구성비가 많이 높아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간다는 지금도 러시아어 사용자가 많고 민족구성이 다양한 도시. 특히 스탈린 시기엔 수많은 민족들이 간첩으로 의심받아 원래 살던 지역에서 카라간다를 포함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는데, 1943년 카라간다 탄광 노동자의 민족 구성을 보면 러시아인이 42%, 우크라이나인이 11%, 독일인이 9%, 고려인이 6%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지금도 독일인과 고려인은 도시에 상당한 규모로 거주하고 있음.


카라간다의 구
구별 인구 변화


맨 위 지도에도 보이듯 카라간다는 시가지가 여기저기 분산된 형태의 도시인데, 소련 시절에는 공산주의틱한 이름이 붙은 5개 구가 있었으나 독립 이후 통합되어 현재는 2구 체제임: 남쪽의 본시가지는 카자흐 칸국의 유명한 판관 카즈벡 비(Qazybek bi, 1667-1763)의 이름을 딴 구가 관할하고, 북쪽에 흩어진 광산촌들은 러시아 혁명 시기 민족주의 운동을 이끈 앨리한 뵈케이한(Älihan Bökeihan, 1866-1937) 구가 관할함. 구별 인구 구성비를 보면 카자흐 독립 이후 본시가지의 인구 비중이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모양새.



[上] 스타리고로드, [下] 옛 카즈드람테아트르 극장

들어가기 앞서 카라간다의 두 구역 사이에는 스타리고로드(Старый город, ‘구시가지’)라는 지역이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탄광과 웅덩이만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황무지. 탄광 지대 한복판에 있던 이 지역은 20세기 초 도시가 처음 개발될 때 자연스럽게 시가지가 형성되었으나, 석탄 채굴로 인해 1980년대 지반 침하가 심각해지면서 주민들이 모두 이주되었다고. 현재는 1932년 지어진 극장(1952년 노비고로드로 이전)의 폐허가 외로이 남아 있음.



스타리고로드 일대의 탄광들 중 대표적 광산은 1942년 문을 연 코스텐코 광산으로, 80년대엔 연간 394만 톤의 석탄을 생산하기도 했었다고. 소련 붕괴 이후 인도의 철강회사 미탈(2006년 아르셀로와 합병되면서 아르셀로미탈이 됨)이 민영화에 따라 광산을 사들였는데, 2023년 코스텐코 광산에서 가스 폭발로 46명이 사망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이후 그동안 미탈사의 관리 부실이 조명되자 정부 및 여론의 압력을 받은 미탈은 광산 회사를 카자흐 정부에 매각했음.



노비고로드 전경

도시 남쪽의 카즈벡 비 구는 2023년 기준 인구 28만 9천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도시의 본 시가지 부분에 해당되는 지역. 이 구는 비공식적으로 중앙을 관통하는 철길을 경계로 북서쪽의 노비고로드(Новый город, ‘신도시’)와 남동쪽의 유고보스토크(Юго-Восток, ‘남동쪽’)로 구분된다고. 카라간다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노비고로드는 스탈린 시기 격자형으로 반듯하게 조성된 계획도시로, 관청과 도시의 주요 상업시설들이 모여 있음.


[上] 공원 전경, [下] 호숫가 풍경(이미지: Yandex)

노비고로드의 중앙에는 1946년 문을 연 널찍한 중앙공원이 위치해 있음. 소련 시절에는 ‘콤소몰 30주년 기념 문화휴식중앙공원’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불렸던 공원은 인공호수를 중심으로 포플러와 자작나무 숲이 조성된 형태로, 조그마한 관람차와 스포츠 시설 등을 부대시설로 갖고 있는 듯.


주정부 청사 앞 분수대(이미지: Yandex)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의 중심엔 대체로 광장과 상징축이 배치되는데, 앞에 올린 노비고로드 전경에서도 보이지만 카라간다에서는 중앙공원 동쪽으로 이어지는 공원 ~ 분수대 ~ 주정부청사 라인이 그러한 축인 듯. 짤에도 보이듯 청사 앞에는 독립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는데 원래는 화강암으로 된 레닌 동상이 서 있다가 2010년 독립 20주년을 맞이해 교체되었다고 함.



독립기념비 앞을 지나는 부카르즈라우 대로는 노비고로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시의 중심 가로로, 이 길을 따라서 주요 관청들과 랜드마크, 상업시설들이 늘어서 있음. 이 거리는 처음에 스탈린 거리로 불렸다가 흐루쇼프 시기 스탈린 격하운동에 따라 소비에트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독립 이후로는 17세기 카자흐 시인의 이름을 따 부카르 즈라우 대로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고.



대로의 북쪽 입구에는 시인 부카르즈라우의 동상이 세워진 작은 광장이 있는데, 소련 시절에는 ‘헌법 광장’이란 이름으로 뒤에 보이는 붉은 건물이 카라간다주 집행위원회(행정기관)였다고 함. 소련 붕괴 이후 카라간다의 탄광이 민영화되면서 광산 소유권을 얻은 미탈社가 이 건물을 쓰게 되었는데, 앞서 언급했듯 탄광 사고로 미탈사가 철수하면서 현재는 정부 소유의 카르메트社 건물이 되었음.


[上] 광부문화궁전, [下] ‘광부의 영광’ 동상

거리를 조금 내려가면 상당히 눈에 띄는 석고색 건물이 있는데 바로 1952년 개장한 광부문화궁전. 고전주의 양식과 중앙아시아 스타일의 장식이 결합된 건물은 대규모 콘서트 홀을 갖춘 문화 시설로 이런저런 공연과 문화 행사가 열렸다고. 이 건물도 90년대 민간 소유가 되어 사무실로 개조되었는데, 최근 정부가 사들여 2021년 문화시설로 재개장했다고 함. 궁전 건너편에 서 있는 ‘광부의 영광’ 동상도 도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



부카르즈라우 대로는 도시의 주요 상업시설들이 위치한 곳이기도 한데, 대체로 주청사 광장 남쪽으로 대형 상업 시설들이 모여 있음.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중앙백화점(ЦУМ: 참고로 다른 소련 주요도시에도 같은 이름의 백화점이 설치됨)과 함께 ‘시티몰’, ‘압솔류트’, ‘압잘’ 등 보다 최근에 만들어진 쇼핑몰들이 그 목록.


[上] 유리 가가린 기념비, [中] 아바이 거리, [下] 스타니슬라프 극장

대로 안쪽으로는 대체로 아파트 단지 위주로 이루어진 주거 블록들이 위치해 있는 모양새. 격자형으로 놓인 널찍한 거리들을 따라 가로수가 울창해서 나름 정돈되어 보이는 모습...? 부카르즈라우 대로처럼 이 동네의 많은 거리들도 과거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독립 이후 이름이 바뀌었음(예: 레닌 거리는 19세기 카자흐 시인의 이름에서 따온 아바이 거리로 개칭됨).


승리공원(이미지: Yandex)

아파트 블록들 한가운데로는 승리공원이라는 공원이 있는데 2차대전 이후 소련 전역에 2차대전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무수한 공원들 중 하나. 소련 전역에 있는 유사한 추모공원들처럼 여기도 1975년 ‘영원한 불꽃’이 조성되어 1년 24시간 내내 가스불이 타오르고 있음.



노어위백에 의하면 카라간다는 15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어 대학 수 측면에서 카자흐 3위라고 카더라. 사진에 보이는 노비고로드의 카라간다 공과대학(QarTU)은 1953년 설립되었으며, 도시의 석탄 및 야금 산업에서 일할 인력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함. 이 학교 출신의 유명 동문으로는... 카라간다 야금 공장에서 일했던 카자흐스탄 초대 대통령 나자르바예프가 있음. 대학 앞 광장에는 칸국 시절의 명판관 카즈벡 비의 동상이 세워져 있음.



다시 부카르즈라우 대로로 돌아가면, 대로를 따라 노비고로드 북쪽 외곽으로 가면 1958년 창단된 도시의 축구팀인 샤흐툐르(шахтёр, ‘광부’)의 홈구장이 있음. 1992년 카자흐스탄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래 현재까진 강등된 적 없이 매년 개근하고 있는 팀.


빅토르 초이 기념비(이미지: Yandex)

경기장 뒤편의 작은 광장에는 ‘카자흐-한국 친선기금’에서 세운 고려인 출신 록 뮤지션 빅토르 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음. 사실 빅토르와 카라간다는 별다른 인연은 없지만(...) 제막식에는 빅토르의 아버지 로베르트 최가 참석해 카라간다 시민들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의도한 바인진 모르겠지만 지도를 보면 기념비 근처로 한식당들이 몇 개 모여있는 듯.



노비고로드 서쪽으로는 미하일롭카(Михайловка)라는 주거지역이 있는데... 흡사 시골 마을같은 풍경. 미하일롭카는 카라간다 시에서 정착 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으로, 1906년 스톨리핀의 농업개혁에 따라 이주해온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초원을 개간하고 마을을 세웠다고.


[上] 카라간다 기차역, [下] 동부시장

노비고로드 남쪽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카자흐스탄 종단철도의 주요 정차역인 카라간다 기차역이 위치해 있음. 카라간다 역은 대규모 버스 터미널도 있어서 시외교통 허브 역할을 한다고. 역 주변으로는 규모가 상당한 공단과 농산물 시장, 대형 매장 등이 널찍한 부지에 자리잡고 있음.



기차역 남동쪽은 심플하게 ‘남동쪽’이란 뜻의 ‘유고보스토크’라고 불리는데, 인구 30만을 목표로 설계된 노비고로드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70년대 새롭게 조성된 아파트 단지 위주 주거지역이라고. 대충 동구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련 후기 특유의 투박한 외관의 고층 아파트들로 구성된 블록(미크로라이온)들로 이루어진 신도시.


승리공원 입구의 전승 60주년 기념비

카라간다에는 승리공원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소련 시절 만들어진 노비고로드의 승리공원이고 다른 하나는 2009년 개장한 유고보스토크의 승리공원. 유고보스토크 승리공원에는 입구에 있는 전승 60주년 기념비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참전군인 추모비, 체르노빌 원전 수습 노동자 추모비 등의 기념비들이 들어서 있음.


[上] 성모 입당 대성당, [下] 파티마 성모 대성당(이미지: Yandex)

유고보스토크 지역에는 소련 붕괴 이후 커다란 종교 시설들이 여럿 지어졌음. 1998년에는 시내 동남쪽에 도시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인 성모 입당 대성당이 지어졌는데, 1934-39년 카라간다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이후 도시의 정교회 공동체를 이끈 세바스티안 대주교의 유해가 안치되었음. 승리공원 한켠에 있는 파티마 성모 대성당은 2012년 완공된 중앙아시아 최대의 가톨릭 성당인데, 1930년대 많은 가톨릭 신도들을 수용소로 보낸 스탈린 정권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부금으로 지어졌다고 함.


애네트바바 모스크(이미지: Yandex)

소련 붕괴 후에는 물론 기독교 교회 말고 이슬람 사원들도 도시에 세워졌는데, 승리공원과 바로 이웃해 있는 민족공원 경내에 2011년 도시에서 가장 큰 애네트바바 모스크가 지어져 문을 열었음.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양식으로 지어진 모스크는 약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유고보스토크에는 1972년 개교한 카라간다 국립대 캠퍼스가 위치해 있는데 이 학교는 알마티의 앨파라비 대학교에 이어 카자흐스탄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종합대학임. 대학에는 초대 총장인 예비네이 뵈케토프의 이름이 붙여져 있음. 카라간다 공과대학과 함께 카자흐 내에서는 평가가 좋은 대학교에 속한다고.



카라간다의 인구 증가는 다른 러시아계가 많은 북부 산업도시들처럼 1990년대 이래 정체된 상황이지만, 유고보스토크 지역은 그래도 신규 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 시 외곽의 퀸게이(Küngei) 같은 동네에서는 스트리트뷰로 한창 새로운 아파트들과 주택들이 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음.



도시 남쪽의 표도롭카(Фёдоровка) 마을에는 표도로프 저수지라는 꽤 커다란(4.3km²) 호수가 있는데, 옛 탄광에 물을 채워서 만든 인공호수라고. 현재 호숫가에는 요트를 탈 수 있는 작은 나루가 있음. 호수 근처로는 소련 시절 집집마다 배급되었던 별장(다차)들이 모여 있음.


사르아르카 공항(이미지: Yandex)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도시의 관문 공항인 사르아르카 공항이 위치해 있음. 예전에는 카자흐스탄 북부의 중요한 공항이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아스타나가 20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포지션이 미묘해진 듯. 도시에서는 알마티와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 등으로 향하는 항공편이 있음.


카를라크 박물관(이미지: Yandex)

시내에서 상당히 멀긴 하지만(약 40km) 남서쪽 외곽의 돌린카(Долинка)에는 1930~50년대 운영된 카라간다 수용소(Карлаг, 카를라크)의 본부가 있었는데, 이 건물은 수용소 폐쇄 후 교도소 등으로 쓰이다 2001년 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음. 카를라크는 수십 개의 지부 수용소를 거느린 거대한 수용소로 연인원 100만 명이 수감되었으며, 수감자들은 무임금으로 탄광과 공장 건설 등에 동원되어 산업화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음. 박물관은 스탈린 시기 대기근(카자흐 인구의 40%가 사망함)과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인권 유린, 다양한 민족들의 강제 이주 등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고.



겨울의 마이쿠득

도시 남쪽의 카즈벡 비 구가 계획적으로 조성된 단일 시가지라면, 약 2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북쪽의 앨리한 뵈케이한 구는 도시의 주요 산업 지대로 탄광과 공장이 흩어져 있는 허허벌판에 군데군데 위치한 마이쿠득과 프리샤흐틴스크, 소르티롭카 등 여러 개의 작은 시가지들로 이루어진 구. 이러한 작은 시가지들은 1930년대 ‘특별 정착민’들이 허허벌판인 카라간다에 도착했을 때 처음 배치된 ‘관찰 노동 정착지’였다고 함.



도시 동북쪽 마이쿠득(Maiqūdyq)은 카자흐어로 ‘기름 우물’이라는 뜻인데, 앨리한 뵈케이한 구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북부의 중심 시가지. 시가지는 남북으로 뻗은 카를 마르크스 대로를 중심으로 기다랗게(약 7km) 이어진 형태임. 산업 지역인 마이쿠득은 90년대 산업 쇠퇴 시기에 범죄로 악명이 높았다고 하나, 현재는 카자흐스탄 경제 상황이나 치안이 많이 개선되면서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었다는 모양.


[上] 골로프킨이 살았던 집, [下] 스포츠 센터

마이쿠득은 카자흐스탄 출신의 유명 권투 선수 겐나디 골로프킨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임. 골로프킨은 1982년 러시아인 광부 아버지와 화학 공장에서 일하던 고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여덞 살에 권투를 시작해 미들급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는 스토리인데 지역 주민들은 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카더라. 마이쿠득 중심부엔 골로프킨의 이름을 딴 스포츠 센터가 세워졌음.


[上] 프리샤흐틴스크, [下] 우젠카

도시 북서쪽에는 프리샤흐틴스크(Пришахтинск)와 함께 티호놉카, 핀스키포숄로크(풀이하면 ‘핀란드 정착지’), 우젠카 등 작은 정착지들이 흩어져 있음. 프리샤흐틴스크에는 몇 개의 아파트 블록들이 있는데 나머지 정착지들은 오래된 주택 위주의 동네들인 듯.



석탄을 캐고자 땅을 파면 필연적으로 폐기물이 나오기 마련인데,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골짜기에 폐기물 적치장을 만드는데 이 동네는 평야지대라 들판에 폐기물을 쌓아 놓으면서 동산(러시아어로는 테리콘 террикон이라 부름)들이 생겨남. 그런데 석탄이 이렇게 쌓이면 내부에서 발화가 일어나면서 심한 공해를 야기하는데, 소련의 다른 석탄 산지인 돈바스에서는 이게 심각한 환경 문제가 됐지만 카라간다에선 70년대 이후 적치 높이에 제한을 두면서 문제가 덜했다고. 그래서 카라간다의 테리콘들은 대체로 나지막한 언덕 모양이지만 프리샤흐틴스크에는 오래 전에 쌓인 원뿔형 테리콘이 몇 개 있음.



핀스키포숄로크에는 대천사 미하일 성당이라는 소박한 정교회 성당이 있는데, 1946년 당국의 허가를 받아 처음으로 카라간다에서 문을 연 정교회 성당이라고 함. 도시 역사 초기에는 주민들이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해야 했는데, 독소전쟁기 애국주의 고양을 위해 정교회 탄압이 완화되면서 전후 정식으로 성당을 지을 수 있게 되었음. 성당은 유형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세워졌으며, 일터에서 퇴근한 노동자들이 개인 시간에 직접 예배당 건물을 지어졌다고 전해짐.


[上] 차고지에 전시된 기관차, [下] 소르티롭카의 아파트 블록

카자흐어로는 수릅타우(Sūryptau)로 불리는 소르티롭카(Сортировка)는 도시 북쪽 끝에 있는 지역으로, 도시 중심부에선 버스에서 1시간 이상 소요되는 먼 지역. 이곳은 앨리한 뵈케이한 구의 세 지역(마이쿠득, 프리샤흐틴스크, 소르티롭카) 중 인구가 가장 적지만 카자흐스탄 종단철도 본선과 도시 인근의 광산들로 이어지는 지선들이 여기서 집결하고, 기차 차고지도 있어 철도교통 면에서는 중요성이 높은 곳. 1931년 카라간다에 처음 도착한 기차가 이곳 소르티롭카에 정차했다고 하며, 동네 한가운데에는 ‘철도공원’이란 이름의 넓은 공원도 있음.




카라간다 도시 자체의 인구는 50만 명이지만, 카라간다 주변으로는 여러 광공업 도시들이 산재해 모두 합하면 인구 약 80만(소련 붕괴 직전에는 100만)의 도시권을 이루고 있음. 카라간다 주변 소도시들은 베드타운은 아니지만 단일산업도시(моногород) 성격이 강하고 카라간다와 경제적으로 긴밀히 얽혀 있었는데, 이들 도시는 소련 붕괴 이후 대체로 카라간다보다 경제적으로 더 크게 타격받은 편.



카라간다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사란(Saran)은 탄광이 발견되면서 1954년 세워진 도시로, 1970년대 카라간다 고무공장(КЗРТИ)이 세워져 공장에 공급되는 산업용 제품들을 생산했음. 소련 붕괴 이후 고무공장이 파산하면서 도시의 인구는 6만에서 3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공장과 함께 조성된 아파트 블록은 버려진 채 초원 위의 거대한 폐허가 되었음.



북쪽으로 30km 떨어진 테미르타우(Temırtau, ‘강철 산’)는 인구 17만으로 보다 규모가 큰 위성도시. 이곳은 원래 카라간다시에 속했다가 1945년 분리된 곳으로, 소련 최대의 금속 공장 중 하나로 4만 명이 근무했던 카라간다 야금 공장이 자리잡고 있음. 카자흐스탄의 초대 대통령 나자르바예프가 젊은 시절 이곳에서 일하며 입지를 다졌는데, 나자르바예프는 90년대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미탈이 공장을 인수하는 것도 주선했다고(현재는 처음 언급된 탄광 사고로 철수함). 이 공장은 현재도 가동되지만 오염 관리가 썩 잘 되지 않아서 도시에 검은 눈이 내리는 일도 있었음.



테미르타우는 북쪽으로 공장에 전력 및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광대한 사마르칸트 저수지(면적 82km²: 소양호보다 약간 큼)와 맞닿아 있음. 1934년부터 누라강에 댐 건설이 시작되어 1942년 첫 번째 터빈이 가동되었고, 저수지에 물이 모두 채워진 건 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고. 저수지 옆 강둑에는 2차대전 이후 일본군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는데, 일본군 포로들은 도시의 발전소 및 공장 건설에 동원되었다고 함.



유고보스토크

이상은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 제2의 도시였던 카라간다의 모습들. 카라간다는 소련의 산업화 과정에서 원자재 산지와 연계되어 만들어진 도시 중 하나로, 1931년 처음 철도가 도착한 이래 불과 10년만에 텅 빈 초원에서 광공업 중심지로 변모한 곳: 물론 이는 ‘카를라크’로 상징되듯 극단적 동원의 결과였지만. 동시에 체제 전환 과정에서는 산업 쇠퇴와 인구 유출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시이기도 했음. 이제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구시가지, 반듯이 계획되고 곳곳에 기념비가 있는 신도시, 변두리의 빛바랜 노동자 지구로 이루어진 도시의 풍경은 이런 내력들을 보여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