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모두 자작입니다. 선은 실제 국경이 저랬다는게 아니라 대략 저랬다는 겁니다. 애초에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국경 개념이 없었습니다. 지도가 정확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 지도에서는 고조선 시대의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설을 따랐지만 개인적으로 패수의 비정에 대해 패수가 요동에 흐르는 강 중 하나를 가리킨다는 설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 기원전 4세기경


(참고: 이후석. (2017). 고고자료를 통해 본 만번한. 동북아역사논총, (57), 116-169.)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어 동쪽(조선)을 침략하여 땅을 빼앗으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언하자 곧 그만두었다. 조선후가 예를 시켜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이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위략>-

2. 기원전 3세기 경

(참고: 이후석. (2017). 고고자료를 통해 본 만번한. 동북아역사논총, (57), 116-169. 
오강원. (2011).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적과 연 문화의 관계. 한국상고사학보, 71(): 5-32)

"이후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곧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위략>-

*만번한(滿番汗)은 중국 학계에서는 평안북도 박천군으로 보고, 국내 학계에서는 천산산맥 일대로 보는게 다수설입니다.

3. 기원전 230년~210년 경

(참고: 중국역사지도집 등)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政略)상 진나라에 복속(服屬)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위략>- 

(진의 침식선이 청천강인 이유는 고조선 시대의 패수는 압록강이라고 보는게 다수설이고 <사기>조선열전에 "... 한(漢)이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정하고..."라는 부분이 존재하는 걸로 보아 진나라는 압록강을 넘어 영향력을 행사했던 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4. 기원전 190년 경


"그 뒤 20여년이 지나 진(陳, 진승)과 항(項, 항우)가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제·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준에게 망명하므로, 준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盧綰)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도망간 뒤,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번병(藩屏)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략>- 

*한사군 시대의 패수는 점제현신사비의 발견 이후 청천강으로 비정하는게 정설이지만 한나라와 고조선이 공존하던 시대의 패수(浿水)는 압록강으로 비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5.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20년대

(참고: 동북아역사지도. 위만조선과 진국 기원전 194~109년, 
송호정 외,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2004)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숙위(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위략>-

"마침 효혜(孝惠), 고후(高后) 때를 맞이하여 천하가 비로소 안정을 찾자 요동 태수는 곧 위만과 외신(外臣)이 되어 요새 밖의 만이를 보호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만이의 군장들이 들어와 천자를 만나고자 할 때 금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를 보고하니 주상이 허락했고, 이로써 위만은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가까운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땅이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 -<사기> 조선열전-

"한나라 초에 연의 망인 위만이 조선의 왕이었는데 당시 옥저는 모두 속하였다." -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